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새벽 산책길은 상쾌하기만 했다. 여명의 시간에 나선 거리는 불야성을 이루던 어젯밤의 정취와 너무나 동떨어진 질감으로 다가온다.
한 시간 쯤 산책을 즐기고 돌아오려는데 핸드폰이 울린다. 국장이었다. 아침식사를 같이 하고 싶은데 어떻겠느냐고 묻기에 좋다고 했더니 곧장 호텔로 오겠다고 한다.
호텔 2층의 레스토랑은 뷔페로 준비돼 있었다. 아침 식사인데도 중식, 양식, 일본식 요리가 풍성하다.
국장은 비서와 소수민족 담당직원, 그리고 예의 자가용 기사까지 같이 참석했다.
식사를 하면서 오늘의 일정을 얘기한다.
생각 같아서는 징훙시(景洪市)에서 며칠 더 묵게하면서 이곳 저곳을 안내해주고 싶은데 국장은 오늘부터 5일간 곤명(昆明)에서 개최되는 회의에 참석해야 하기에 나중으로 미루고 오늘은 먼저 소수민족 뿌랑족(布朗族) 마을로 떠나라고 한다.
이미 촌장에게는 연락이 되어 있으므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이곳 직원들의 바쁜 업무 때문에 자가용으로 안내할 수 없는 것이 미안하다며 몇 번이나 "미안하다"를 반복한다.
뿌랑족 마을은 뿌랑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는데 버스가 하루에 한 번 뿐이라고 한다.
오전 9시 30분 출발하는 차를 타면 오후 4시 쯤 마을에 닿을 수 있으니 식사하는대로 서둘러 버스종점에 나가자고 소수민족 담당자가 앞장을 선다.
#8시간의 지루한 버스 여행
버스 종점은 아침부터 북새통이다. 시상빤나(西?版?)의 중심지다보니 천지사방 모든 행선지가 이곳에서 시작되고 이곳에 모이게 마련이다.
소수민족 담당자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는 뿌랑족 촌(布朗族 村)을 향해 출발했다. 그는 차가 출발하기 전에 다시 올라와 생수 두 병을 전하며 가다가 목이 마르면 마시라고 형제같은 친절을 베푼다.
아주 작은 일 같지만 김삿갓으로서는 진한 감동을 받을 수밖에. 차는 10여 분 가량 시내를 벗어나면서 비포장 도로로 접어들고 다시 30여 분을 지나면서부터 산을 타기 시작한다. 숨차게 올랐다가는 다시 내리막길을 몇 번씩 거듭하더니 평지를 달린다. 흙먼지를 날리며 달리는 버스 주변 풍경은 한가한 농촌마을이다. 정류소는 있으나 마나이고 어디서든 내리겠다는 손님이 있으면 정차하고, 누군가가 길에서 손을 들면 태워주는 여유만만한 버스 여행이 계속된다. 딱 한 번 화장실이 있다며 정차한 곳은 자그마한 구멍가게가 있고 그 옆에 간이 변소가 있는 곳이었다. 30 여 명의 손님들이 우루루 하차하여 남자들은 공지(空地) 이곳 저곳에서 바지지퍼를 내리고, 여자들만 화장실 앞에 줄을 서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 안에서도 그랬듯이 낯선 이국손님인 필자를 향해 시선이 집중된다.
드디어 버스는 종착지에 도착했다. 어제 도시로 장보러(?) 나갔던 이 지방 주민들이 양 손에 짐들을 들고 하차한다.
차가 도착하는 지점에는 어린아이들이 와글와글 모여들고 마중나온 가족들이 우루루 달려온다. 낯선 이국인인 필자가 마지막으로 내리자 모두들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양 시선이 몰려온다.
잠시후 30대 건장한 사나이가 다가와 한국인이냐고 물으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정부 직원이라고 했다. 그를 따라 10여분 걸어가자 낡은 단층 목조건물이 나오고, 사무실 안으로 안내되었다. 진장(?長)과 부진장(副?長) 2명 모두 출타중이라고 했다. 조금 있으면 숙소를 맡아 줄 촌장이 올 것이라며 한 더위인데도 뜨거운 차를 내놓는다.
#기독교는 절대 안된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면서 담벼락에 붙어있던 몇 장의 포스터가 눈에 어른거려 마음이 편치가 않다. 모조전지 절반 크기의 포스터 5매가 연이어 붙어 있었는데 첫 번째 장면부터가 의미 심장하다. 한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고 한 사나이가 손으로 앉은 자의 머리 위를 짚고 있었는데 여백에는 '손으로 기도하며(안수(按手)기도를 뜻함) 병을 고쳐준다는 자(者)', 그리고 다음 종이에는 비슷한 그림으로 죽은 후에 천국에 간다며 혹세무민(或世?民) 하는 자 등 등, 기독교를 배척하는 강한 문구와 그림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이런 자들에게 결코 속아서는 안되며, 발견하는 즉시 인근 공안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구절까지 있었다.
종교문제를 정치문제로까지 연계시키고 있는 당국의 엄중한 정책에 일종의 전율감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잠시후에 촌장이 왔다. 일반적으로 촌장이나 서기는 젊은이들이었는데 이날 만난 촌장은 60세가 훨씬 넘어 보였다. 뒤에 알고보니 갓 50이 넘은 나이였는데 그렇게 늙어 보였던 것은 평생을 농삿일에 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곳 뿌랑족(布朗族) 마을은 대부분이 흙으로 벽을 쌓고 목조로 집을 지었으며 검정색의 너와 지붕들이다.
(注: 너와란 지붕을 이는 데 기와처럼 쓰는 돌 조각을 뜻한다.)
촌장의 집으로 갔다. 집안에 들어가서 10여 분쯤 지나서야 사물이 시야에 들어올 정도로 채광이 안되어 있는 구조였다. 우선 창문이 없다. 그리고 지붕 몇 군데를 투명하게 만들어 실낱 같은 광선이 실내로 연기처럼 들어오고 있다. 또 한 번 놀란 것은 덩그러니 큰 홀 (바닥은 나무마루)이 있을 뿐 방이라고 구별되는 곳이 없다.
빙 둘러 평상같이 생긴 침대들이 놓여있고 하나같이 모기장으로 각각의 침대를 감싸고 있다. 재차 놀랄 수밖에 없었던 건 이 홀 같은 방에서 3대가 같이 어울려 산다는 사실이었다.
오른쪽 침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촌장의 부모)가, 중간에는 촌장 내외가, 그리고 마지막 침대는 아들 내외가 잠을 잔다는 것이다.
프라이버시라든가 사생활이란 개념이 전혀 없는가 보다. 젊은이들은 윗사람들 눈치를 보며 밤잠을 자야 할 터이니 이것 또한 묘한 기분이 들 수밖에.
홀 한 쪽, 그러니까 침대 앞 쪽 벽가에로 큰 탁자가 보이는데 그 주변에 취사도구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식탁인듯 싶다. 그리고 그 옆에는 실내 화덕도 보인다. 모든 식구들이 필자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준다.
촌장의 아들과 딸인줄 알았던 아이들은 부부간이란다. 딸로 착각했던 여자아이가 촌장의 며느리라는 얘기다. 아들은 18세, 며느리는 16세라고 하니 아이들 처럼 보였던 것은 당연한 일. 소수민족 대부분이 조혼 풍습인줄은 알지만 너무 어린 아이들이 부부라니! 촌장의 부친은 죽통(일명 물담배)담배를 항상 들고 다닌다. 하루종일 심심풀이가 아니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면서도 연신 빨아댄다.
그때부터 프얼차는 명차(名茶)로 인정받으며 오늘날 세계시장에서 각광받는 차(茶)라는 데까지 문장을 줄줄이 엮어 나간다.
그러나 첫 입맛으로는 씁쓸하기만 하다.
아무리 유명한 차(茶)라고 해도 우선 입맛에 맞아야 할 것이 아닌가. 설명이 끝난 촌장은 이제 직접 프얼차 농장을 구경시켜 주겠다면서 앞장을 선다.
피곤했지만 따라나설 수밖에. 밖으로 나오니 눈부신 태양이 온 몸을 덮어온다.
마치 캄캄한 동굴 속에 들어앉았다가 나온 기분이다.
부락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산들이 가깝게 멀게 펼쳐진다. 뒷 쪽에는 해발 1000m가 넘을 듯한 고산(高山)도 보인다. 뿌랑산(布朗山)이라 했다. 아마 이 산의 이름을 딴 소수민족이 뿌랑족(布朗族)이 아닐까 싶다.
촌장을 따라 30여 분쯤 걸어간 후에 도착한 산. 높든지 낮든지 산이란 산은 죄다 보이차 나무들 뿐이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해발 400m쯤 되어보이는 산이었는데 이곳 역시 보이차 나무들로 차있다.
20여 명의 여인들이 찻잎을 따고 있다가 낯선 이방인을 보며 야호! 소리를 지른다.
손을 흔들어 보이니까 순식간에 몰려든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수민족 뿌랑족 여인들이다. 차 잎은 3월과 4월이 성수기로 일년 농사가 끝나지만 일기에 따라 지금처럼 5월에도 많은 양은 아니나 수확이 가능하다고 한다. 5월이지만 작열하는 태양볕이 무더위를 몰고 온다.
산마다 골마다 차나무가 지천이지만 농장주는 하나같이 H족들이다. 소수민족들은 그들의 땅이고 산이건만 대대로 H족들 밑에서 찻잎을 따서 그 노임으로 생계를 보탠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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