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온도탑은 모금 목표액 1% 달성 때 1도씩 올라간다. 목표액 66억770만원인 충북을 예로 들면 6700만원이 1도다. 그런데 수은주가 미적지근하다. 울산에 이어 기부 실적이 좀 나은 편인 대구도 수은주 40도 앞에서 한참을 주춤거렸다. 대전시청 남문광장의 온도탑은 20도 초반에서 맴돌고 경남은 20도 오르기에도 숨이 차다. 30도를 살짝 웃돈 서울 광화문광장 온도탑 옆 '사랑의 우체통'에는 누군가가 500만원이 든 흰 봉투를 놓고 갔다. 그 익명성에 더해 미담이 피어오른다.
이렇게 해서 알려진 선행은 알려지지 않길 바라는 입장에서는 벌써 익명이 아닐 수도 있다. 자신의 이익을 내던지는 친사회적 행위가 알려지면 좋은 기업, 좋은 사람의 이미지를 얻는다. 동물도 그렇다. 높다란 나무에서 위험신호를 내주는 아라비안 노래꼬리치레라는 새는 포식자에게 언제 잡아먹힐지 모른다. 공공의 이익을 위한 위험한 보초에서 살아남으면 지위와 짝짓기 서열의 특별승진이 기다린다. 가진 걸 막 퍼주는 인디언의 희한한 '포틀래치' 잔치도 그렇게 문화로 봐야 이해가 된다.
그 이타성마저 이기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기업의 사회 환원은 훌륭한 투자와 교집합을 이룬다. 그런데 복병을 만났다. 거액 기부 집단인 대기업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 이후 뇌물 공여 집단처럼 도매금으로 떨어졌다. 개인기부의 밑줄기인 사회적 신뢰를 극히 일부의 시설, 기관, 단체, 개인이 허물었다. 못 믿을 기부보다 친구 밥 사준다 할 정도다. 기부금 128억원을 착복한 새희망씨앗 사건과 13억원을 탕진한 이영학이 기부문화를 움츠러뜨렸다. 소규모 기부단체에는 쌩하니 찬바람이 분다.
기부 포비아(공포증) 같은 것이 지배하는 이런 때, 공개적 기부는 자선과 위선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들을 기부 대열로 끌어오는 시범성이 있다. 구제할 때, 자선 베풀 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복음서는 정말 저 높은 경지다. 1만원을 잃은 아픔은 2만5000원을 얻는 기쁨과 심리적 강도가 같다. 이런 손실회피성을 무력화할 수 있는 게 자선이다. 제 마음 편하자고 거리의 깡통에 남몰래 동전을 던지지만 타인이 보는 가운데서 하는 자선은 자신의 보상 가치를 높인다. 그쪽 뇌(복내측 전전두피질)를 현저히 활성화하기도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이기심이 성장과 발전의 근본 힘이기도 했지만 남을 돕다 보면 풍요로움과 행복감이 따라온다. 무조건 안 쓰고 안 먹고 안 주는 행위는 '경제적'이 아니다. '문화적'이지도 않다. 진짜 자선냄비와 가짜 자선냄비 식별법이 나돌지라도 희소 자원을 최대한 잘 활용해 추운 세상을 데우는 일은 더없이 경제적이다. 자기희생 능력과 의향을 드러내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값비싼 선호 이론까지는 필요 없다. 중·소액 기부라도 마음은 엄청나게 예쁘다. 이런 걸 젊은층에서는 '존예롭다' 했다.
최충식 논설실장 |
아름답고 가치로운 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 경쟁적 이타성을 자극해 나눔경쟁을 가속화할 것이다. 상대적으로 사랑의 수은주가 더 꽁꽁 얼어붙은 강원, 경남, 인천, 경기, 대전, 제주, 세종 등에서 나눔경쟁이 펄펄 끓어오르면 좋겠다. 기업 마케팅이어도 괜찮고 그 어떤 다른 명분이라도 관계없다. 자선과 위선은 가끔 종이 한 장 차이다. 감추든 드러내든 전국의 모든 사랑의 온도탑 수은주가 내달 31일까지는 나눔온도 100도를 웃돌아 뜨겁게 마무리되길 희망한다.
최충식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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