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광 전 관장 |
얼마 전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일주일 연기되는 일이 발생했다. 모든 컨디션을 시험 날짜에 맞춰 준비해오던 수험생들은 공부할 시간이 더 주어져서 기쁘기보다는 다시 피 말리는 1주일을 보내야 하는 압박감에 더 힘들어했으리라. 심지어 인생이 일주일 늦춰진 것 같다고 자조 섞인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필자가 대학생이던 1980년에 ‘오리아나 팔라치’라는 이탈리아 여기자가 쓴 ‘A Man’이라는 그리스의 반(反)독재 혁명가 ‘파나굴리스’에 대한 전기적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팔라치는 키신저, 간디, 덩 샤오핑 등 전 세계 유명 인사들을 인터뷰하며 의례적인 질문이 아니라 상대의 심장에 직격탄을 날리고 물어뜯어 결국 잘못을 자백하게 하고야 말았던 전설의 여기자다. 그녀는 그리스 독재자 ‘파파도풀로스’를 암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투옥돼 끔찍한 고문을 당한 뒤 막 풀려난 파나굴리스를 인터뷰하다 첫눈에 반해 3년간 연인으로, 아내로 그와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파나굴리스가 1976년 의문의 사고로 죽게 되고 이 사건이 제대로 조사되지 못한 채 묻히자 슬픔 속에서 칩거에 들어가 이 소설을 썼다.
소설 속 파나굴리스는 감옥에서도 높은 인품을 보여줘 교도관들마저도 존경했는데, 독재정권은 눈엣가시 같은 그를 하루빨리 없애려고 서둘러 사형 집행일을 정했다. 사형 전날 그는 마지막 하루를 소중히 잘 보내기 위해서 몇 시간은 누구를 생각하고, 또 몇 시간은 무엇을 하며 보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교도관에게 잠시 후 깨워달라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간수는 너무 곤히 자는 그의 모습이 안쓰러워 깨우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돼서야 깨어난 그는 교도관에게 불같이 화를 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날은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고 또다시 정해진 다른 날도 또 안 되고, 이러기를 여러 번 반복됐다. 국제사회가 그리스를 압박한 결과였지만 감방에 있는 그는 그 상황을 알 수 없었기에 살아있다는 것이 기쁘기보다는 여러 번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워 빨리 사형시켜 달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전문가들은 이제 곧 사람의 평균 수명이 100세가 되는 시대가 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더 오래 살게 돼서 기쁘기보다는 모아 놓은 돈도 없는데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야 하나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인생을 3막으로 나눌 때 30년은 공부하고 30년은 배운 것 가지고 일하고 나머지는 여생으로 산다고 하는데, 이 나머지 생이 30년, 40년 대책 없이 길어지니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부모들은 준비 없이 맞이했던 자신의 2막이 얼마나 서툴렀는지를 잘 알기에 자식들에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지 그래서 얼마나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지 잔소리하기 바쁘다. 그런데 정작 자신들은 1~20년 대충 마무리하는 여생이 아니라 대책 없이 늘어난 또 다른 생을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깨닫지 못하고 준비도 못 하고 있다.
시간이 1주일만 더 있었으면 했던 수험생에게 거짓말처럼 1주일이 주어졌는데, 하루만 더 있었으면 했던 파나굴리스에게 정말 하루가 더 주어졌는데, 전혀 예상치 않게 주어진 하루는 일주일은 고통이 되기도 했다. 이렇듯 인생 3막도 얼마나 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 더 부담스럽고 더 두려운 것이다.
필자는 지난달 말에 30여 년을 근무했던 직장을 그만뒀다. 치열하게 살아왔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을 맞아 해외여행도 다녀왔는데,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작성한 세금신고서의 직업란에 ‘무’라는 글자를 써넣고 나니 퇴직했다는 것이 더 실감 난다. 시골에 가면 70대가 청년회 회장을 한다는데 50대이면 아직 청춘이지 않은가?
그래 다시 청춘이다. 3일간 펼쳐지는 역전 마라톤의 3일 차 출발선에 선 것이다. 마음을 다잡고 나니 3막의 시나리오가 막 떠오른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후배들이 처음 부딪친 세상은 생각처럼 녹록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덤으로 얻은 1주일이 오히려 독이 되어 정리했던 것이 뒤죽박죽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 한번 수능을 망쳤다 해도, 좋은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다 해도, 지레 겁먹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나긴 마라톤의 승리자는 당신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넘어지고 깨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 달리다 보면 어느새 다리에 힘이 불끈 솟을 것이다.
양성광 전 국립중앙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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