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뿐 아니라 우리 모두, 나아가 사회 전체에 절제와 조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모처럼 외식 갖다 오는 날이면, 아내는 곧잘 배탈이 납니다. 남이 차려주는 밥이 더 맛있는 탓일까? 달콤한 포만감 때문일까? 조절이 되지 않나 봅니다. 그릇을 모두 비우지 않으면 무언가 꺼림칙한 모양이지요. 영양가 없이 속만 버리니 안타깝습니다. 아내뿐이겠습니까? 필자 역시 지나치거나 부족하여 매사 조화롭지 못합니다. 그런 탓에 각종 질병에 시달리지요.
술도 적당히 마시면 좋은 음식이라 하지요. 공복에 마시는 한 잔 술은 보약이란 말도 있습니다. 몇 잔 마시다 보면 술이 사람을 먹습니다. 참으로 술을 즐길 줄 아는 주선이 아니고는 통제 하지 못하지요.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고, 조절, 절제가 쉽지 않겠지요.
정치 포함, 세상사 모두 마찬가지 아닐까요? 지나침을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사회는 폭력에 빠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폭력적 쾌감에 사로잡혀 막나가고 있지나 않는지 의심케 합니다. 제어하지 못하면 망치게 되지요. 멈출 줄 모르면 구렁에 빠지게 됩니다.
지나침이나 폭력적 행태는 어디에서 올까요? 물질은 풍요로우나 각종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 욕망에 붙들려 소중한 삶이나 도덕적 가치를 외면한 탓은 아닌지요? 욕망은 일류 발달의 근원이요, 원동력이기도 하지요. 하지만, 지나친 욕망이 행복을 깨고 불안을 가져오지나 않는지요?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평상심, 외부 변화에 동요하지 않는 부동심, 쾌락이나 허황한 욕망에 매이지 않는 평정심을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일가? 어디에서 출발할까? 생각해 봅니다.
개인이나 국가 공히 추구하는 하나는 행복입니다. 행복해지는 방법은 두 가지 뿐입니다. 욕심을 조절하거나 모든 욕심을 가득가득 채우는 일입니다. 모두 채우는 일이 불가함을 우리는 익히 압니다. 따라서 방법은 하나뿐, 줄이거나 버리거나 멈추는 일이요, 그를 아는 일입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란 말이 있지요.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말로, 논어 선진편 15장에 나오지요. 자공(子貢)이 자장(子張, 師)과 자하(子夏, 商 ) 둘 중 누가 더 어진가를 공자(孔子)에게 묻습니다. 사는 지나치고 상은 미치지 못한다 하자 다시 묻지요. 공자가 지나친 것은 미치지 못한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합니다.「子貢問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부족하거나 넘치면 중을 잃기는 마찬가지지요. 요즈음엔 의미를 확대하여,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봅니다.
서예작품에 입구(口)를 가운데 두고 네 글자 합쳐 놓은 글씨를 본 일이 있습니다. 불가에 전해지는 오유지족(吾唯知足)입니다. 나는 오직 족한 줄을 안다. 지금 가난이, 지나친 탐욕을 버리지 못한 전생 업보라 가르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분수 지키며 만족할 줄 안다(安分知足)거나, 분수 지켜 만족할 줄 안다(守分知足)는 말도 있습니다. 족한 줄 알아야 행복이 찾아옵니다.
자타불이(自他不二)란 불교 용어가 있습니다. 모든 존재는 상호 의존적이란 말이지요.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관계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하물며 사람과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요. 세상에 나온 이상 이미 남이 아닙니다. 절제를 통한 조화만이 최선이지요. 지나침이 자해가 되지 않기 바랍니다.
양동길 / 시인,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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