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뿌랑주(布朗族)촌에 돌아와 며칠이 지났다. 같이 昆明에 다녀온 玉선생은 필자와 양부(養父) 양녀(養女)관계로 발전, 더욱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의 어머니도 우리 둘의 관계를 인정하고 축복해 주었다.
玉선생은 정말 친아버지에게 하듯 살갑게 대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의 어머니가 몸살 감기로 자리에 눕게 되었다. 평소에 건강하던 그 였기에 모두들 근심어린 얼굴로 전전 긍긍할 뿐 환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질 못했다.
부락에는 약국도 없고 물론 의사도 없다. 궁벽한 소수민족촌을 다니면서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던 부분이 바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어디서나 무당이 활개를 치고 있었다. 이곳도 예외는 아니어서 玉선생은 어머니를 부축하여 마을 한 쪽에 있는 무당의 집으로 가는 것이었다.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는 필자도 따라 붙었다. 옛날 우리나라 농촌에서도 볼 수 있었던 삼신할매의 집이나 무당의 집과 겉모양부터 그렇게 같을 수가 없다. 어느쪽이 원조인지 모르지만 긴 대나무를 집 앞에 세워놓은 것까지, 그리고 대나무 끝에 붉은 천을 매단 것까지 너무나 흡사했다.
마당에 들어서자 머리를 산발한 듯한 할머니가 손님을 맞는다. 70세는 족히 되었을 할매는 눈빛만 살아서 예리한 섬광을 발하고 있다. 마당 한 쪽에 놓여있는 나무의자에 환자를 앉히고는 마치 기독교의 안수장면을 연상케하는 동작으로 환자의 머리를 누르며 주문을 외운다.
사뭇 경건한 자세다. 잠시 후엔 마른 쑥같은 것을 한 줌 환자의 목에다 대고 부벼댄다.
또 몇 가닥 쑥대로 이마를 긁어 대기도 한다. 얼마나 세게 문질렀는지 이마에서 피가 흐른다. 그리고 또 몇마디 주문을 외우더니 환자의 등짝을 탁탁 소리가 날 정도로 때리면서 "가 봐! 가서 설탕물 한 그릇 마시고 푹 자고나면 낳을거야."하고는 손을 내민다. 玉선생이 얼마인가를 손 위에 얹어주고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필자의 눈에는 우습기 짝이 없는 무당의 짓거리지만 가만히 두고 볼 밖에. 그런데 신기한 것은 환자의 동태다. 집에 돌아와 무당이 시키는대로 설탕물 한 그릇을 마시고 잠이 들었는데, 저녁 무렵엔 언제 아팠느냐는 듯이 감쪽같이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선 것이다.
무속(巫俗)의 불가사의한 세계를 보는 것 같아 神通하기만 했다. 소수민족 布朗族은 원래가 태국에서 이주해온 것이 그들의 뿌리다. 불교의 영향, 특히 라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부락에서 약 200M 쯤 떨어진 언덕 위에 5백여 년 전에 지었다는 사찰이 있는데, (사찰이라기 보다는 포교당같은 분위기)사찰 앞에 세워진 탑만이 옛날의 모습을 지켜내고 있었다. 80세가 넘은 노승이 있고 30여 명의 동자승과 잡일을 하며 숙식을 제공받는 남여 노인네가 두 명이 있다.
布朗族의 전통 가운데 하나가 집안의 아들을 동자승으로 보내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소년들은 머리를 깎기도 하고 그냥 기른 채 사찰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입교(入敎)를 하는 것이다. 부모는 그 댓가로 사찰에 양식을 보낸다고 했다. 동자승이 된 소년들은 사찰에서 불경을 배우고, 낮에는 승복을 입은 채로 학교엘 다닌다.
빠르면 5~6세에도 보내고 보통은 10세 전후에 보내지며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까지도 승려생활을 지내야 남자로서 기본적인 수행을 마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와 그 숫자가 줄기 시작하고 있어 사찰에서는 노승이 직접 부락으로 내려와 부락민들을 설득하기도 한다며 玉 선생이 귀띔해 준다.
소수민족 뿌랑주(布朗族)의 경로사상은 참으로 존중할만하다. 노인이 앉아 있으면 여자들은 결코 그 앞을 지나갈 수가 없다. 만약 급한 일이 있어 지나치게 되면 반드시 허리를 반쯤 접고 지나간다.
화롯불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가 노인의 자리이며 만약에 젊은이가 노인을 제치고 앉았다가는 불호령이 떨어진다. 농사를 지어 수확철이 되면 가장 먼저 맛보는 사람도 그 집안의 노인들이다. 차를 마시거나 술 한 잔을 해도 꼭 노인이 먼저 마신 후에 따라 마셔야할 정도로 노인에 대한 예의가 깍듯하다.
오랜세월 소승불교가 생활화 되어온 이들은 사찰에 들어갈 때 반드시 입구에서부터 신발을 벗을 만큼 종교에 대한 경외심이 강하다. 부처님의 머리나 어깨를 만지거나 짚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재밌는 풍속 가운데 하나는 장례문화다.
이쪽 지역의 여러 민족은 사람이 죽으면 밭이나 길가 아무데고 매장해 버리고 평지를 만들어 버리는데 布朗族은 반드시 산에 묻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년령별로 그 높이가 틀리다는 점이다. 일테면 70,80대 노인의 묘지는 산상 제일 높은 곳에 묻고, 50, 60대는 그 밑 쪽 비탈에, 30, 40대는 역시 그 아래쪽 산 계곡에, 30대 이하라면 제일 아랫쪽에 매장을 하는 것이다.
죽어서도 장유유서(?幼有序)가 분명한 布朗族들인 셈이다.
또 한가지 재밌는 것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짓는 방법이다.
아기가 태어난 지 3일 후 아니면 1개월 후에 작명의식을 거행하는데 성이 없고 이름만 있다. 남자 아이면 이름 앞에 「岩」자를 붙여주고, 여자 아이는 「伊」자를 붙여준다. 布朗山 지역의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 모두가 어머니의 이름 字를 갖다 붙인다. 먼저 아이 이름의 앞에 두 字를 선택하되 어머니의 이름 가운데 두번째 글자를 아이 이름 뒤에 갖다 붙인다. 예를 들어 한 여성의 이름이 牙冷榜이라면 그녀의 아들 이름은 岩?冷이 된다. 岩?冷이 장성하여 결혼을 하고 아내가 딸을 낳으면 아내의 이름인 依光?를 의식, 딸 이름은 依向光이 된다. 어머니 전체 이름 글자 중 두번 째 글자가 연결된 것이다.
이에 대해 玉선생은 원시 씨족사회의 제도가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고 밝히면서 이 전통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布朗族은 타민족이 갖고 있지않은 독특한 전통악기를 갖고 있다.
크게 두 종류로 나눠 타악기와 관현악기라 할 수 있는데 타악기는 나무 북 등 두드려서 소리를 내는 것으로 불교행사 시에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관현악기로는 나무 피리, 호리병 박 생황, 양뿔 호각 등 여러가지 원시적인 것이 있다. 관현악기는 주로 결혼식이나 노래자랑대회 등 축제 행사 시에 사용한다.
이들의 축제에 빠지지 않는 것이 춤이다.
다분히 무술적인 개념이 섞여있는 춤은 노래와 무술이 한데 어울리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주 먼 옛날 사냥을 나가기 전이나 사냥을 하고 돌아와서 분위기를 고조시키던 때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갈만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춤이 오랜세월 지나오면서 새로운 춤사위로 발전하였을 터이고 지금에 와서는 아름다운 동작으로 변형되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매년 음력으로 청명절이 지나고 7일 후, 布朗族 특유의 발수절(潑水節: 파쑤지에)이 있다.
인근의 부족이 바로 이 潑水節로 유명한 데 이곳 布朗族 역시 물을 뿌리는 풍습은 똑 같지만 모래를 쌓아올리는 습관은 독자적인 것으로 특기할만 하다. 潑水節이 되면 남녀노소가 대바구니를 들고 하천으로 나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물을 뿌리는데 옷이 젖는 것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상대방에게 물을 뿌려주는 의식은 앞으로 모든 일이 만사여의토록 축복해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는 한편 모래를 끌어 올려 이것을 '?寺'라 부르는데 모래를 사찰 앞 광장까지 나른다. 광장에는 삽시간에 모래 둔덕이 생기고 사람들은 꽃과 나무가지를 꺾어다가 모래 위에 꽂기 시작한다.
이런 일련의 의식 행위를 하루에도 3~4회 거듭하고, 밤이 되면 이 모래 둔덕을 중심으로 빙 둘러선 채 춤과 노래판을 벌인다.
일종의 캠파이어인 셈이다.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독특한 풍습이 많은 소수민족 布朗族. 신음식을 좋아하는 이들 요리 가운데 '?生'은 특별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물고기 요리도 시게, 죽순요리도 시금털털하게, 배추요리도 우리들의 신김치처럼 신맛이 나도록 요리를 한다. '?生'은 돼지고기를 칼로 다진 후 쌀을 일었던 물로 씻어낸 후 모과를 잘게 썰어 고기 사이사이에 절이듯이 넣는다. 그 다음엔 소금, 생강가루, 고추가루, 산초가루, 마늘, 향채 등을 섞어 버무리면 이제 맛있게 먹는 일만 남았다.
이쯤 되면 색깔이 아름답고 향이 풍기며, 신 맛에 톡톡 쏘는 맛, 매운 맛, 그리고 냉한 맛까지 합쳐 오미(五味)를 즐길 수 있게 된다.
뿌랑족(布朗族)들은 아주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잊지 않고 내놓는 요리가 바로 이 '?生'이다.
가난하지만 이웃간의 인정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소수민족 布朗族 촌.
이 마을을 감싸듯 솟아있는 뿌랑산(布朗山)은 수 십 개의 계곡이 있고 한 번 길을 잘못 들이면 영원한 미로에 갇힐 듯 울울창창한 수목과 숲들로 가득차 있다. 중학교 남학생 몇 명과 산을 올랐다.
아이들은 늘상 다니던 길이지만 나름대로 완전무장 차림이다. 그들 가운데는 칼을 찬 녀석도 있고 긴 밧줄(구명용으로 보인다.)도 칭칭 감아서 한 쪽 어깨에 걸친 녀석도 있다.
마치 계곡 탐사대라도 되는 양 우리들은 호기있게 계곡을 타기 시작했다. 300m는 실히 됨직한 폭포까지 오는데 무려 두 시간이나 걸렸다. 두 갈래로 나뉘어 떨어지는 폭포의 낙차소리가 어찌나 우렁차든지 옆 사람과의 얘기는 고함을 질러야만 들릴 정도다.
폭포 밑에는 자연스럽게 호수가 형성되었고 물에 손을 담그면 금방 파란색 물감이 묻을 것만 같이 짙은 남색이다. 온 몸이 땀투성이였는데 아이들은 순간적으로 옷들을 훌러덩 벗어던지고 풍덩 풍덩 뛰어들며 자맥질이다. 이쪽 저쪽에는 괴목들이 숲을 이루는 가운데 칡넝쿨들이 사방으로 엉킨 채 늘어져 있다.
물에 들어갔던 아이들은 차거운 물에 몸이 얼어서 입술을 덜덜 떨며 나와서는 칡넝쿨에 매달려 타잔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삽시간에 숲속으로 사라졌는가 했는데 이름도 모를 과일들을 한 아름씩 안고 돌아왔다.
약간 신맛이 돌면서도 달콤한 산과일들이다.
한 녀석은 새 순이라고 생각되는 나뭇잎들을 따가지고 와서 씹어보라고 한다. 몇 잎을 입에 넣고 씹다가 그만 토해내고 말았다. 이런 나를 보고 녀석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고약한 녀석들! 어른을 놀리다니. 그런데 그런 마음은 잠시뿐, 너무 써서 뱉어낸 후의 입안에는 생전 처음 느끼는 고소한 맛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들이 부르는 그 나무잎의 이름은 잊어먹었지만 분명 약초임엔 틀림없었다.
쓴맛 뒤에 고여오는 고소함. 아이들은 바로 그 맛을 알고 즐겼던 것이다.
한 시간 가량 폭포 가에서 즐기다가 그들이 내놓는 주먹밥을 먹었다. 꿀맛이다. 나무 잎에 싸여있는 주먹밥엔 소금만 뿌려져 있을 뿐인데 이렇게 맛있는 밥이 또 있을까 싶다.
다시 산을 오른다. 폭포 소리가 거의 희미해질 무렵, 어느쪽에선가 꽥꽥 꺄웅, 꺄웅 하는 이상야룻한 소리가 시끄럽다. 한 녀석이 원숭이들이라고 일러준다.
사람의 눈에는 뜨이지 않으면서 그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에 대한 경계 신호인 모양이다.
#하산 후 3일간 누워 지내
가끔 민가 근처까지 내려와 밭작물을 도둑질한다는 원숭이들이라고 부락민들의 걱정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곳의 원숭이들은 성질이 난폭해서 덫에 걸려도 죽을 때까지 악을 악을 쓰며 발버둥을 친다고 했다.
농작물 피해가 하도 심하다보니 정부당국에서도 이들의 포획을 눈감아 준다고 했다.
그러나 좀처럼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는 교묘한 위장술과 그들 나름대로의 작전이 비상하다고도 했다.
소승불교가 전통적인 곳이어서 가급적 살생을 피한다는 촌민들이지만 곳곳에 덫을 놓고 이들이 걸리면 달려들어 잡는데 한 곳에 가둬놓고 있다보면 원숭이만 사러오는 상인들이 있어서 한꺼번에 팔아넘긴다. 원숭이를 사가는 상인들은 이들을 다시 야생요리집에 되팔고, 특별요리로 내놓는다는 얘기다. 원숭이 요리집은 비밀리에 하고 있기 때문에 당국에 쉽게 포착이 되지 않는다.
부락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은 비단 원숭이뿐만이 아니었다. 종종 마을까지 내려오는 멧돼지들도 만만찮은 존재들이다. 산세가 하도 험하다보니 온갖 동물들이 살고 있어서 아이들이 산타는 것도 부모들은 말리고 있다. 이른 아침에 출발한 우리들이 다시 부락으로 내려온 것은 땅거미가 어스름해지기 시작할 무렵이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아이들도 몇 군데 나무에 긁히고 넘어지면서 입은 작은 타박상들이 대부분이였다. 숙소로 돌아오자 玉선생과 그의 모친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맞이한다. 아이들과 산에 간다고 해서 잠시 다녀오는 줄로만 알았다면서 어른들도 전문 산꾼들 아니면 쉬 오를 생각을 안한다며 한숨까지 쉬고 있다.
그녀들의 얘기는 빈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날 밤부터 내리 사흘간을 끙끙 거리며 앓다가 일어섰다.
두 번이나 발을 헛짚어 굴렀었는데 온 몸에 시퍼런 멍이 들었고, 쑤시고 아픈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소수민족촌은 가는 곳마다 많은 느낌과 감동을 받았지만 뿌랑족(布朗族) 역시 감회가 남다른 곳이었다.
수양딸이 된 玉선생은 그 후에도 계속 소식을 주고 받아 왔는데 지난 해부터 그녀의 핸드폰 번호가 바뀌면서 연락두절이다. 집주소로 편지를 띄워봐도 답장이 없다.
모르긴해도 그녀는 오매불망하던 남편을 찾아 나섰든가, 뒤늦게 찾아온 남편과 거주지를 옮겼든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뿐이다.
어디가서 살던지 건강하게 그리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만 기원한다.
<다음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