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교수 |
1945년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 후 미군이 일본 본토에 진주한 이후 1952년 강화조약이 발효될 때까지 약 7년 동안 맥아더 최고사령관의 연합국 총사령부가 일본 점령통치를 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이 무렵 일본에서의 정치적 쟁점은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조약과 연합국 점령통치 이후 일본의 방위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강화조약 쟁점에 관해서는 ‘전면 강화론’과 ‘단독 강화론’이 충돌했다.
혁신세력, 사회당, 일본 노동조합총평의회 등 진보정당들과 학자 지식인, 문화인그룹 등이 주장한 전면 강화론은 서방진영과 공산주의 진영 간의 동서냉전이 한창 전개되는 세계정세 하에서 비무장 평화국가로서 일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소련과 중국 등 공산주의 국가를 포함한 모든 교전 당사국과 동시에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면 단독 강화론은 자유당 등이 주장하는 것으로 일본의 조기 독립을 위해서는 공산주의 진영을 제외하고 미국을 포함한 서방진영 국가들과 우선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총리로서 일본을 이끌고 있던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는 동서냉전이 본격화된 상황에서 소련과 중국을 비롯한 공산주의 진영까지 강화 대상에 포함하는 전면 강화는 현실보다 이상에 지나치게 치우치는 것으로 판단했다.
또 다른 정치 쟁점인 일본 방위문제에 관해서는 세 가지 노선이 대립하였다.
첫째는 진보정당인 사회당이 주장하는 ‘비무장 중립’ 노선이었다. 일본은 평화헌법 제9조에 따라 무력을 보유하지 않고 동서 어느 진영에도 가담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로부터 영구중립과 평화국가로 인정받자는 노선이었다.
둘째는 자주 개헌 재무장 노선으로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하토야마가 이끄는 민주당계열의 주장이었다. 일본인 스스로가 일본의 안보를 맡아야 하고, 일본의 재무장을 금지하고 있는 평화헌법 제9조는 일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국에 의해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일본이 독립한 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는 요시다가 이끄는 자유당 계열이 주장하는 미·일 동맹 노선이었다. 요시다는 사회당의 비무장 중립 노선은 아무런 현실적인 대책 없이 일본의 안보를 다른 나라의 선의에 맡기는 것으로 이상에 치우친 비현실적이자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보았다. 또한, 나중에 자유당과 합당하여 자민당을 결성하게 되는 민주당의 자주 개헌 재무장 노선도 전쟁으로 피폐된 일본의 경제력을 고려하지 않은 민족주의 이념에 경도된 과도하게 이상적이자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
요시다는 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된 일본 경제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는 안보를 위한 국방비 투자 대신 모든 자원을 먼저 경제부흥에 집중해야 하며, 이를 위해 미국과 안보 군사동맹을 맺어 일본의 안보와 국방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방안이라고 판단했다. 지나친 이상과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현실적이고 합리적 판단을 중시한 요시다는 1951년 여론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독강화론에 입각해 미국과 서방진영과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조기에 일본의 독립을 성취했다. 이어 그가 주장 미·일 동맹 노선대로 미일안보조약을 성사시켜‘안보무임승차’라는 말을 들어가면서까지 국방비 대신 경제부흥에 국가 자원을 집중하여 패전 뒤 일본을 세계 경제강국으로 발전시키는 초석을 놓았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추진되고 있는 정책 중 이상이나 이념에 치우쳐 현실성이나 합리성이 무시되고 있지 않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작권 조기 환수 추진으로 인해 한반도 안보가 흔들리지는 않는지, 반만년 역사에서 중화민족주의 아래 우리 민족이 무수한 피해를 당했음에도 중화민족의 부흥을 추구하는 중국(中國夢)에 취해있거나 그들의 일대일로(一帶一路)에 의지하여 깊숙이 발을 딛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최저임금 인상으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을 어렵게 해 오히려 일자리 감소를 초래하는 것은 아닌지, 법인세 인하라는 세계적인 추세에 역행한 법인세 인상이 외국 기업의 국내투자를 방해하고 국내 기업의 해외탈출을 야기하는건 아닌지도 있다.
원전사고를 당한 일본까지도 원전을 확대하거나 재개하는데 세계 최고의 원전경쟁력을 가진 우리가 스스로 대 놓고 탈원전정책을 선언하고 추진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것인지 등 아무리 좋은 이상일지라도 현실과 동떨어진 지나친 이상은 오히려 국가발전과 국민 행복에 저해요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정호 목원대 금융보험부동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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