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엘리자베스와 함께 한국을 여행한 것이 몇 년 만인가.
월드컵 개막식 때 연주되는 월드컵심포니로 인해 배상진은 일약 한국뿐 아니라 FIFA의 VIP로 부상했다.
이번 여행은 한국의 유명 잡지사의 초청으로 이뤄져 난생 처음으로 KAL 1등석을 타게 된 것이었다.
인천공항을 빠져나온 공항버스가 서울로 들어서자 배상진의 심사는 뒤틀리기 시작하였다.
대지 위에 대못들이 삐져나온 것처럼 뾰족뾰족하게 솟은 고층아파트 군들. 원색의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마구 써서 붙여 놓은 간판과 현수막들.
'집 지을 땅이 없다고? 제 돈과 제 정신이 없는 것이지.'
배상진은 혼잣말을 내뱉었다. 늘 드는 느낌이지만 다시 심미적 분노감이 스멀스멀 목에 차온다. 저 마구 그어지고 생채기 난 하늘들.
스카이라인이고 뭐고, 먼 산의 곱디고운 능선의 곡선이 함부로 칼로 베어지고 커팅당한 경치를 볼 때마다 배상진은 도화지를 확 찢어버리고 싶은 화가의 충동에 휩싸인다.
마치, 모나리자가 어떤 괴한에 의해 칼로 베어졌다 할 때, 누구라도 느끼는 분노와 적개감, 이를 심미적 분노감이라 배상진은 말하지만, 분노뿐 아니라 가슴이 저며오는 통증도 느껴진다.
터미널에 도착한 배상진은 택시를 타고 가회동으로 이동했다.
낙고재.
전통 한옥의 게스트 하우스였다. 배상진은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한국 가옥의 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날아갈 듯 제비꼬리 같은 처마와 대청마루, 그리고 창호지로 장식한 장지문과 온돌을 보자 엘리자베스는 감탄을 연발하며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낙고재 주인의 섬세한 배려인가, 섬돌에는 곱게 벗어 놓은 꽃신 한 쌍이 놓여 있었다.
십년을 경영하여 초가 세 칸 지어내니
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
강산은 들일 데 없으니 둘러놓고 보리라(송순)
잡지사의 꽉 짜인 일정 속에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배상진은 안면도 꽃박람회 조직위원회 자문역 조정재를 만나주었으면 좋겠다는 노명찬의 부탁을 저버릴 수는 없었다.
노명찬의 뒤에는 주곤중의 간곡한 당부가 있었다.
배상진과 인사를 나눈 조정재는 꽃박람회에 관해 대략적인 소개를 마치고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배 선생님의 월드컵 개막식 심포니는 정말 감명 깊은 프로젝트입니다.
백남준씨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더군요. 사실은 안면도 국제꽃박람회도 그러한 컨셉이 하나 있는데, 배 선생님이 도와주셨으면 하는 바람에서 뵙자고 청했습니다. 배 선생님은 FIFA를 비롯해서 세계적인 거장들과 친분이 있으신 걸로 알고 있어서요."
배상진은 무뚝뚝하게 말했다.
"뭔데요."
"한국은 아시다시피 IT분야에서는 세계 최고입니다. 특히 인터넷과 통신분야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우리 한국만이 보일 수 있는 최첨단 기술력을 꽃 박람회 개막식 때 세계에 선보이고 싶은 것입니다."
개막식이라는 말에 월드컵 개막식을 연상해서인지 배상진은 일단 관심을 보였다.
"개막식 때 대통령이 참석하시게 됩니다. 그때 식전 행사를 마치고 본 행사에 들어가서 개막식 테이프 커팅을 하게 되는데, 이 테이프 커팅에 IT 기술을 응용할 예정입니다. 다시 말해 저희들은 식전행사를 LED전광판에서 그간의 박람회 준비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줄 계획인데, 이 영상은 물론 일반적인 영상이 아닙니다. 실시간 인터넷 사이버 영상이지요."
배상진은 호기심이 일어나는지 눈빛으로 조정재의 설명을 재촉했다.
"즉, 전 세계 네티즌들이 안면도 국제꽃박람회의 개막식 광경을 인터넷으로 관람하면서 다 함께 참여하는 영상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기술적으로는 사이버 영상화면에 미리 디지털 영상을 밑그림으로 그려 놓고 네티즌들이 클릭을 할 때마다 사이버 영상의 화소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초기화면은 그냥 공백이 나타나지만, 네티즌들이 클릭을 하면 클릭이 될 때마다 퍼즐처럼 하나씩 조각그림이 그려지는 것이지요. 그 그림은 전 세계의 온갖 꽃들이 만발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화원입니다. 네티즌들은 컴퓨터의 모니터 위에서 자기가 클릭하고 싶은 부위에 커서를 올려놓고 클릭을 하면 그 부분의 그림이 나타나는 것이지요.
적어도 수백만 명의 네티즌들이 클릭을 하면서 점차로 영상은 완성되는 것인데, 그 시간은 네티즌들의 참여 인원과 클릭 수에 비례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모니터 하단에는 참여하고 있는 네티즌들의 숫자가 합산되어 끝날 때까지 기록되겠지요.
그림이 완성되면 세계의 온갖 꽃들을 영상을 통해 감상할 수 있습니다.
장관일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이미 천명숙 화가에게 부탁을 해놓았습니다. 꽃 그림의 당대 최고의 대가이시지요. 아시겠지만."
조정재의 설명은 계속됐다.
"그림의 완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전 세계의 네티즌들이 동시에 안면도 꽃박람회 개막식에 동참하고 있다는 그 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술력을 한국만이 구사할 수 있다는 홍보가 중요하고요. 아무튼 그림이 완성되면 마지막으로 음악과 함께 세계의 화원이 동영상으로 전개됩니다.
캐나다의 부차드가든,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 영국의 첼시 가든을 비롯한 세계의 정원과 화원들을 동영상으로 선보이고 난 뒤 마지막으로 안면도 국제꽃박람회의 전시장 그림이 뜨고, 그리고 영상은 멈춥니다.
그리고 자막이 하나 뜨게 됩니다.
'환상적인 한국의 화원-안면도 국제꽃박람회장에 들어오시겠습니까? Yes를 클릭하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안내문에 이어 'Yes' 와 'No'가 화면에 나타납니다.
이때 대통령께서 단상에 나오셔서 커다란 마우스로 클릭을 하게 됩니다.
'Yes' 라고 클릭을 하면 그 다음 화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향기롭고 화려한 꽃이 피어나게 됩니다."
"무슨 꽃인데요?"
무뚝뚝한 배상진마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고 재빨리 물었다.
조정재는 빙그레 웃었다.
"1급 비밀입니다. 하지만 배 선생님께서 협조를 해 주신다면 특별히 알려 드리겠습니다."
조정재의 귓속말을 듣고 난 배상진의 얼굴에 미소가 살며시 번졌다.
"매우 훌륭합니다. 그런데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여기까지는 저희들만으로도 가능합니다. 도와주실 것은 다음부터입니다."
그러면서 조정재는 깊은 숨을 내쉬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이 핀 다음 축하공연이 있습니다. 곡목은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닙니다만, 아무튼 오케스트라의 공연이 있는데 오케스트라에는 세계 최고의 거장들이 참여하게 됩니다."
조정재가 하나씩 거론해가는 연주자들은 그야말로 금세기 최고의 거장들이었다.
우선 지휘자부터 그랬다.
뉴욕 필의 쥬다 제시가 지휘를 맡는다.
바이올린은 한국이 낳은 천재 장아란과 그녀가 속해있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나선다.
비올라는 오스트리아 빈필의 연주팀이 참여하되, 라이언 영재 오닐이 합류한다.
대만의 장쿼이가 첼로를 연주한다.
트럼펫이나 호른 등의 관악은 베네주엘라 두다벨 오케스트라의 관악팀이 담당한다.
타악기는 호주 시드니심포니오케스트라의 멜로허가 협연한다.
여기에 필리핀의 마가리타 합창단이 등장한다.
대륙 별 세계 최고의 거장들이 참여하는 사상 최초의 꿈의 오케스트라가 출현하는 것이다.
배상진은 넋을 잃고 조정재의 얘기에 빠져들었다.
도대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하나의 오케스트라라면 몰라도 파트별로 세계 최고의 연주자들이 한 장소에 모여 연주한다니, 비용을 떠나서라도 물리적으로 그들을 모은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이 한국에서?
배상진의 그런 생각을 정확하게 읽은 듯이 조정재는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예, 그렇습니다. 불가능한 공연입니다. 그러니까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현실로는 불가능하지만 사이버상에서는 가능하지요.
그들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한국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이 속한 오케스트라의 무대에 섭니다. 다만 카메라의 영상이 그들의 연주를 한국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뉴욕의 쥬다 제시가 지휘봉을 잡고 지휘대에 서면, 그 화면을 보면서 모두가 각자의 악기를 잡습니다. 쥬다 제시의 지휘에 따라 모두 연주를 시작합니다. 모니터에는 전 세계 거장들의 연주가 멀티비디오로 동시에 송출되게 되지요."
조정재는 잠시 말을 멈추고 커피잔을 입에 댔다.
조정재의 아이디어가 실현될 경우 그 음향, 그 영상은 가히 천상의 오케스트라가 빚어내는 걸작이 될 것이라고 배상진은 생각했다.
역사상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고 불가능한 연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입을 연 조정재의 목소리에 배상진은 환상에서 깨어났다.
"안면도 꽃박람회에서는 지휘자인 쥬다 제시 한 분만 한국으로 초청하고자 합니다. 그는 바로 대통령이 계신 개막식 무대에서 좌우로 펼쳐진 멀티 LCD화면을 보면서 동시에 각기 다른 나라에 떨어져 있는 연주자들을 지휘하게 됩니다. 한국에서 연주자를 아무도 초청하지 않고도 세계의 거장들이 연주하는 실시간의 연주를 전 세계인들은 들을 수 있습니다.
배 선생님의 월드컵 심포니와 어떤 면에서 흡사하지 않습니까? 영상과 음악의 결합이라는 점에서요."
이 얼마나 장엄하고 웅장한 예술과 기술의 융합인가.
남달리 자부심이 강한 배상진도 조정재의 상상을 초월한 스케일에 압도되고 말았다.
'조정재, 나이 62세라고 들었다.'
노명찬으로부터 미리 전해들은 조정재의 이력을 떠올리던 배상진은 쓴 웃음을 지었다.
"대단하시군요. 그렇지만,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세계 각국의 연주자들이 펼치는 선율이 한국에 도달하는 속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미 베네주엘라에서 연주하는 트럼펫의 소리가 한국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터넷 상의 몇 개의 서버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한 전달과정으로 인해 지휘와 연주는 시간상으로 차이가 있게 되지요.
지휘자와 연주자의 템포가 어긋나게 되는 것입니다. 0.1초만 차이가 있어도 심포니는 실패하고 말지요. 각국의 모든 연주자가 이런 식이면, 연주는 화음은 고사하고 소음으로 가득 차 망가지고 말지요. 마치 축구경기를 볼 때, 인공위성으로 하는 중계방송과 디지털방식에 의한 중계방송이 미세한 시차를 보이는 현상 같은 것입니다. 그런 기술적인 문제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그런 질문을 예상한 것처럼 조정재가 빙그레 웃었다.
물론입니다. 당연히 고려되어야 할 핵심문제이죠.
그런데, 그 문제를 이번에 한국의 KTP통신사와 독일의 멕켈 통신사의 합작에 의해 기술적으로 해결했습니다.
화면과 소리를 제공하는 각 서버에서 싱크로나이징, 즉 동시화작업을 하는 싱크로나이저를 200 기가바이트 칩으로 개발한 것입니다. 각 나라의 서버에 이 칩을 장착해 지휘자의 지휘 화면이 동시에 송출되도록 미세하게 조정하는 기술적 해결방안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러면 연주자들은 송출되는 영상을 보면서 연주를 해도 모든 연주자가 동시에 연주를 하는 효과를 얻습니다.
그리고 다시 연주자들의 소리와 영상이 서버에 동시에 입력이 되고, 방영이 될 때는 다시 각 서버에서 이 싱크로나이저 칩으로 출력시간을 조정하면 전 세계의 시청자들은 동시에 소리를 듣고 영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지휘자의 실시간 지휘와 시청자들이 보는 화면에서의 지휘는 불과 0.02초에서 0.07초의 시간차만 날 뿐입니다."
배상진은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배상진은 조정재를 다시 쳐다보았다. 안면도 국제꽃박람회가 도대체 어떤 행사일진대 이런 정도의 인물이 자문역이란 말인가.
"그런데 제가 어떻게 무엇을 도와준다는 것입니까?"
"예, 저는 이러한 세계적 규모의 오케스트라 연주는 솔직히 안면도 국제꽃박람회의 스케일과는 맞지 않는다고 봅니다. 차라리 월드컵 수준의 컨셉에 어울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배 선생님이 월드컵심포니를 연주할 때 이러한 방법에 의해 지상 최대의 심포니 연주를 기획해보시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배상진은 성급하게 물었다.
"아까는 꽃박람회 개막식 행사로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박람회 개막식 때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런 규모의 행사를 실현시키기는 저희들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의 심포니에 이런 방법을 써 보시되, 월드컵 보다 두 달 앞두고 열리는 우리 꽃박람회 때에는 시범연주를 하는 것으로 해주시면 어떨까 하는 것입니다.
배 선생님은 이미 세계의 거장들과 친분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월드컵심포니도 어차피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한 번 쯤은 리허설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경우 저희들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장엄하고 훌륭한 개막식 행사를 치를 수 있을 것 같아서 감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배상진은 다시 한 번 감동했다. 한국의 공무원 가운데 이런 아이디어와 경영마인드가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 경이로웠다.
"실례지만, 조 선생님은 무엇을 하시다 자문역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그 전에 한국무역진흥공사, 코트라에 있었다가 정년퇴직했습니다. 현역이었을 때에는 정부의 해외홍보 전시 파트에서 일했습니다."
(계속)
우보 최민호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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