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인환 |
간단한 등기수속을 마치고 공안국 국장실로 안내하는 부진장. 마침 출타준비 중이었다는 공안국장은 부진장과 막연한 친구사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반갑다는 악수대신 서로 상대방의 어깨를 툭툭 치는 폼이 짖궂은 학생들의 모습 그대로다.
나를 소개한 후 단둘이 무슨 일인가 의논하는 눈치더니 저녁 때 다시 보자며 헤어진다.
밖으로 나오니 다시 거센 바람과 함께 눈발이 휘날린다. 예의 그 고물 승용차를 타고 한참을 달리다가 한 마을 안으로 들어서더니 대문도 없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테니스 코트장만한 넓은 마당 한 쪽에 차를 세운다.
마당 한 쪽에는 드럼통을 반쯤 잘라낸 화덕이 보이고 장작타는 소리와 그 위에 얹혀진 그물 쇠판 위에 지글지글 돼지고기가 익고 있었다.
건강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쫓아 나오는데 부진장은 가볍게 웃으면서 어머니라고 소개를 한다. 드럼통 화덕 곁에는 여섯 명의 부진장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남학생 한 명이 있었는데, 부진장은 그를 불러 나에게 인사를 하게 한다. 그의 아들이라고 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수년 전 그는 아내를 사별했고, 홀어머니와 아들 등 세 식구가 살고 있었다. 지은지 백 년이 넘는다는 옛날 가옥이지만 집의 크기로 보아 한 때는 경제적으로 풍요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고 대가족이 모여 살았을 것으로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친구들은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던 모양으로 부진장의 내 소개가 끝나자마자 차례대로 다가와 반가운 악수를 청한다.
눈발을 맞으며 야외 노천에서 벌어지는 불고기파티가 이색적이다. 백주(白酒)가 돌려지는데 술잔이란 것이 우리나라 막걸리잔 만큼 크다.
첫 잔은 무조건 깐빠이(남김 없이 마시는 것)해야 한다는 바람에 벌컥벌컥 마시고 나니 금새 추위가 사라져 버린다.
쇠판 위에 돼지고기 덩어리도 꼬챙이에 찍어 몇 번을 뜯어야할 만큼 크다.
서너차례 술잔을 받고보니 온몸에 열이 날 정도다. 어느사이에 왔는지 공안국 국장이 사복차림으로 함께 어울렸다.
일행들은 공안국 국장에게 '후래자 삼배'를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안주도 없이 연거퍼 석 잔을 권한다.
국장은 손사레를 치면서도 껄껄 웃으며 피하지 않고 다 받아 마신다. 그들의 왁자지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같은 마을에서 어린 시절부터 죽마고우로 같이 자란 친구들임을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더이상 버티기가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 부진장이 내 눈치를 보고 있었는지 내 곁으로 다가와 무척 피곤해 보인다고 말을 건넨다.
그러면서 내 대답도 듣기 전에 내 손을 붙잡고 집 안으로 이끈다.
이미 깨끗하게 치워진 방으로 안내를 하는데 비록 낡은 침대지만 깨끗한 이불이 얹혀져 있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내일 아침 먀오족 촌으로 안내를 하겠다며 한마디 하고는 방을 나가 버린다.
쓰러지듯 침대에 누워 꿈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먀오족 주(周)촌장집
이른 아침, 부진장은 잠시 사무실에 들렸다가 곧장 먀오족 촌으로 향했다. 약 두 시간 정도 황톳길을 달리면서 사방에 보이는 붉은 황토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저 붉은 흙 모두가 돈 덩어리들인데 알고 있느냐?"
"저런 게 어떻게 돈이 되느냐?"
"한국에서는 고철을 재생시키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황토다. 그리고 과수원에도 황토가 없으면 안되면, 화장품 원료로도 중요한 물질이다. 요즘엔 황토방이 유행할 정도로 황토는 귀중하게 취급되고 있다."
"그러면 이 흙들을 한국에 수출할 수 없겠느냐?"
"한 번 연구해 보자."
"오늘 생전 처음 들어보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 지방 삼분지 일이 모두 황토흙으로 된 산들이다. 몇백 년을 퍼내도 다 못 퍼낼만큼 많다."
(사업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내가 불쑥 꺼낸 말 때문에 부진장은 무척 흥미로워 했다. 이 이야기는 먀요족 촌을 떠나온 후 몇 달이 지나서야 한국의 친구에게 흙 한 푸대를 보내 검사를 부탁했고, 그 결과 위해물질이 없는 양질의 황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이나 한국 모두가 외국의 흙을 수입하는 것은 금지사항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맥이 풀어져 버렸다.)
점심 때쯤 도착한 먀오족 촌은 강을 끼고 위치한 아늑한 부락이었다.
모두가 단층집들로 집집마다 넓직넓직한 마당을 안고 있는 비교적 여유있는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마을 중간쯤에 위치한 촌장의 집에선 이미 연락을 받은 때문인지 안밖이 깨끗하게 청소를 마친 분위기였다.
자동차 소리를 듣고 대문밖까지 50대의 촌장 부부와 젊은 남여 한 쌍. 그리고 먀오족 전통복장 차림의 두 아가씨가 나와 있었다.
성을 주(周)씨라고 밝힌 촌장은 먼저 부인을 소개하고 젊은 남여는 조카딸과 조카사위가 될 청년인데 멀리 곤명(昆明)에서 며칠 후 춘절(한국의 구정 명절)를 보내기 위해 왔다고 인사를 시켰다. 그리고 끝으로 여고생 두 명의 딸이라며 소개를 했다.
부진장은 오늘 특별히 바쁜 일이 있어 곧장 돌아가야 한다며 촌장이 점심준비가 다 되었다고 한사코 붙잡아도 끝내 뿌리치고 차를 돌렸다.
나에게만 황토얘기일랑 잊지 말 것과 돌아가는 길에 꼭 기다리고 있겠다는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周촌장은 그동안 다녀본 소수민족들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농부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거실 한 켠으로 초대형 컬러 TV가 있었고, CD를 감상할 수 있는 DVD 등 가전제품들이 골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준비해 놓은 점심밥상도 반찬 종류만 20여 종, 상 다리가 휘어질 지경이다.
오랜만에 포식을 하고 시골집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화려한 실내 샤워장을 들어가며 또 한 번 놀랐다. 세 명 정도 들어가 앉아도 편할 만큼 커다란 욕조에는 벌써 뜨거운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몸 전체를 푹 담가보고 싶었지만 물이 아까워 바가지로 퍼서 머리를 감고 몸을 녹였다. 그리고 시원한 샤워꼭지를 틀고 피곤함과 황토흙을 씻어내렸다.
안내해준 방으로 돌아와 한 잠 자고 싶었는데 촌장의 조카사위가 같이 마을구경을 나가자고 청해 왔다.
부락은 골목길 자체가 시원시원하게 뚤려 있다. 승용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을만큼 넓다. 지나치다가 얼핏 한 집 마당을 들여다 보게 되었는데 호박과 옥수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나중에 周촌장에게 물어보니 자기네 집 뒷마당에도 쌓여 있다고 하면서 모두가 소와 돼지 사료용이라고 해서 놀랍기만 했다.
도시에서는 양식의 일부로 쓰이는 호박이며 옥수수가 얼마나 풍요로우면 가족사료로 쓰인단 말인가.
소수민족 촌에 갈 때마다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술을 즐기는 모습들이어서 힘들었었는데, 周촌장이나 조카사위 모두가 술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어서 얼마나 편했는지 모른다.
사진=김인환 |
#온 마을의 축제 먀오족 춘절 풍습
주(周) 촌장의 집에 도착한 3일 후에는 중국의 최대 명절인 춘절이었다.
이날은 꼭두새벽부터 온 식구가 이 날을 즐기기 위해 준비를 서두든다. 커다란 거실 중앙에 차려놓은 제사상을 중심으로 한 차례 조상에 대한 예의를 올리고 난 후 푸짐한 아침을 나눈다.
두 딸은 고급스러우면서도 휘황찬란할 정도의 전통복장을 차려입고 아버지를 조르고 있다. 빨리 춘절 행사장으로 가자는 것.
춘절 행사장이라는 말에 귀가 솔짓해진다. 명절을 지내기 위한 무슨 특별한 행사가 있다는 얘기일터이니 김삿갓의 귀가 벌렁거릴 수밖에.
주촌장 내외 역시 전통복차림으로 꾸미고 나서 밖으로 나선다. 주촌장이 직접 운전하는 경운기 위에 나를 포함해 여섯명이나 올라탔다. 조금 무리가 아니겠나 싶었지만 통통통통 발동기 소리를 내며 경운기는 잘도 달린다. 황토길을 달리다보니 풀풀 먼지가 일고 그 먼지들은 바람을 타고 코로 입으로 스며들 정도다. 아릿다운 모습으로 꾸며입은 두 딸이 안쓰럽기만 하다.
약한 시간을 달리다보니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나오고 벌써 수천 명 먀오족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경운기들의 주차장이 따로 설치해 있어 모두들 하차한 후 주(周) 촌장이 훈시를 한다.
주로 두 딸들에게 하는 얘기였다.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아무데나 섞이지 말고, 점심시간에는 꼭 어느 장소로 와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조카딸과 조카사위에게도 역시 마음대로 놀아도 되지만 점심시간과 장소를 잊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내가 먼저 주(周)촌장에게 물었다.
나도 이것저것 자유롭게 구경을 하다가 몇 시에 어디를 가면 되느냐고 하니까, 사람이 너무 많고 위험할 수도 있으니 혼자 다닐 생각은 말고 자기를 따르란다.
물론 약속을 했지만 나는 30분도 채 안되어서 주(周) 촌장 내외를 잃고 말았다. 주변의 이것저것을 구경하다가 그만 행방을 잃고만 것이다. 잠시동안은 갑자기 미아가 되어버린 느낌이었으나 곧 자유를 찾았다는 기분과 함께 평정을 되찾았다.
#어릴적 보았던 야바위꾼들의 등장
사람들이 점점 불어나 어림짐작으로도 1만 명 이상이 될 것 같은 북새통 속에 천지사방 모두가 구경거리들뿐이다.
한 쪽 옆에 사람들이 모여있어 비집고 들어가보니 야바위꾼에 정신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다. 야바위꾼들이 사용하는 것들은 다양한 것들이었고, 어린시절 장터에서 흔히 보았던 것들이어서 신기하기만 했다. 순진무구한 먀오족 농부들이 이들의 눈속임에 속아 주머니돈을 털리고 있었다.
또 한 쪽에는 동그렇게 새끼줄을 처 놓고 그 주변에 구름처럼 사람이 둘러서 있는데 그 안에서는 씨름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씨름할 때 허리에 차는 샅바(흰 천으로 만든 끈)도 없이 입은 복장 그대로 상대방의 허리부근을 잡고 한 판을 벌이는 것인데 마침 승자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흔들어대고 있었다. 사회자가 옆에 나서서 이 사람과 겨뤄볼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고 외친다. 동시에 두 세 명이 뛰어나오자 사회자가 임의대로 그 중 한 사람을 지목한다. 새로운 판이 벌어지자마자 도전자가 나뒹굴고 말았다.
다시 다음 도전자. 그리고 계속해서 네 명이 거듭 나섰지만 첫번째 승리자 앞에 모두 무릎을 꺾고 만다. 그러나 앳되게 보이는 다섯 번째 도전자에게 승자의 자리를 내놓고 퇴장, 또다시 새로운 꾼들이 이어지는데 세 명째까지 눕히고 그 역시 패자로 전락하고 만다.
이곳의 씨름경기란 이런 모양이다.
하루종일 붙고 또 붙고 하다가 한 번 패자가 되었어도 또 다른 승자에게 도전할 수 있고 이것은 春?3일간 계속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최종 승자는 어떻게 결정되는지 그것이 궁금했지만 마지막 날에 관전을 하지 못해서 끝을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의 풍습 가운데 가장 큰 볼거리는 소싸움판이다.
축주경기장 만큼 큰 공터에 관중은 한 쪽에만 구름처럼 모여있다. 중간에는 심판이 작은 깃발을 들고 신호를 보내는 모습이 보인다.
이 쪽 저 쪽에서 소 주인이 경기에 나설 소를 끌고 중간지점에 나서면 심판이 적당한 시간을 보아 경기시작을 주도하는데 시작과 함께 마주 달리며 뿔로 상대방을 겨냥하는 소들의 모습이 맹수들을 보는 느낌이다. 순간적으로 격돌하기는 했어도 갑자기 한 마리가 뒷걸음을 치더니 뒤돌아서 내빼기 시작한다. 그 도망가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저 멀리 허허벌판 쪽으로 달리고 있다. 소 주인은 도망가는 소를 따라 소리소리 지르며 뒤쫒는다.
승자가 된 소는 주인이 다가와 잔등을 쓰다듬어 주며 원위치로 돌아가는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예선경기로서 삼일째가 되는 날에는 1승을 거둔 소들끼리 리그전을 통해 1, 2, 3 등을 가리게 되며 상금도 만만찮은 액수라고 한다.
사진=김수남 |
널뛰기, 그네뛰기 등 부녀자들의 놀이판이 곳곳에서 흥분가도를 달리고 , 어린아이들은 어린아이들대로 뛰고 달리며 운동회를 방불케하는 사이사이 청춘남녀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데이트에 열을 올린다.
그런가 하면 곳곳에 임시천막으로 만들어진 간이 식당에는 하루종일 술꾼들이 모여들어 한 잔 술에 웃음판이 벌어진다.
그런가 하면 엄마를 잃어버린 미아들이 속출, 여기저기서 울음판이고, 혈기왕성한 청년들끼리 싸움판이 벌어져 피까지 흘려가며 난투극을 벌이기도 한다.
필자 역시 주(周) 촌장 내외를 잃어버린 처지로 점심까지 굶고 이곳저곳 구경하느라 정신없이 보내다가 해질녘이 되어서야 경운기 주차장을 찾아 나왔다.
이미 그곳에는 주(周) 촌장 부인과 두 딸, 그리고 조카가 기다리고 있다가 반기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주(周) 촌장과 조카사위가 나를 찾기 위해 어디론가 가버렸다고 하니 미안한 마음 감출길이 없다.
나 또한 다시 그들을 찾으려 떠나려는데 촌장부인이 극구 말리며 조금만 기다려보자고 한다. 한참 후에야 차례대로 나타난 두 사람이 나를 보자마자 화를 내기는커녕 반가워 죽겠다는 표정들이다.
다시 경운기를 타고 귀가길에 두 딸을 보니 기분들은 하늘 땅땅 최고조에 이른 것 같은데 아름답기만 하던 전통복장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다. 그래도 재잘재잘 즐겁기만한 그녀들을 보며 덩달아 마음이 흐뭇해진다.
처음 만났던 융쑤이 먀오족 촌에서의 장례식과 말 싸움, 그리고 핑탕현에서 함께 했던 빈곤한 먀오족 촌.
같은 먀오족이라해도 지역마다 풍습은 조금씩 달랐고, 경제적 형편 역시 많은 차이가 있었던 기억을 되살려 본다. 그러나 어느 지역에 있든지 그 화려한 전통복장과 순박한 민족의 정서들을 잊을 수가 없다. 최근에 읽은 모 기사를 통해 먀오족의 시조는 옛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하면서 중국으로 이민길에 올랐던 선조들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한다. 그들의 고유한 의상 중에 즐겨입는 주름치마며 가정에서 베틀에 앉아있는 여인들의 모습,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각종 놀이가 우리들 어린 시절의 놀이와 똑 같았다는 것 등 등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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