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수민족 취재탐방기] 신랑 나이 고작 18세… 독특한 '반랑'의 풍습

[중국 소수민족 취재탐방기] 신랑 나이 고작 18세… 독특한 '반랑'의 풍습

29. 전통문화 고수하는 소수민족 이족

  • 승인 2017-12-15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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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통의상을 연상케하는 이족 아가씨들의 복장/사진=김인환
#소수민족들의 저녁식사 습관

불과 한 시간도 안 된 시간이지만 통성명을 하고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눈 사이다 보니 반쯤 밖에 익지 않은 고구마를 베어 먹으며 둘이는 깔깔대었다.

썩 미인은 아니지만 귀여운 인상의 아가씨는 묻지도 않았는데 시집갔다가 3일 만에 끝내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한다. 그러면서 날더러 결혼했느냐고 묻는다.(이 아가씨가 눈이 어떻게 잘 못 된거 아냐?)힐끗 처다보며 진지하게 답해 주었다. 이미 손자 손녀가 있는 노인이라고.

그랬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며 못 믿겠다는 투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처음 만났는데 "우리 친구 할래요?"(점점 이상한 쪽으로 몰고 가네.) 친구 못할 것도 없지만 나이 차이가 너무 나는 것 아니냐? 라고 되묻자 흔히 하는 말로 생물학적 나이가 중요한 것 아니잖느냐? 마음이고 정신이지. 하면서 제 머리며, 제 가슴을 툭툭 쳐보기까지 한다.



분위기가 요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밖은 아직도 가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가씨가 따라 일어서며 촌장집에 묵고 있다는 외국인이 바로 당신이냐고 묻는다. 벌써 내가 이 부락에 와 있다는 것이 부락민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다고 대답하니까 생글생글 웃으면서 시간나는 대로 놀러 오겠단다. 이쪽에선 청하지도 않았는데 일방적이다. 소수민족 촌을 다니면서 항상 느껴오던 것 가운데 하나가 여성들의 대담성이다.

물론 많은 여성들이 처음에는 수줍어 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몇 마디 말이 오고 가고 나면 결코 머뭇거림이 없는 성품들이다.

물론 중국이 전반적으로 남녀 평등 사회다 보니 여성들의 당당함은 익히 보아온 터다. 이 아가씨가 촌장집을 방문한 것은 바로 그날 저녁시간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할머니 한 분이 돌아가셨다고 해서 오후 내내 상가집 주변을 맴돌다가 식사시간 쯤 되어 촌장집에 돌아와보니 이미 식탁에는 주인 내외 이외에도 몇 명의 손님들이 식사를 하고 있다가 나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한 여인이 전통 이족복장 차림이어서 눈이 황홀해질 지경이었다.

눈 인사를 보내는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어디선가 많이 본 느낌이 들었다. 같이 목례를 하려니까 촌장이 너털웃음을 웃으며 당신들 둘이는 구면사이가 아니냐고 묻는다.

그제서야 찬찬히 그녀를 뜯어보았다. 오전에 동굴을 안내하던 그 아가씨가 틀림없었다. 전혀 화장끼가 없던 오전의 얼굴이던 것이 화려한 화장을 하고, 총천연색 전통복장에 머리 두건, 그리고 치렁치렁한 큰 귀걸이까지 하고 있었으니 첫 눈에 못 알아 본 것이 당연한 일. 동굴에서 보았던 모습보다 10년 쯤은 더 성숙해 보이는 차림이기도 했다.

식사 도중 그들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 웃음판이다.

예의 그 아가씨 역시 깔깔깔깔 곧 넘어갈 듯 웃어제끼는데 그 밝고 맑은 표정이 귀엽기도 한다.

그 자리에서 안 사실이지만 이 아가씨는 촌장의 친척이었다. 4백 여 호 남짓한 이 부락은 거의가 멀고 가까운 친인척 사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비교적 부촌에 속하는 이곳에는 오히려 한족(?族)일꾼 들이 소수민족 가정에 들어와 일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 한족이 경영하는 농장이나 공장 등에 소수민족이 취업, 빈곤하게 사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촌장집의 가정부인 두 아가씨 역시 한족이었다. 어디를 가나 이들의 저녁식탁은 식사만으로 끝나는 법이 없다. 술이 곁들어지면서 시간 관념 없이 즐기는 모습들이다.

이날도 역시 마찬가지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술잔이 돌아가고 있다. 주인이 먼저 자기 잔을 비우고 오른 쪽 사람 앞에 건네면 잔이 잔을 옆으로 밀고 밀어내어 한 바퀴 돌아오게 되는데 이는 자연히 잔 비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든다.

세 번 쯤 돌림잔을 받고 나자 피로감이 엄습해 왔다.

화장실을 가는 척 하고 슬며시 빠져나와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올라와 버렸다.

아직 뜨거운 물을 만들지 않는 관계로 찬물로 샤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최근에 터득한 방법(실은 중국인들의 목욕방법을 흉내낸 것이지만)이 있다.

수건에 물을 흠뻑 적신 후 냉수마찰 하는 기분으로 목욕을 끝내는 방법이다.

머리는 찬 물에 감기가 무엇해 가정부 아가씨께 부탁하여 한 바케츠 쯤 온수를 마련한 후 비누칠을 하곤 했다. 종일 나돌아다니다 보니 땀이 났다 식었다 하는 통에 목욕탕에 들어가 먼저 속옷부터 빨기 시작했다. 그런 후 냉수마찰로 목욕을 대신하고 목욕탕을 나서는데 동굴의 안내 아가씨가 방을 들어서고 있었다.

(잇차! 방문 잠그는 것을 잊었군.) 런닝과 팬티 차림이어서 당황하고 있으려니 그녀는 선듯 벗어놓았던 바지를 집어 준다. 그러더니 말리기 위해 들고 있던 빨래들을 달라며 두 손을 내민다. 괜찮다고 해도 막무가내다. 내게서 빨래를 빼앗다시피 갖고 나가는 그녀를 보며 문을 잠궈야 할 것인지, 어째야 할 것인지 망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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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행렬 앞에 가는 악단들/사진=김인환
억지로 아가씨를 내 보내고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아가씨가 다시 들어왔다. 이미 겉 옷을 다 입고 있었기에 불편함은 덜 했지만 자연스럽게 침대 모서리에 걸터 앉는 아가씨가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온갖 장식을 꾸민 모자를 벗어들고 예쁘지 않느냐고 묻는다. 참 예쁘다고 답 했더니 이번엔 일어선 채 그 자리에서 한 바퀴 빙 돌아보이며 이족 복장은 어떠하냐고 묻는다. 마치 자신이 패션 쇼에 나온 모델이라도 되는 양 한껏 폼을 잡기까지 한다. 웃음이 절로 나올 수 밖에. 마음 같아서는 무슨 놈의 옷이 그렇게 복잡하게 생겼느냐? 알록 달록 총천연색에다가 모양을 낸다고 수 십 종의 악세사리까지 달려있는가 하면 군인들의 각반 같은 종아리 싸개 하며 꼭 한국에 무당처럼 보인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꾹 꾹 참았다. 잠시 후엔 한 쪽에 놓아둔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자기를 한 번 찍어줄 수 없느냐고 묻는다. 얼마쯤이든지 찍어 주지. 그런데 오늘은 날도 어둡고 하니 내일 밝은 대낮이면 좋겠다. 그리고 너 혼자가 아니라 몇 명 쯤 더 불러서 단체사진을 찍어주고 싶은데 가능하겠니? 했더니 깡총 깡총 뛰면서 친구들을 다 부르면 열 명이 넘을텐데 괜찮느냔다. 괜찮고 말고. 이족을 소개하는 내용 중에 사진도 있으면 더 좋지.(그런데 이 약속은 그 이튼날의 장례식 때문에 연기 되었다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걸어 부치면서 좀처럼 나갈 생각을 하지 않는 아가씨 때문에 전전긍하고 있는 참인데 문밖에서 스치는 듯 약간의 인기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슬며시 다가가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후닥닥 도망을 가는데 그 뒷 모습이 이 집의 가정부임에 틀림 없었다. 아하! 요 녀석이 남녀가 방안에 있다는 걸 알고 호기심이 발동? 염탐하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아도 조심스럽기 그지 없는 판인데…. 이쯤 되면 체면이고 뭐고 냉정해 질 수밖에 없다. 아가씨에게 내가 무척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내일 다시 만나자며 은근히 나가 줄 것을 요구했다. 그래요? 미안해요. 저도 빨리 돌아가봐야 되요. 그럼 내일 만나요. 하면서 종종 걸음으로 퇴장. 아휴! 이 아가씨 이쯤에서 나가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다시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뚜벅 뚜벅 남자의 발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다. 누구요? 하며 바지만 꿰어 입은 채 문을 열고보니 촌장이다.

왠 일이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는 아무말도 없이 슬쩍 나가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지금 나를 보고싶어하는 좋은 친구가 왔으니 빨리 내려오라면서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돌아선다. 오늘 저녁도 일찍 자기는 다 틀렸나보다. 싸늘한 밤공기를 의식하고 겉옷을 있는대로 껴입었다. 아래 층 거실로 내려가니 아까 올라올 때의 사람들 그대로 다 있는 가운데 새로운 손님 한 명이 더 늘어났음을 알 수 있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던 아가씨도 술기운에 볼이 분홍색으로 변한 채 요염한 눈길을 보내며 앉아있다.

촌장이 일어나서 새 손님을 소개한다. 이미 구면이지만 다시 인사를 하라고 하는데 자세히 보니 도착 첫 날 기분을 상하게 만들던 공안(사복 경찰)이었다. 그가 먼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 온다. 덤덤하게 악수를 나누며 그가 이끄는 대로 옆 자리에 앉자마자 먼저 말을 꺼낸다. 요전 날은 나 때문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느냐? 미안하게 생각한다. 사실은 상부로 부터 내가 온다는 소식을 먼저 들었다. 그렇지만 과거에도 보면 외국기자들이 신분을 속이고 들어와 소수민족들의 좋은 점은 취재하지 않고 좋지 않은 부분만 사진까지 찍어 내보내는 통에 정부차원에서 각별히 신경을 쓰고 있다. 그동안 얘기를 들으니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 마침 이 부근에 왔다가 인사도 할 겸 왔으니 사과도 받아주고 한 잔 하자. 대충 이런 얘기다. 그런데 잠시 후 바로 이 공안이 문제의 아가씨 친오빠라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

이 사람들에게도 후래자 삼배라는 습관이 우리네와 같다. 촌장이 술 병을 든 채 공안이 석 잔을 연거퍼 마실 때까지 술을 따른다. 내가 없는 사이에 술병이 바뀌었는지 도수가 제법 높은 술이었다. 석 잔을 다 비우고 난 공안이 내 잔에 술을 친다. 그리고는 서슴없이 깐빼이! 잔을 비우니 여동생(문제의 아가씨)을 큰 소리로 부르며 손님에게 술 한 잔 따르라고 명령이다. 아가씨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얘 내 옆으로 자리를 옮겨 온다. 가정부 아가씨 들은 계속 모자라는 음식을 날라오며 힐끗 힐끗 나를 훔쳐보는데 신경이 쓰일 정도다. 잠시후 촌장부인이 몸이 불편하다며 안채로 들어가고 남자들의 목소리만 점점 높아지기 시작한다. 술기운이 제법 올랐다는 증거다.

촌장의 입에서 노래가 나오고 공안원이 맞장구 치듯 춤을 춘다.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무릎을 흔들기도 하고 양 팔을 접었다 폈다 하는 동작인데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도 동작이다. 조금 있으려니 이 아가씨가 일어나서 오빠와 짝을 맞춰 춤을 추는데 율동미가 제법이다. 나머지 일행들이 합창으로 춤곡을 이어 준다. 나 역시 손뼉을 치며 박자를 맞춰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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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족의 장례행렬에 등장한 무용단/사진=김인환
#축제 행렬 같은 장례

이튿날은 이른 새벽부터 마을 전체가 시끌벅적이다. 부락에 초상이 났다는 얘기였다.

일 백살이 훨씬 넘은 이 부락의 최고령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초상집 부근에 가 보았다.

식구들이며 친척들이 벌써부터 붐비고 있었다.

할머니가 <큰 고요함> 속에 들어가 누워있을 방 안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마당 안 팎을 왔다 갔다하며 이런 저런 모습들을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도 문상객은 끊이질 않는다. 워낙 큰 상가집 이어서인지 대문 입구에 귀퉁이가 달아난 책상 두개가 놓여있고, 고인의 친척인 듯 싶은 사람 서 너 명이 그 옆에 앉아 조의금을 받고 있었다. 우리나라나 이들 중국의 소수민족이나 길흉사를 당한 집을 위해 봉투를 건네는 마음은 똑 같았다. 해가 뜰 무렵엔 이미 집 앞 공터에 1백 여 개의 식탁이 놓여졌고 문상을 마친 조문객들이 둘러 앉아 식사를 하는 모습들이다. 무럭 무럭 김이 피어 오르는 돼지고기며 야채들이 쉴 사이 없이 날라져 왔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치기에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촌장이었다. 그를 따라 야외 식당(?) 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하지도 않은 고기 그릇이며 푸성귀들이 놓여지고 미주라고 불리우는 옥수수 술이 푸짐할 정도로 탁자 위에 놓여있다.(한 부락에 한 두 집 정도는 옥수수 술을 만드는 간단한 시설이 돼 있는데, 이것이 주류법상 어떻게 되는 지는 알 길이 없었다.)

옥수수 술은 높게는 50도 이상도 있지만 10도 전후의 약한 도수가 대부분으로 농주개념으로 이해하는 게 좋을 듯 싶다. 촌장이 PVC사발 가득 미주를 따른 후, 한 잔 하라며 권한다. 장례의 주인공인 할머니는 고모 할머니가 된다면서 이미 무덤까지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오늘 오후에 안장식만 거행하면 끝난다며 마치 남의 일 얘기하듯 던진다. 허기야 부락주민 전체가 이리 저리 얽히고 섥히면서 가깝거나 먼 친척간일 터이니 그럼직도 하다고 이해를 하게 된다. 급조한 야외식당은 금새 초만원을 이룬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락주민들 외에도 타지에서 건너온 문상객들이 가세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5일장이라니 왔다 간 문상객은 어림잡아 오천 명은 더 될 듯 싶다. 춤추는 가무단도 등장한다,.

마을의 길흉사에 등장하는 가무단은 20대 청년들 외에도 30~40대 팀이 있고, 50~60대 팀도 있었다. 드문 드문 여자들도 포함되 있는데 그들은 대부분 소북을 목에 걸고 장단을 맞추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장수촌의 비결

형형색색의 전통복장에 하나같이 여승들의 고깔 같은 흰색 모자를 썼다. 장례 때만 쓰는 모자라고 한다. 왔다가 돌아간 사람들까지 문상객은 줄 잡아 천 여 명이 넘었다. 하나같이 슬픈 기색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어느 잔칫집에 다녀가는 사람들 같게만 보였다. 웃고 떠들며 화기애애한 모습들이다. 고인인 할머니 한 분이 세상에 떠나면서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놓고 맘껏 먹고 마시며 즐기라는 명령이라도 내린 듯 그렇게 즐겁기만 했다.

오후 두 시 경이 되면서 집 안에 상여가 들어가고 장지로 향하는 대열이 정비되기 시작했다. 언제 준비했는지 폭죽이 터지기 시작하고, 그 소리는 너무 요란해 기관단총을 콩 볶 듯 쏘아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헝겊으로 만든 용(?)에 바람을 넣어 몇 사람이 받쳐 들었는데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스스로 용춤을 추고 있다. 머리에 누런색 베조각을 두른 사람들은 가족이거나 가까운 친척들일 터. 그들 역시 낄낄 깔깔 조금도 슬픈 기색과는 거리가 멀다. 한 사람을 영원히 하직하는 일이 이 정도로 즐거운 일이라면 이 민족의 풍습 습관이란 얼마나 여유로운 것인지 모를 일이다. 장례행렬은 대가(大家)의 호상답게 거창했다. 선두에는 휘황찬란한 몇 개의 조기가 서고, 그 뒤로 영정, 소북을 중심으로한 악기 연주단, 3팀의 가무단이 이어지면서 제일 뒤에 수 십 명이 애워싼 상여가 따른다.

상여 앞에는 길다란 배를 여러 줄로 끈을 만들어 가족들이 붙잡고 상여를 인도한다. 상여 뒤 꽁무니엔 커다란 장닭 한 마리가 액세서리처럼 묶여 있다. 이제 망인은 영원히 집과 가족들을 떠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100세가 넘는 고령자 두 분 가운데 오늘 한 명이 떠나고 나면 한 명이 남는 셈이 된다. 그러나 90대가 7명이나 되고 80대가 10여 명이나 된다는 이곳 뿌저허이(普者흑)이족 부락은 말 그대로 장수촌이어서 60대, 70대 정도가 노인대접 받기는 어림도 없는 곳이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필요할만큼 만의 고기를 잡아 올리는 평화로운 생활이 이들의 심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요인일 것이고, 욕심부리지 않고 이웃과 함께 행,불행을 나누는 여유로움이 필요 없는 스트레스를 예방하는 것일 터이므로 장수촌의 비결이 특별한 것은 아니란 생각을 해본다.



#7일장을 5일장으로

장례행렬은 고인이 평생 살아오던 부락 이 골목 저 골목을 돌고 돈다. 100세가 넘도록 마을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보지 않았다는 할머니다. 요즘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지만 사실이라는 데엔 할 말이 없다.

애초에는 대가집 노 할머니답게 7일장을 거론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인의 손녀뻘되는 아가씨 한 명이 이미 결혼식 일자가 며칠 후로 잡혀 있어 논란을 거듭한 끝에 5일장으로 결정했다는 얘기다. 이미 세상을 떠난 분의 가는 길도 중요하지만 새롭게 가정을 탄생시키는 축복의 잔치도 중요하다는, 지혜로운 결단일 수도 있다. 거의 한 시간에 걸쳐 부락순례를 마친 장례행렬은 부락에서 30분 쯤 거리에 있는 장지에 닿았다.

30여 년 전에 가묘를 마련해 두었다는 석묘(石墓)였다. 미리 와 있던 사람들이 주변정리를 잘해 놓은 터라 안장 작업은 순식간에 이루어 졌다. 상여 뒤에 매달고 온 장닭 목에 칼이 깊숙히 꼽히면서 붉은 피가 솟구친다. 한 방울이라도 놓칠세라 큰 그릇에 받은 것을 석묘 주변에 뿌린다.

잡귀를 물리친다는 이들만의 전통적 습관이다.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합주단과 가무단의 야외공연(?)은 쉬질 않는다. 필자는 이 쯤 해서 부랴부랴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궁금했던 한가지 일 때문이다. 상가집 옆 공터에 마련되었던 야외식당이 어떻게 정리 되는가가 보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부근에 도착했을 때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고즈넉한 숲 속의 적막감이 주위를 압도하고 있었다.

초상집 안팎으로는 십 여 명의 부인네들이 못다 치운 그릇들을 챙기고 있었고, 음식 냄새에 취한 똥개들이 부근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행렬이 떠나면서 집집마다 들고 나왔던 탁자며 의자, 그리고 그릇 종류들까지 모두 제 주인집으로 회수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정말 일사분란한 동작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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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족의 상여 모습/사진=김인환
#장례 뒤풀이로 밤새워

숙소인 촌장집으로 돌아왔다. 멀리서부터 떠들석한 소리가 들려왔는데 예상했던 대로 십 여 명의 남자들이 벌써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상가집에서 부터 얼큰했던 분위기를 이곳까지 이끌고 온 것이다. 탁자 위에 음식들은 상가집에서 삶아내던 돼지고기들임을 금방 알 수 있었다. 술기운들이 불콰했지만 그들의 얘기는 거의가 고인에 대한 추억담이었다.

평생 사람을 좋아했다는 얘기며, 욕쟁이 할머니로 통할 만큼 입이 거칠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친근감이 있었는데 이제 그런 욕을 듣을 기회가 없어져 서운하다고까지 했다. 그날 밤 이 부락 곳곳에선 밤새도록 이 같은 모임이 계속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이 집 저 집을 순례하고 다니는 감초영감들도 하나 둘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돌아다니는 사람들에 의해 지금 누구네 집에서는 누구 누구가 모여있고, 또 어는 집에서 누구 누구가 모여 있다는 정보가 전달되기도 했다. 가무단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도 복장을 갈아입지 않은 채 이 집 저 집에 어울렸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상가 집에서는 밤 늦도록 고기를 삶아 내었다고 한다. 부락 곳 곳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장례 뒷풀이 잔치에 술과 고기를 날라다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 한 분이 세상을 하직하면서 수 천 명의 부락민들을 한 마음으로 결속 시키고, 풍요로운 잔치로서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 셈이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고인은 높은 산 중턱 석묘(石墓)안에 누워 평소처럼 "이 녀석들아! 오늘 고기맛이 어떠냐? 많이들 처먹고 부부사랑 잘해라. 알았지? 말 안들으면 내 쫓아가서 그냥 안 둘꺼야" 하고 한 바가지 욕질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찾아가 인사

장례가 끝난 다음 날은 결혼식이 치뤄지는 날이었다. 젊은 한 쌍의 출발을 위해 7일장을 5일장으로 앞당겼던 부락민들이다. 내가 도착한 곳은 신부집이다. 이족들의 풍습은 신랑이 신부집으로 와서 신부측 어른들에게 인사를 나눈 후 하객들과 점심을 나눈다. 그런 후 신부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가게 되어 있다. 그런 다음 신랑 집에서는 밤늦도록 주연이 베풀어진다. 오전 11시 경인데 신부집 마당은 물론, 집 앞 1천 여 평의 공터엔 수 백 명의 하객이 몰려 들었고 예의 그 야외식당이 꾸며지고 있었다. 그만 그만한 탁자며 의자들, 그리고 저 많은 식기류들 모두가 부락민들이 자진해서 들고 나왔으리라 생각하니 이들의 마음 씀씀이가 아름답기만 하다.

부락민들 가운데 경조사가 발생하면 한결같이 공동체의식을 발휘하는 이들의 아름다운 풍습은 과거 우리들 농촌과 다를 바가 없었다.

12시 쯤 되자 신랑이 '반랑'을 앞세우고 마당으로 들어선다.(이들 습관 강운데 '반랑'이란 참 재밌는 풍습이 있다. 신랑과 비슷한 년령의 친척이나 친구들 가운데 선정이 되는데, 이 반랑이란 사람은 식이 끝날 때까지 신랑 곁에서 마치 비서나 된 듯이 움직이며, 신랑이 술을 못 마시면 대신 잔을 받아 비우기도 한다. 자연히 반랑의 제1 조건은 술 잘 먹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앞으로 나서서 신랑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독특한 축하인사를 보내기도 한다. 이 날 신랑 옆에서 시중을 드는 반랑은 신랑의 이종 사촌형이라고 한다. 오늘의 신랑은 18세이고 신부는 17세. 아직도 얼굴에 솜털이 보송 보송한 앳된 나이지만 앞 가슴에 붉은 색의 큼직한 꽃 송이를 달고, 넥타이를 점잖게 맨 신랑이 제법 어른스러워 보인다. 허기야 이미 한 아이의 아버지라니까 어른은 어른인 셈이다.

소수민족들 대부분이 조혼으로서 여자는 빠르면 16세, 17세에 이미 남자를 맞이한다.(중국법으로는 남자 22세, 여자 20세가 법적 혼인연령으로 규정, 그 이전의 결혼은 부부증이 발급되지 않으며 결혼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반화된 혼전 출산

이들의 풍습은 재미있다. 처녀 총각이 열애를 하게 되면 여자는 아얘 남자 집에 와서 산다. 혼전 동거지만 아무도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가 헤어져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가면 그것으로 둘의 관계는 끝나게 마련이지만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라고 한다. 청춘 남녀가 한 집에 동거하다보면 자연히 임신을 하게 되는 법.

임신 8개월 쯤 되면 산모는 친정으로 돌아가 해산을 한다. 그런후 어린아기가 1개월이 되면 안고 신랑집으로 돌아오는데, 이 날의 주인공인 신부는 해산 후에도 6개월 쯤 친정에 머물러 있다가 날을 잡아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란다. 중국엔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남녀가 결혼 전 동거생활은 보통이다. 마치 결혼생활 예행연습이라도 하는 양 일반적인 현상이다.

청춘남녀가 눈이 맞아 동거생활에 들어가면 양가 집 어른들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또 왕래를 한다. 아이를 출산하고도 뜻이 안 맞아 결혼식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고, 아이가 둘이나 되는데도(소수민족은 두 명의 아이를 둘 수 있다.) 결혼식을 거행하지 않고 그냥 부부로 사는 소수민족도 더러 있다고 들었다.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결혼식 전에 아기를 낳는 습관은 어찌보면 여자의 출산능력을 테스트 하는 과정 같기도 하다. 이런 습관은 한족(?族)들의 사회에까지 파급되어 일반적인 현상으로 이해되고 있다. 마당에 들어선 신랑은 반랑과 함께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며 꾸벅 꾸벅 인사를 한다. 그래 보았자 이미 낯 익은 처가집 친척이며 이웃들이다.

하객들이 권하는 술잔도 거침없이 넙죽 넙죽 잘도 받아 마신다. 시작도 전에 저렇듯 마셔대다가 나중에 어떻게 될 지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신부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오후 3시경에나 입장하게 되어 있어서 그때까지 옆 집(친척집)에 대기하고 있다가 예정된 시간에 모습을 나타낼 것이라고 한다.



#현금 요구하는 신부 친구들

신랑 측 청년들과 신부 친구들 간의 실랑이가 30분 쯤 지나면서 몸싸움으로까지 비약한다. 하객들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모습들이다. 박수를 쳐대며 이 쪽 저 쪽을 응원하기도 한다. 그러자 노인 한 분이 그들 앞으로 나서며 행동을 중지시킨다. 그러지들 말고 타협적으로 나가 보라고 훈수를 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신부측 친구들(처녀들)은 현금 1천元을 내놓고 혼수감을 가져 가라며 팔짱들을 끼는 폼이 그렇지 않으면 어림없다는 표정이다.

이 노인이 이 내용을 청년들에게 전하면서 마치 손자 달래듯 그렇게 하면 좋지 않는냐고 묻는다. 이런 요구와 거부한다는 답이 오가며 또다시 설전이 맞붙었는데 결국 청년들이 언제 준비 했었는지 밀가루 푸대 만큼이나 큰 사탕봉지와 현금 1백元을 내놓는 선에서 결론이 지어졌다. 신부 측 처녀들은 이 봉지를 받고 순순히 물러났다. 청년들이 달려들어 혼수감들을 차에 싣자 처녀들은 푸대를 풀어 사탕을 나누어 준다. 아이들이 몰려들어 두 손을 벌이고 사탕을 받아가기도 한다.

결말은 뻔한 이야기지만 이 역시 이족(?族)의 재밌는 전통 가운데 하나다. 우리 마을의 처녀 즉 우리들의 친구를 데려가는데 공짜가 어디 있느냐. 그러니 이 혼수감은 못 주겠다. 꼭 갖고 가려면 그 값어치를 해라. 대충 이런 스토리인데, 신랑 쪽이 여유가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 요구하는 금액도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현금을 주는 경우도 있지만, 사탕봉지는 꼭 있어야만 하는 필수품이고, 이 사탕은 다시 하객들에게 나눠주며 기쁨을 공유한다는 것이니 흥미진진하면서도 아름다운 풍습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주연들은 신부측 여자 친구들과 신랑측 청년들이지만 하객들도 조역으로 출연, 같이 실랑이를 즐긴다. 일테면 하객들 일부는 처녀들 편을 들어 절대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또 한 쪽 하객들은 주긴 뭘 주느냐며 핏대를 올리기도 한다.



#신랑 신부의 마을 순례

오후 3시가 되자 드디어 신부가 그 모습을 나타냈다. 아릿다운 전통복장을 입은 신부는 머리 위에서부터 턱 밑 부분까지 빨간 천을 내려뜨리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가 않는다. 역시 전통복장의 두 아가씨가 신부 양 쪽 손을 잡고 아장아장 걸어 나온다. 신부 앞 뒤로는 호위하듯 처녀들이 따른다. 왕비 탄생의 순간이 저렇듯 우아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같은 시간, 신랑과 반랑은 신부 집 안에 차려진 복당(福堂)(대부분이 관우 사진이 걸려있고 조상들께 축복을 염원하는 글 귀가 몇 줄 붙어있는 앞에는 향이 피어 오르고 있다.)에 세 번 절한다. 잠시 후 곁에 다가온 신부가 보는 앞에서 장인 장모에게 정중히 절을 마친다. 신부집에서의 예식이란 게 별 것은 아니다. 이들의 간단한 요식행위가 마치면 두 명의 고취(우리나라의 피리 비슷한 악기인데 굉장히 시끄럽다.) 연주자가 연주를 하며 앞장을 서고 신랑과 신부가 그 뒤를 따른다.

이미 하객들은 실컷 먹고 마신 후여서 흥이 도도해져 있다. 혼수감을 실은 차가 앞에 서고 두 명의 고취 연주자, 그리고 그 뒤로 신랑과 반랑이 따른다. 신랑과 반랑 뒤에는 신랑 측에서 따라온 미성년자들(5~6세 아동들도 있다.) 20여 명이 줄을 서고, 그 뒤로 신부측 미혼녀들(친척도 있고 친구도 있다고 한다.)이 뒤 따르는데 그 행렬 중간 쯤에 신부가 있다. 시종일관 빨간 면사포를 쓰고 있어 땅만 보고 걷는 꼴인데 친구 둘이서 양 쪽을 부축, 신부를 도와준다.

고취 소리가 요란하고 그 앞의 트럭에서 쉴사이 없이 폭죽을 내던지는데 그 소리 또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한 마디로 시끌뻑적하다.

신랑의 집도 같은 마을이어서 계속 도보행진으로 마을 골목골목을 누빈다. 이미 신랑집에도 수 백 명의 하객들이 법석이는데 이 모두가 한 부락 사람들이다보니 신부집에서 먹고 마신 후 다시 신랑집으로 몰려 온 것이 틀림없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신랑과 반랑은 역시 집안의 신당에 예를 올리고 신랑 신부는 각 각 다른 방에 가서 잠시 쉬도록 한다.

이미 한 집에서 2년 가까이 살을 맛대고 살아온 이들이지만 부락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백년가약을 뱆는 예식은 경건할 수 밖에 없다. 한 노인의 얘기에 의하면 원래 이족(?族)은 중국에서도 소문난 성개방 민족이었다고 한다. 한 남자가 몇 명의 여자를, 한 여자가 몇 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어도 무관했던 성 풍속도가 1부 1처제로 자리를 잡은 것은 십 여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이족의 독톡한 문화의 일면을 보면서 비록 소수민족이지만 그들 자신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노력이 가상스럽게 느껴진다.



#도박 즐기는 이족

소수민족 이족의 인구는 6백 60여 만 명이나 된다. 그러나 같은 이족이라도 30여 부족으로 분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헤이(黑)이족의 숫자가 가장 많고, 다음이 철니인(撒尼人)이며 백인(白人)이 세번째로 많다고 한다. 의복은 부족마다 나름대로의 고유전통복장이 있다. 이족의 복장 종류를 다 합치면 1백 여 종이나 된다고 하니까 화려한 민족임에는 틀림없다.

내가 머문 뿌저허이(普者黑) 주변엔 흑이족(黑?族)의 본거지로서 세력이 가장 막강한 지역이라고 한다. 음력으로 6월 24일은 화비(火把)라 하는 이족 최고의 명절이다. 이 날의 행사가운데 투우(斗牛)는 묘족의 斗牛 못잖게 유명하다.

내가 머물고 있는 집에서 500m쯤 떨어진 곳에 버스 종점이 있고, 종점 옆으로는 식당이 몇 개, 그리고 그 뒷 쪽으로는 5일장이 설 수 있도록 커다란 공터가 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 촌장이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노라며 안내한 곳이 바로 닭싸움이 한참 진행중인 곳이었다. 2백 여 명은 실히 됨직한 관중들이 둘러 서 있고, 그 안 쪽에서는 기세등등한 벼슬을 자랑하며 두 마리의 닭이 예리한 부리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독한 놈들인지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오직 공격 뿐, 후퇴하는 기색이 없다. 둘러선 관중들의 환호성으로 귀청이 찢어질 정도다. 어차피 경기란 승부가 나게 마련, 이긴 쪽에선 닭 주인이 온 몸에 피가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닭을 높이 들어올리며 승자로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패자 쪽에선 슬그머니 닭을 잡아들고는 관중들을 헤치고 퇴장해 버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닭싸움이 곧 도박판이라는 점이다.

승패가 결정나자마자 한 쪽에선 열심히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 경기시작 전에 돈을 걸었던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이날 밤 닭싸움은 열 번이나 계속되었다.

돈을 잃은 사람도 있고 딴 사람도 있겠지만, 그 액수가 만만찮아 보인다. 이튿날 촌장에게 도박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넌즛이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촌장은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닭싸움 도박은 이족 사회에 수백 년 이어져온 전통 중에 하나라며, 어제밤 그 장소에는 경찰관들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얘기를 전해준다.



#아직도 손으로 밥먹어

이족들의 도박은 닭싸움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개싸움도 있고, 심지어는 명절날 벌이는 소싸움에 까지도 도박이 곁들여 진다고 하니, 소수민족 가운데서도 도박을 가장 좋아하는 민족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족 사회 역시 빈부의 차가 심하다. 농촌의 한 집을 방문했을 때는 마침 점심식사 시간이었다. 마당 한 쪽에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옆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 모습이 재미로웠다.

커다란 함지박에 밥이 가득 담겨 있고, 돼지고기와 닭고기 요리, 그리고 푸른 배추잎 데친 것이 먹거리의 전부다. 그런데 이들은 수저가 없이 모든 음식을 손으로 처리하고 있었다. 먼저 고기조각이나 야채를 손으로 집어 장(간장에 고추가루, 마늘 등 양념이 섞여있다.)에 담갔다가 밥위에 얹어 버무려서는 그대로 입으로 가져간다. 낯선 외국인에게 친절히 자리를 권하며 식사를 하자고 하는데 손이 쉽게 나가지가 않는다.

상당수의 이족들이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반면에 아직도 이렇듯 손으로 식사를 하는 숫자도 꽤나 된다는 얘기를 실제로 보는 순간이었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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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 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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