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 정상/사진=조영연 |
신라초 8대 아달라 이사금(阿達羅尼師今)3(156)년에 이곳에 도로를 개척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뤄 일찍부터 신라가 길을 열어 북진의 통로로 사용하려 했던 듯하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조령이 주통로로 개척됐다면 그 이전에는 고모산성을 출발하여 일대에서는 가장 낮은 지역인 하늘재, 계립령을 통과하는 교통로가 존재했다고 보여진다.
계립령과 하늘재의 위치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어 아직 정설은 없다. 계립령은 고구려 온달이 "鷄立縣, 竹嶺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고 비장한 결심을 하며 출발했다는 기록 속의 지명이라고 추정된다.
하늘재 표석/사진=조영연 |
이때의 마골이니 마목이니 하는 말들은 모두 삼의 속대를 가리키는 한자말로서 고유어 계릅, 저릅, 지릅에 해당된다. 따라서 계립령의 鷄立은 '삼(麻)대'를 의미하는 '계릅, 지릅'을 근접한 한자음으로 音借해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릅재는 삼국사기 속 계립령과 가장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1/50,000지도에는 하늘재와 지릅재가 미륵사지 앞에 독립적으로 나타난다. 계립령을 조령으로 보는 견해는 "계립령은 지금의 조령이다"라고 한 東史綱目에 바탕을 둔 것이다.
험준한 소백산맥 등줄기지만 하늘재에서 미륵리까지는 평탄한 길이다. 신라가 북진을 위해 일찍(2C)부터 개척한 하늘재 고개를 넘으면 덕주사와 미륵대원지에 닿는다. 경순왕의 딸 덕주공주와 마의태자의 망국의 한이 미륵사와 미륵불에 서린 곳이다. 훗날 영남지방으로 오가던 나그네들을 위한 院이 설치됐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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