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그동안 펼쳤던 대북압박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있는데 중국을 향한 대북 원유공급 중단 요청 또한 여기에 포함된다. 이와 더불어 북한의 해상운송 차단 역시 미국이 추진하는 핵심적 조치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두 중국이 나서야만 비로소 실질적 효과를 볼 수 있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의 통화에서 대북 원유공급 중단을 요청했다고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가 밝혔다.
미국은 중국이 대북 송유관을 잠그면 북한이 '항복'할 것이라고 보고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중국은 과연 순순히 그리 할까? 중국에게 있어 북한은 미국의 한국과 같은 혈맹(血盟)이다. 또한 북한이 붕괴되면 곧바로 자국의 안방을 내주는 것이란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이는 과거 일제의 중국침략에서 도드라진 어떤 트라우마이기도 하다.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蘆溝橋) 사변'으로 인해 일제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었다. 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양국 군대의 이 충돌사건은 '루거우차오 사건'으로도 알려져 있다.
사단(事端)은 중국의 베이징 남서쪽 교외의 융딩 강(永定河)을 가로지르는 루거우 교 왼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서 시작되었다. 교외의 작은 돌다리였던 당시 여기엔 장쉐량 휘하 쑹저위안(宋哲元)이 이끄는 제29군(軍)의 일부가 주둔했다.
1937년 7월 7일 밤 펑타이(豊台)에 주둔한 일본군의 일부가 이 부근에서 야간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몇 발의 총소리가 난 후 사병 한 명이 행방불명되었다. 알고 보니 사병은 용변 중이었고 20분 후에 대열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군은 중국군 측으로부터 사격을 받았다는 구실로 펑타이에 있는 보병연대 주력을 즉각 출동시켰다. 중국군을 공격하여 다음날인 8일엔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최초 10여 발의 사격이 일본군의 모략에서 나온 것인지 중국의 항일세력에 의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이를 중국침략의 기회로 삼아 군대를 증파했다. 이어 7월 28일엔 베이징과 톈진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고 12월 13일엔 '난징대학살'까지 자행하였다.
'루거우차오 사건'은 결국 전면전쟁으로 확대되어 중·일전쟁(中日戰爭)에 돌입하였다. 일본은 중국 대륙의 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해 1931년 9월 18일엔 만주전쟁을 일으켰다. 이어 중국의 동북지방을 점령하고 그 지역을 '만주국'이라 하여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제국주의 야욕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내륙으로 공격할 빌미를 찾고 있던 차에 사소한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일방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결론적으로 그 작은 다리 위에서 사라진(실제론 그렇지 않았으되) 일본군 사병으로 말미암아 확대된 이 사건은 일본의 조작이었다. 이는 또한 청일전쟁 이후 중국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중국에 대한 군사행동을 마치 '아시아 혁신'의 사업인 양 거짓으로 꾸민 일본정부의 책략이기도 했다.
루거우차오에서 시작된 일본의 공격은 이후 중국인을 자그마치 1,200만 명이나 죽이는 등 그 만행은 극에 달했고 중국인들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특히나 일본군의 삼광작전(三光作戰), 즉 가옥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죽이며, 재물을 약탈하여 생존 조건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잔학행위는 인면수심(人面獸心)이란 표현을 전혀 낯설지 않게 했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떤 중국은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으로 혼란을 거듭하였으나 일본의 공격을 막아내는 것이 먼저라는 인식의 공유 끝에 국공합작(國共合作)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일본의 제국주의는 중일전쟁의 전선을 동남아시아로까지 확대한다.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급기야 태평양을 넘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기에까지 이른다.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참패를 당하면서 일제의 사기는 저하되고 105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이 이미 제2전선(第二戰線)이 되어버린 중국 전선에 못 박혀 있음으로써 제 구실을 못한다. 결국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위력을 본 일제는 1945년 8월 14일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면서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하기에 이른다.
다음날인 8월 15일 일본천황이 라디오를 통해 항복 선언을 하면서 우리나라 역시도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이 재발되면서 미국은 북한에 도발에 초강경 대응을 선언했다.
여기엔 중국을 향한 북한의 원유공급 중단도 포함된다. 하지만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하는 중국은 그럴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기존의 원칙적 입장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중국의 대북관(對北觀)은 중국 인민대 스인홍 교수의 "중국이 미국의 원유 중단 요구를 수용할 가능성은 낮다"는 발언이 그 방증이다.
"거듭된 제재로 북한을 극도로 자극한 상태에서 원유공급까지 중단한다면 북한은 중국의 적대국으로 완전히 돌아설 것"이라는 그의 말에 신빙성이 높아 보이는 때문이다. 그럼 중국은 왜 이처럼 우리와 미국의 바람과는 사뭇 달리 북한을 여전히 애지중지 끌어안고 있는 것일까.
우선 중국의 이러한 뜨뜻미지근한 정책은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의 일환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 나라의 힘을 이용하여 저 나라를 제어함을 뜻하는 이 '이이제이'는 옛날 중국의 본토 국가들이 주변 국가들을 다스릴 때 사용하던 전략이다.
중국 입장에서는 예부터 사방의 여느 민족들이 다 '오랑캐'였다. 그런데 각각의 오랑캐를 자신들의 힘으로 제압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따라서 탄생한 전략이 바로 이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오랑캐는 예전에 두만강 일대의 만주 지방에 살던 여진족을 멸시하여 이르던 말이다.
또한 언어와 풍습 따위가 다른 민족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따라서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한국인들은 여전히 이 오랑캐의 범주에 속해있음을 우리가 간과해선 안 된다.
이러한 까닭에 중국이 우리의 요구에 순순히 응할 리 만무임은 아이들도 알 수 있는 상식이라 하겠다. 때문에 중국의 사드보복과 대한정책을 보자면 불땔꾼(심사가 바르지 못하여 하는 짓이 험상하고 남의 일에 방해만 놓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의 그것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셈법이 도출된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의 모습. 이 사진에 마크 배럿 중위는 찍혀 있지 않다(배럿 중위로 표시된 사람은 진 비클리(Gene Bickley) 하사이다)/출처=위키백과 |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당시의 모습/출처=대한뉴스 |
오전 11시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사천교(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방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사 경비병들을 북한군 수십 명이 도끼 및 흉기로 구타, 살해한 이 사건은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건 발생 직후 유엔군사령관인 스틸웰(Richard G. Stilwell) 대장은 대책회의를 주재하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측에 제시할 항의문 작성과 유엔군사령관이 김일성에게 보내는 서한, 그리고 미루나무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지시하며 상세한 내용을 미 백악관에 전달했다.
8월 19일 미국은 북한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이 사건 이후 벌어지는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도 북한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성명을 발표했다. 한편 미국은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주한미군의 전투태세 강화, 오키나와의 미군 전투기를 한국으로 재배치, 미 본토의 전폭기 한국 이동 등 군사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대해 북한 역시 19일 17시를 기해 최고사령관 김일성의 명의로 전 군대와 로농적위대, 붉은청년근위대 등 북한의 모든 정규군과 예비군 병력에 대해 전투태세에 돌입하도록 명령을 하달하는 등 북한 전역을 비상체제로 돌입케 했다.
여기에서 "만약에?"라는 가설이 동원된다. 당시 '피해자'였던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와 빌미로 북한당국과 회담을 진척시켜 향후 미사일(대륙간탄도미사일 등)과 더불어 핵개발 등의 금지를 포함한 장기적 어젠다(agenda)를 도출해야 했다는 것이다.
마치 수십 년 동안이나 계속된 미국의 쿠바 경제봉쇄처럼 그렇게 철저하게. 물론 그러한 미국의 제안에 김일성이 순순히 응했을 리라 보진 않는다. 그렇긴 하더라도 자국의 군인들이 사망한 사건에 미국이 분개하여 그 보복의 강도를 더욱 높였더라면 오늘날 김일성의 손자인 김정은의 핵무기까지 동원한 협박은 없었을 것이란 예측이다.
만약에 그랬더라면 우리는 왜 오늘도 오만방자하기 짝이 없는 김정은의 일거수일투족에 일희일비하는 신세가 되었겠는가! 중국과 북한은 같은 공산국가다. 공산주의는 모두를 '동지'로 보고 '동무'라고 부르는 끈적끈적함을 자랑한다. 발본색원(拔本塞源)에 대한 아쉬움이 새삼 절실한 즈음이다.
홍경석 수필가 & 칼럼니스트 |
가수 조항조의 가요에 '만약에'라는 히트송이 있다. 이 노래는 "만약에 당신이 그 누구와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을 위해서 무얼 할 수 있나~"로 시작된다. 이 노래의 끝부분에 이르면 "만약에 널 위해 나 죽을 수 있다면 날 받아주겠니 ~"가 도드라진다.
너를 위해 내가 죽을 수 있다? 대단한 순애보의 가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처럼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해 소중한 내 목숨까지를 흔쾌히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이 연인 김우진과 대한해협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는 건 잘 알려진 비극적 러브스토리다. 그녀가 꽃다운 나이 때 스스로 목숨을 버린 건 그의 연인이었던 김우진에겐 하지만 버젓이 처자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만약에 윤심덕이 당시 김우진이 유부남인 줄 알고 관계를 깨끗이 정리했더라면 그녀는 그처럼 요절할 수 있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성된다. '만약(萬若)에'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뜻밖의 경우를 일컫는 만일(萬一)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전쟁이 터져서 전선에 출병하는 애인이 있다고 치자. 그가 결혼을 약속한 처자에게 "내가 살아서 돌아온다면 약속대로 결혼식을 올리겠지만 만약에 그렇지 아니하다면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도 좋아"라고 하는 식이다.
그러한 상황의, 매우 막연한 상태 내지 안갯속처럼 무망(無望)한 현상을 통틀어 '만약에' 라고 정의해도 무방하지 싶다. 한데 이처럼 '만약에......' 라는 가설(假說)은 명징한 구체성이나 현실성이 대두되지 않는 이상엔 허투루 교각의 가설(架設)처럼 언제든 붕괴될 수 있다는 치명적 약점을 내재하고 있다.
2017년 11월 30일자 중앙일보에는 '도숙자(賭宿者) 리포트 <중> 죽어서야 떠나는 사람들'이 게재되었다. 내용은 합법적 도박장인 강원랜드에 발을 들인 게, 하지만 비극의 씨앗이 되어 빚더미에 앉은 사람들의 자살이 속출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이러한 사례에서도 여실히 볼 수 있는 게 바로 '만약에?' 의 존재 이유다. 이는 또한 필자가 입때껏 다양한 사례와 구절양장의 사회현상을 겪으며 축적된 의문의 잣대로 발동했다.
아울러 더 나아가 역사적으로도 '만약에?'라는 화두에도 궁금증과 이의 치환을 위한 돋보기를 들이민 계기와 이 글의 집필 계기가 되었다. 만약에 윤심덕이 김우진과 미련 없이 이별했더라면 그처럼 일찍 낙화(洛花)했을 리 없었으리라.
만약에 도박을 안 했더라면 25억 원이나 되는 거액을 탕진할 리도 없었을 테고, 그로 말미암은 자살 또한 딴 사람 얘기로 치부되었을 것이었다. '만약에'는 사실 희망의 기대보다는 불길의 우려가 압도적이다.
예컨대 북한의 김정은이 만약에 미국까지 공격한다면 그 이후의 사태 전개는 과연 어찌될 것인가 라는 따위의 염려가 그 방증이다.
아무튼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 이상 접하기 마련인 '만약에?'라는 고민과 삶의 연장선상인 그 '만약에'의 보편적 정서 타개, 그리고 이미지의 화석화 타파 차원에서 본 칼럼을 저술코자 한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 그리고 따가운 질책까지를 아울러 부탁드린다.
홍경석 / 수필가 &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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