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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고등학교시절에 '나무예찬', 정확히 수필의 제목은 생각나지 않는다. 나무는 나를 닮았다. 아니, 내가 나무를 무지 닮고 싶다. 그만큼 나는 나무를 사랑한다. 며칠 전 복지관 강의에서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읽어준 적이 있다. 읽을 때 마다 전해오는 느낌이 이렇게 다를까. 나무는 그랬다. '외로웠다고' 그리고 '기다린다고'... 그러나 더 깊이 나무는 '이래도 저래도 너가 행복하면 된다' 라는 부모와 같은 마음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다.
'이, 바보야, 너 마음은 중요하지 않고?' '외롭다고, 왜 이제 오냐고' 이렇게 라도 말이라도 하지... 그렇게라도 투덜대지 않는 나무, 그래도, '왔잖아'.. '그래, 맞다' '나를 찾아 왔네.' 그래도 무언가를 줄 수 있었던 나무의 행복은 마치 부모와 같은 신실한 사랑 같다.
그랬다. '나무의 기다리는 시간'은 내가 생각하는 '크로노스 시간'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시간이라 함은 '카이로스 시간'이었다. 사랑의 시간, 기다림의 시간은 '카이로스 시간'이었다. 어느 시점에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 나무라 해도 모두가 다 똑같은 나무가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나무는 어떤 나무일까?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사랑과 관심, 인정받기를 원하지는 않았나?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를 너무 외롭고 아프게는 하지 않았는가? 곧 그것이 자신 안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수많은 질문들이 뇌리에 스친다.
우리의 삶은 때로는 착하지 않는데, 착하게 살려고 애쓰거나, 현실에서 도망가고 싶은데 두려움 속에 살다가 마음을 다치게 되는 경우들을 경험한 바는 없는가. 스스로 영향력 있는 나무이고 싶어하지만, 준비되지 않거나, 전혀 모르고 살아왔던 날들로 인해서 상처받고 있지는 않는가? 살다보니, 자신이 의도한 바가 아닌데도 상처를 주거나 받기도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모든 행동에는 의미가 있다고 했다.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의식은 그 자체로 끊어지지 않는 연속적인 연결성을 형성하지 못한다"고 생각했고, 그렇기 때문에 "무의식의 과정을 의식의 과정으로 번역해 주어서 결과적으로 의식의 틈을 메워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무는 그랬다. 자신의 몸에 칼로 이름을 새기고 떠나도, 새가 와서 똥을 싸고 가도, 누가 자신을 베어가도, 강한 바람에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뿌리가 뽑혀도, 그는 그걸로 족했다. 내 안의 나무를 그리워하는 것은 갈망일 것이다. 또한 그것에 대한 나의 부족한 내면이 있기때문일 것이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에서 긍휼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어떤 기쁨이나 슬픔, 어떤 삶의 방식이나 죽음의 방식도 다 받아드린다. 그것이 부와 가난, 교육을 받는 자와 무지한 자, 언어와 국가의 경계를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다고 했다. 그 긍휼을 '나무'에서 배운다.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길 소망한다. 당신의 그늘이 되어주고, 당신의 친구가 되어주고, 당신이 어디에서 살든지, 어디로 가든지, '기다릴게. 언제든지' 이렇게 편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나무. 그럴 수 있기에 나무의 삶은 이미 충분하다.
박경은 가득이심리상담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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