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
예전에 정부에서 사교육비 절감 대책을 담당할 때 ‘왜 사교육을 받는가?’라는 설문을 한 적이 있었는데, 가장 많은 이가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라고 답했던 것이 생각난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데 도움이 되니까 특목고에 가고, 또 이를 위해 어릴 때부터 영어유치원에 보내고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그러면 회사는 이렇게 20여 년을 준비해 온 신입 직원에게 만족해할까? 얼마 전 S 전자의 인사를 총괄하는 전무는 한 세미나에서 “신입 직원을 채용해 나름대로 일을 할 정도로 키우려면 거의 1년 반의 시간과 수천만 원의 교육비가 든다”고 하였다.
학생들은 취직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준비해 왔는데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 회사는 대학에 책임을 떠넘기나, 결국은 신입 직원 선발 기준이 실력보다는 스펙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눈치 빠른 취준생들이 더 잘 알기 때문에 수업은 학점 따기 쉬운 과목 위주로 대충 듣고 나머지는 입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스펙 쌓기, 어학연수에 올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어가 업무에 정말 꼭 필요한 부서는 얼마나 될까? 대부분 직장은 심지어 신의 직장이라 불리는 곳에서조차도 특별한 부서가 아니면 영어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보다는 전공 실력과 분석 능력, 문제 해결 역량,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인성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안다. 회사만이 그런 기준으로 인재를 뽑을만한 자신이 없어서 자꾸만 스펙을 보려 하는 것이다.
인류가 맞이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는 빅데이터와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능력을 엄청나게 강화해준다. 이제 단순히 많은 것을 암기하는 것보다는 인터넷과 빅데이터에서 유용한 정보를 누가 더 빨리 찾아내고 잘 활용하는가가 경쟁력이 되었다. 어느 나라 사람을 만나든 AI가 유창하게 그 나라 말로 동시에 통역해 주는 세상에서 굳이 힘들게 서로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대화하는 일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세상에서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할까? 역설적으로 너무 앞서 가르치려 하지 말고 그냥 커가는 대로 제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자라도록 놔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세상이 빠르게 변해도 아이가 태어나서 한 달 만에 걸을 수는 없다. 첨단 로봇 보행보조기를 사용하면 6개월 만에 걸을 수 있다고 해서 자기 자식에게 이를 채워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두뇌는 검증되지도 않은 몇몇 전문가의 이론과 이에 편승한 이들의 상술에 맡기는 이가 많다. 요즈음 창의력이 중요하다고 해서 우뇌를 발달시키는 여러 가지 교육 방법이 유행인데,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과연 창의력이 키워질까? 아이의 창의력은 우뇌를 강제로 자극한다고 해서 발달하는 것이 아니라 제 또래들과 장난감을 갖고 노는 과정에서 자연히 키워지는 것이다. 보리가 유난히 따뜻한 겨울을 보내고 나면 싹이 웃자라서 막상 따스한 햇볕이 필요한 봄날에 낱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자연의 이치를 배워야 하는 이유다.
인간과 AI, 로봇이 어울려 사는 미래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사회적 질서의 소중함, 좋은 인성을 심어주고 인류가 쌓아온 많은 지혜를 책을 통해 서서히 깨달아가게 해줘야 한다. 인류는 수십만 년간 다른 생물들과 경쟁하며 살아남도록 진화해 왔다. 유례없이 무생물인 AI와 경쟁하는 세상이 되었지만, 결국은 AI에 지배당하지 않고 잘 활용하여 또 한 번 크게 발전하리라 확신한다.
다만, 우리 아이들이 그러한 세상에서 살아남게 해주려면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나만 먼저 가려고 끼어들면 모두가 늦어진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나부터 끼어들지 말아야 한다. 회사는 대학 탓만 하지 말고 어떤 인재를 찾고 있는지 인재상을 명확히 제시하고, 대학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기초학문을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부모는 주변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할 수 있게 해준 다음 믿고 기다려야 한다. 진득하게 오래 참고 어려운 과정을 견딜 수 있게 용기를 북돋아 줘야 한다. 요즘은 만물박사보다는 한 가지에 빠진 '덕후'가 더 경쟁력 있는 세상이 되었다. 진득한 덕후가 세계 최고의 프로페셔널이 될 수 있도록 마당을 펼쳐주자.
/양성광 연구개발특구진흥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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