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낙준 주교 |
초등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색종이와 가위를 가져오라는 말에 저는 집에서 사용하는 큰 가위를 가져갔습니다. 다른 친구들의 책상위에는 빨강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달린 문구점에서 산 가위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그러나 제 책상위에는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무겁고 손잡이는 헝겊으로 둘둘 말아 손때가 묻은 검은색 가위였습니다. 빨강색의 손잡이와 하얀 가위 날을 가진 가위는 예쁘게 보였고 제 가위는 손때가 묻어있어 창피하였습니다. 그 때 어떤 연유에서인지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서 일어났는데 금방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아마 선생님에게는 제가 가져온 가위가 다른 아이들것과 달라서 신기했던지 다른 아이들에게 그 다름을 보여주고자 했는데, 나는 그 다름을 부끄럽게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은 자신과 같은 것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실은 자신과 다른 것과 만날 때 얻는 힘이 더 큽니다. 자기만의 아집의 틀 안에 갇혀 살 때 겉으로 보기에는 강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내적으로는 강하게 살 힘을 얻지 못합니다. 자신과 다른 곳에서 인간의 희망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옛 성현들이었습니다. 유대교 회당 안에서만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동네마다 돌아다니며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서 희망의 비전을 본 분이 바로 예수라는 분이셨습니다. 왕궁 안에서가 아니라 왕궁 밖의 나무 아래에서 희망을 본 분이 싯타르타 라는 분이셨습니다. 같은 곳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으신 성현들처럼 우리들의 희망은 우리와 다른 사람에게서 옵니다. 자신과 다르다고 하여 분노와 적대로 시작할 때는 함께 망가지지만 그 다름에 대해 연민으로 시작할 때에는 함께 살아가게 됩니다. 남북의 문제와 소수자의 문제에 대해서 연민으로 볼 때 우리는 함께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희망을 주는 근거가 되니 참으로 존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연민은 용서를 전제로 합니다. 혼자서는 용서로 가는 길을 모릅니다. 용서는 두 사람 이상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 대한 용서를 행하려면 자신의 속내를 누군가에게 쏟아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풀고 나서야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희망은 자신에 대한 용서를 하고나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때 오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용서가 풍부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수록 용서가 적어 편협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편협해지지 않으려면 용서가 풍부해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용서는 혼자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의 용서를 받아야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신을 필요로 합니다. 관용의 신께서 우리에게 관용을 베풀어 주셨기에 생명존재가 된 것처럼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여 신의 품격을 지닌 고귀한 존재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 모두가 그러한 삶을 발견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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