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성산성/사진=조영연 |
한편 문경(고모산성)과 죽령을 넘어오는 교통로(현재의 중앙고속도로, 5번국도 부근)는 각각 적성산성의 남벽과 동벽을 거쳐 제천, 한양 방면으로 북진한다. 단성에서는 영주-제천길에서 분기돼 국토의 중앙인 충주로 가는 35번국도가 출발한다. 적성산성의 임무는 이런 육로, 수로들이 교차하는 삼각점에 위치해서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었다. 이 교통로들은 멀리는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조선 나아가 현대(6.25)까지의 우리 역사 속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해 왔으며 그 요충지에 적성산성이 자리했다.
성 위에서는 서쪽과 남쪽 지역과 수로가 모두 감지되며 동쪽은 죽령 문경 등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교통로와 지역이 관찰된다.
서벽과 남벽은 남북으로 진행되는 강과 죽령천을 해자처럼 둔 높은 지형이지만 약간의 사면 속에 적성비 아래 부분까지의 평탄지를 감싸면서 동과 북벽을 축조하여 전체적으로 남북으로 길어진 타원형이다. 대체적으로 외면은 경사가 졌지만 지대가 높은 서북쪽은 외측의 경사가 더욱 심하다. 동남쪽 비교적 평탄한 지역에 건물 등 시설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동벽의 낮은 곳으로 배수구를 냈다. 성벽의 둘레가 약 920m인 테뫼식 산성이며 북동쪽 협축벽 일부가 원형으로 잔존하나 동,서,북벽은 현재 높이와 폭 삼사 미터 정도로 복원된 상태다. 서, 동, 동남에 문지가 있으며 서벽의 문지는 현문 형태로 복원되고 동쪽은 계단을 통해서 휴게소쪽으로부터 오르내리게 됐다. 東國輿地勝覽에 석축. 우물 하나' 등의 기록이 있다. 잔존 원벽이 비교적 얇은 장방형 자연할석들로 가지런하고 섬세하게 싸여진 바는 온달산성과 비슷한 점도 있으나 석재의 두께가 약간 두꺼우며 대림산성이나 장미산성들과는 상당히 다르다. 현재 이들 성들이 어느 나라 성이냐는 단정짓지 못한 상태다.
적성산성 앞 교통로 모습. 앞쪽이 죽령이다./사진=조영연 |
단양 적성산성비/사진=조영연 |
성내에서는 백제나 신라 등 삼국토기 및 와편들과 더불어 고려유물들도 출토돼 삼국시대에 활발히 활용되다가 고려 때까지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한다. 진흥왕 때 세운 적성비의 내용으로 미뤄 고구려와 신라간 쟁패기를 거쳐 6세기 중반 무렵부터는 신라가 확보하여 전진기지로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적성산성과 연관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赤城碑(국보198)의 발견이다. 이 비는 1978년 단국대 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견된 것으로 높이 97×폭 107㎝의 화강암 자연석으로 조성됐으며 위는 넓고 아랫 부분은 뾰족하여 받침돌에 꽂아 놓은 역삼각형 형식이다. 일부 글자가 파손되긴 했지만 남은 430여 자를 통해 당시의 인명, 지명, 관직명 등을 파악할 수 있어 중요한 사료적 가치가 있다.
내용은 대강 이렇다. 大衆 等 喙(훼)部 출신 伊史夫智 등 지휘관 9인에게 왕이 교(敎)를 내린 내용으로 김무력, 이사부 등의 인물도 등장한다. 당시 고구려 영토였던 적성현을 공격, 고구려군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이 고장 적성인으로 고구려군과 싸우다 전사한 也爾次와 기타 관련된 유공자들을 왕이 포상하고 주민들에게 1년간의 세금 면제와 죄수를 사면해 주는 것이다. 진흥왕이 북한산 등 점령지를 점검하고 돌아오면서의 일이다. 아마 영토 확장의 기념과 더불어 점령지를 위무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웠다고 여겨진다. 내용으로 미뤄 진흥왕 때(454-551년) 무렵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진흥왕은 북쪽으로 진출하던 신라의 영토 확장 과정에서 차지한 함경도 마운령과 황초령, 북한산(경기도), 창녕(경상도) 등에도 巡狩碑를 건립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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