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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달천강 수로/사진=조영연 |
그 핵인 충주는 지리적으로 국토의 정 중앙부에 위치해서 사방으로 연결되는 육로와 수로가 발달했다. 특히 역사의 변화 과정에서 매번 크게 관여됐던, 부산에서 안동과 문경을 통과 소백산맥의 척추를 가로질러 북상하는 영남대로상 육로는, 문경으로부터 하늘재-미륵리-계립령(지릅재)-대림산성 혹은 미륵리-송계계곡-덕주산성-재오개재(직동) 근처를 지난 다음 충주로 진입한다. 충주로 들어와서는 연원도상 丹月(충주시 남서. 대림산성 서북 인근역), 달천나루, 대소원, 용안 등을 거쳐 한양으로 향하거나 연원역-합수머리나루-金遷-노은 혹은 앙성 등을 경유, 앞의 길과 합세하여 함께 장호원으로 올라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수로는, 태백산 서쪽이자 죽령 등 소백산맥 서쪽에서 발원하여 온달산성과 적성산성 등을 경유해 흘러내리는 남한강이, 속리산에서 발원한 다음 대림산성 밑을 스쳐 북진하는 달천강과 탄금대 아래에서 합수한다. 그 뒤 북으로 급회절하여 可興倉(목계)을 지나 한강으로 나아간다. 이 수로 또한 육로인 한양대로와 더불어 과거 중요 동맥으로서 국방, 경제 등 여러 가지 막대한 임무를 수행했다.
특히 충주지방은 일찍이 식량은 물론 철의 주생산지로서 중시됐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사신이 와서 환도 1000 자루를 주문해 갔다는 고려사 기록은 주목할 만하다. 그런 면들이나 한반도의 중앙부로서 전략적 가치 등 때문에 백제, 고구려, 신라가 각축을 벌이던 4-6세기(삼국기) 무렵의 이 지역은 동진, 남진, 북진과정에서 영토 확장을 위해 어느 나라든 선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충지가 됐다. 물론 후대의 각종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4세기 전성기 백제가, 5세기에는 고구려, 6세기 들어서는 신라가 점령하기까지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들이 전개됐었다. 원래 백제 낭자곡성이었던 이 지역을 5C후반 경 고구려가 빼앗고 소백산맥 북쪽까지 진출, 국원성(國原城)을 설치한 다음 남진 거점으로 삼았다. 고구려가 얼마나 이 지역을 중시했는가는 중원 고구려비가 말해준다. 그러나 6C 중반 신라 진흥왕은 고구려를 물리치고 소백산맥 너머 충주에 중원경(中原京)을 삼고 한강 하류, 함경도 지역까지 북진을 위한 전진기지로 활용했다. 진흥왕은 이웃 적성에 순수비를 세웠다. 그렇게 역사가 뒤바뀌는 과정에서 군사상 중요성 때문에 이 지역에는 크고 작은 산성들이 특히 많이 축조됐다. 신라의 북방 전진 거점성인 문경의 고모산성을 위시해서 하늘재(한훤령)산성을 경계로 덕주산성, 대림산성, 충주산성(남산성), 장미산성, 보련산성, 온달산성 적성산성 등 굵직한 산성들이 이곳을 통과하는 육로와 수로 주변에 포진돼 있다. 그 나머지 탄금대토성이나 용관동산성 등 산성들도 있다. 그 뒤 고려, 조선시대에도 목(牧)이 설치되어 통치의 중심지가 되었다.
고려, 조선시대에는 한양 목멱산으로 전달되는 주봉로가 이 지역을 거쳐가고 충청좌도의 연원도상의 丹月, 可興, 用安(충주)을 비롯 淸風의 黃江, 水山, 연풍의 新豊, 安富 등 여러 역들도 수륙 교통로변에 설치됐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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