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9일 아침 '효문화진흥원'으로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 날이다. 오늘 따라 눈이 많이 내려 대중교통을 이용해야만 했다. 312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눈이 많이 내린 관계로 예정시간보다 늦게 도착했다. 만원이었다. 목적지까지는 50여 분이나 걸린다. 영락없이 서서 가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스에 올라 안경에 서린 김을 닦고 있는데 누군가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40이 넘어 보이는 중년 부인이 자기가 앉아오던 자리를 나에게 양보하는 것이었다. 괜찮다고 서너 번 양보하는 사이에 곁에 앉았던 남학생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자기 자리에 앉으라는 것이다. 한 사람의 늙은이를 앉아 가게 하려고 두 젊은이가 일어선 것이다.
고마웠다. 비록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다. 지하철이나 시내버스를 이용할 때마다 느끼는 고마움인 것이다. 물론 노약자석은 노인들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노약자석은 임신부, 장애인, 영유아 동반자, 노약자 등 교통 약자를 위한 자리이다. 그러므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병약자들도 앉아 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노약자 석을 양보하는 것은 의무가 아닌 배려인 것이다. 이 약자를 위한 배려가 서로 앞 다투어 선행 될 때 그 사회야 말로 중국 주석 시진핑이 주장하는 소강사회(小康社會)를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양보했던 주부가 도마동에서 내리자 그와 함께 탔던 어느 승객이 귀띔해준다. '이기정 내과'에 근무하는 분인데 언제나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해준다고.
말이 나왔으니 한번 보자. 소강사회(小康社會).
공자와 맹자께서 살았던 춘추전국시대 얘기다. 공자가 납제(臘祭)를 올린 뒤 탄식을 했다. 그러자 제자 자유(子遊)가 그 까닭을 물었다. 공자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세상에 큰 도(大道)가 행해진 하(夏) 은(殷) 주(周) 나라에서 마저도 준영(俊英: 빼어난 인물)을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세 나라의 치세(治世)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러면서
"큰 도가 행해지면 어진 이를 뽑고 능한 자를 골라서 신뢰와 화합을 이루게 마련인데 이로인해 사람들은 유독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여기지 않고 남의 부모도 부모처럼 대했으며, 자기 아들만을 아들로 여기지 않고 남의 자녀들도 자신의 자녀들처럼 보살피는데, 대동이라는 말은 원래 개인의 희생이나 불이익이 전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삶을 존중하고 이를 통해 공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 바탕이다."고 했다.
공자의 말씀을 부연설명 해보자. 무슨 말인가?
늙은이는 임종할 곳이 있게 하고, 젊은이로 하여금 쓰일 곳이 있게 하며, 어린이로 하여금 자랄 곳이 있게 하고, 환과고독(鰥寡孤獨)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과 병든 자들을 사회로 하여금 모두 맡아 보살피게 하는 곳이 있게 하며, 사내들은 직업이나 직분이 있고, 여자들은 가정이 있게 한다. 또한 간사한 꾀는 없어지고 도절(盜竊)과 난적이 생기지 않으며, 그래서 바깥 대문을 닫지 않게 되는데 그렇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바로 대동(大同)이라는 것이다.
넓게 보면 지구촌 한 지붕 일가의 개념에 가깝다. 그러나 대동 사회는 중국의 시진핑도 이루기 어렵다고 했다. 시진핑은 2014년 7월 4일 삼성의 전시관을 둘러보는 자리에서 "삼성이 중국에서 다양한 사회공헌을 하는 것에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이는 소강사회(小康社會)와 조화로운 사회 건설에 크게 기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시주석이 말하고 있는 소강사회란 어떤 사회를 말하는가?
소강사회란 시주석보다 앞서 등소평이 부르짖은 중국식의 현대화를 의미한다. 더 쉽게 말해 굶주리지 않고 너와 내가 보듬어주는 살기 좋은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말한다.
대동사회는 오늘날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무거운 과제들인 동시에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나 중국의 시진핑 주석도 이룰 수가 없는 사회인데 반해, 소강사회(小康社會)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노력하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는 맹자께서 주장하는 왕도정치와도 맥을 같이 한다. 왕도정치란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효제(孝悌)를 가르쳐서 집안에서는 부모님께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공경하는 사회를 만드는 정치를 말한다. 즉, 젊은이들은 남자 늙은이들이 짊어진 짊을 대신 져주고, 여자 늙은이들이 머리에 이고 가는 짐을 대신 받아 이어주는 따뜻한 인정이 있는 사회를 만드는 정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 살기 좋은 소강 사회가 대전의 시내버스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산수의 늙은이인 필자가 버스에 올라 빈 자리를 찾기위해 두리번거리지 않았는데도 앞 다투어 일어나 양보하는 마음. 그것이야 말로 살기좋은 소강사회가 아니고 무엇이랴! 정치인들은 입으로 소강사회 건설을 외치지만 이곳 대전의 대중교통 안에서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소강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선 말 정약용 선생의 말을 빌어 글 마무리 해보자.
人知坐輿樂(인지좌여락)-사람들은 가마 타는 즐거움은 알아도
不識肩輿苦(불식견여고)-가마 메는 괴로움은 알지 못하네.
효 마을로 가는 312번 버스 안, 그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소강사회, 참 행복한 하루였다.
김용복 / 극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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