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랑(一浪) 이종상 화백이 1978년에 제작한 원효대사 영정이다./소장처=국립현대미술관 |
지혜를 펼친다는 뜻이니 태어나는 지명(地名)도 운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할아버지는 잉피공(仍皮公)이며 아버지는 담날(談捺)인데 경북 경산군 자인면 발지촌(發智村) 서남쪽에 율곡(栗谷)이라는 산언덕을 만삭인 아내와 지나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통(産痛)이 와서 집에 들어갈 사이도 없이 다급한 김에 원효대사의 아버지인 "담날"은 자신의 옷을 벗어 옆에 있는 밤나무 나뭇가지에 걸쳐주고 부인은 밤나무 밑에서 아기를 출산하여 이 밤나무를 "사라수(娑羅樹)"라고 불렀으며 이 밤나무에서 열리는 밤이 이상하게도 월등하게 밤알이 커서 특별히 알밤이 굵고 큰 것을 "사라밤(娑羅栗)"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원효대사의 어머니가 하늘에서 밝게 빛나는 별이 자신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임신을 하였으며 밤나무 밑에서 아기를 출산할 때 아름다운 오색구름이 주변에 가득하여 처음 이름을 서당(誓幢)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신당(新幢)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서당(誓幢)은 만인을 인도하는 깃발이 될 것을 맹서한다는 뜻이며, 신당(新幢)은 새로운 방향으로 인도하는 깃발이란 뜻이 되니 원효대사의 일심사상(一心思想), 화쟁사상(和諍思想), 무애사상과 일치한다.
원효대사는 어린 소년시절에 신라 화랑에 속하기도 하였으나 깨달은 바가 있어 중도에서 화랑을 그만두고 불교에 출가할 뜻을 굳게 세우고 자신의 집을 헐어 절을 짓고 이름을 초개사(初開寺)라 하였으니 처음 연 절이란 뜻이다.
648년 32세 때에 황룡사(皇龍寺)에서 중이 되어 각종 불경을 섭렵하고 수도에 정진하였으나 일정한 스승을 모시고 따라 배우지 않고, 타고난 총명함을 바탕으로 스스로 혼자 수많은 불교서적과 한학을 독학하여 한국 불교사의 최대 학자이자 불교사상가로 업적을 남겼다.
원효대사가 고구려로부터 망명을 하여 완산주(完山州)에서 보덕(普德)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다는 설이 있으나 시대적으로 보면 원광(圓光)스님이나 자장(慈藏)스님에게서 불도를 배웠을 가능성이 더 많다.
원효는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스스로 불교 경전을 연구하고 수도(修道)를 정진하다가 34살 때에 의상(義湘)대사와 함께 중국 당(唐)나라에 가서 불법(佛法)을 배우려고 길을 떠났으나 육로를 택해 당나라로 가다가 도중에서 고구려 군병에게 잡혀서 간첩혐의로 옥살이를 하다가 한 달 뒤에 겨우 풀려나 다시 신라로 돌아오고 말았다.
무려 10년의 긴 세월이 흘렀으나 원효대사는 의상대사와 함께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찾기 위해 다시 중국 땅 당나라로 가는 도중에 잠결에 목이 심히 말라 마실 물을 찾다가 바가지에 물을 발견하고 시원하게 맛있게 마셨는데 잠이 깨고 다시 보니 버려진 해골바가지에 고여 있는 흙 먼지투성이 의 빗물임을 알고 마신 물을 토하여 뱉으려하다가 "진리는 밖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서 찾아야한다" 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의상(義湘)과 헤어져 신라로 되돌아 왔다.
이 무렵에 신라 태종 무열왕의 둘째딸 요석공주(瑤石公主)의 남편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에서 전사하고 요석공주는 젊은 청상과부로 지내고 있었는데 원효(元曉)는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세우리라" 하고 노래를 퍼뜨렸는데 자루 없는 도끼는 여성을 나타내고 요석공주를 의미하며 도끼자루는 남성을 뜻하고 원효 자신을 의미함을 무열왕도 알고 원효와 요석공주를 만나게 하니 궁으로 가던 원효는 개울물에 빠져서 옷이 흠뻑 젖은 채로 요석공주를 만나 옷을 말려주던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설총(薛聰)을 낳게 되었다. 훗날 설총은 최치원, 강수 와 함께 신라 3대 석학으로 "이두 문"을 집대성하였다.
원효는 스님으로서 스스로 불교의 계율을 어기고 남편과 사별한 요석공주와 정을 통해 설총이란 아들을 낳으니 파계승(破戒僧)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스스로 복성거사(卜性居士)라고 불렀으며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도 칭하며 속인 행세를 하였다.
파계승이 되면서 원효는 더욱 크고 위대한 사상가로 전환하게 되니 이상한 옷차림을 한 광대가 표주박을 들고 춤을 추며 많은 군중을 웃기는 것을 보고 깨달음을 얻어 심오한 불교의 경전 "화엄경"을 쉬운 노랫말로 지어 광대 같은 복장을 입고 군중 속을 찾아다니며 노랫가락을 전파하니 "무애가(無?歌)"라 하며 "모든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야 생사의 편안함을 얻느니라" 라는 뜻이다.
원효대사는 불교가 왕실과 왕족중심의 귀족불교 화 되어가는 것을 탈피하여 서민중심의 민중불교로 바꾸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계파주의와 종파주의로 내달리던 불교이론을 방향을 바꾸어 보다 높은 차원에서 승화(昇化)하고 회통(會通)하려 하였는데 그것을 원효대사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한다.
원효의 화쟁사상 은 일심사상(一心思想)과 '무애사상'으로 귀결되며 만유가 모두 다르나 모두 하나라는 구심점이며 화쟁과 막힘이 없는 자유를 제창하였다.
일심사상은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 본성(本性)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귀일심원(歸一心源)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것이다. 곧 만법귀일(萬法歸一)과 만행귀진(萬行歸眞)을 말함이 된다.
화쟁사상(和諍思想)은 어느 한 종파에 속하여 치우치지 않고, 모든 종파의 불교진리를 하나의 진리 속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분열이 없고, 종파분열이 없는 불교사상체계를 새웠다
"쟁론(諍論)은 집착에서 생긴다." 불도(佛道)는 광탕(廣蕩)하여 '무애무방' 하여 막힘이 없고 방향도 없으니 해당하지 않음이 없다.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불의(佛義)이다.
백가(百家)의 설(說)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자기견해에 동조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면 옳지 않다는 것은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고 다른 사람들은 하늘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나 같다. "일체의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원효대사는 240 여권의 귀중한 서책을 저술하였으나 많이 소실되고 현재 22권이 전해지며, 원효(元曉)는 법명(法名)이다.
원종문 명인철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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