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다육식물의 하나인 가랑코에가 꽃망울이 올라온 채로 얼어버렸고, 물만 주면 꽃을 피우던 풍로초도, 싱싱하던 베고니아도 움츠린 기색이 역력하다. 그나마 며칠 전 조금 안쪽으로 자리를 옮겨준 가랑코에는 살았고 큰 화분으로 한 겹 바람을 막아준 카네이션은 이 와중에도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이코, 그 날 비좁더라도 모두 다 베란다 외벽에서 한뼘씩이라도 안쪽으로 들여놓을 것을…. 말갛게 얼어버린 가랑코에 잎을 만지며 뒤늦은 반성을 했다. 지난해부터 베란다에 나란히 놓인 채 앞다투어 예쁜 꽃을 피우던 가랑코에 화분들이었는데, 강추위 속 한걸음도 안되는 관심의 차이에 그만 죽고 사는 영 다른 처지가 되어버렸다.
사소한 차이가 커다란 차이로 이어진 것이다. 물론 어느 해보다도 추운 날씨 탓이라고 밀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일상적인 관심이 소홀했다는 점이다. 나 자신 추운 것에만 온통 집중하느라 옆을 둘러보지 못한 점. 매일 살펴보았던들 그렇게 되었을까? 약간의 시간만 더 들였어도 이리 저리 위치를 바꾸어주었을텐데, 대단히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도 아닌 것을...
생각하다보니 사람들간의 대인관계도 그렇지 않은가 싶다. 자주 부딪히는 공간에 머물고, 만나고, 차라도 마시고, 괜찮냐, 기분은 어떠냐, 밥은 먹었냐는 등 별스럽지 않은 말, 의례적인 말, small talk을 나눌 수 있어야 관계를 유지할 수 있나보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de, out of mind)." 라고 하지 않는가. 신념, 가치관, 사랑, 우정이 관계를 형성하게 하지만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일상의 힘이 큰 것 같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small talk이 관계를 살아있게 하는 물이고 공기이고 햇빛이려나.
지난 해 유독이도 잦았던 사람으로 인해 씁쓸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믿거라 했던 사람이 결정적인 순간에 기대와는 영 다른 행동을 해서 엄청 실망했던 느낌, 필요한 게 있어서 다가올 때 표정과 목적을 이룬 후 떠나는 얼굴 표정이 너무 달라져서 놀랐던 마음, 스믈스믈 멀어지기 시작해서 어느 새 잘 모르는 사람이 된 쓸쓸함 등등.
이렇게 저렇게 얽힌 관계가 많은 것을 사는 맛이라고 생각하며 지냈던 철없음을 깨우쳐주는 각성의 경험들이었다. 울고불고할 나이도 지났으니 어쩔 수 없이 사람의 마음은 움직이는 것이라며 떨떠름하게 정리하고 있던 차였다. 인간관계란 주고받는 것이니까 그 중에 절반은 내 탓이려니 하는 마음으로.
하긴 모든 관계를 다 유지하며 어찌 살겠는가? 가끔씩 중요한 관계들만 남기고 정리해야 훌훌 가볍게 살 수 있을 것이다. 묘한 것은 10년 전쯤 비슷한 경험을 했던 것 같은데 그 때와 똑같지는 않지만 유사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간호학자 로저스(M. Rogers)의 이론대로 인간의 행동은 패턴을 이루며 반복되나 보다. '얼어버린 가랑코에'로부터 관계를 유지하는 사소함의 가치를 배우며, 관계도 생명처럼 가꾸어야함을 깨달으면서, 평생 배운다는 명언을 또 한번 증명한다.
이 겨울 추위가 어느 새 베란다를 가득 채운 화분들을 적당히 정리할 기회인 것도 같고, 살아남은 가랑코에를 잘 가꾸어서 봄이 오면 빈 화분까지 채울 도전의 기회인 것도 같다.
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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