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성은 그 정상부인 태을봉(太乙峰)에 암반들을 활용하면서 세워졌다. 그 안내에는 둘레가 764m, 군지에는 976m로 각각 달리 기록돼 있다. 전체적으로 서남쪽으로 낮게 경사진 동서 타원형에 가까운 테뫼식 석성으로 북동이 높고 남서가 낮으나 현재 북쪽 상당 부분은 군시설로 접근이 불가하다.
성은 태을암으로부터 약 100m 위 지점에서 7, 8부 능선을 테를 두르듯이 외성을 돌렸다. 비록 외축은 대부분 붕괴됐지만 뒤채움석이 흙과 섞인 채 남은 부분에서 성의 자취가 발견된다. 그로부터 다시 약 칠팔십미터 정도 9부 능선상에 본격적으로 석축 원형(原型)의 일부가 남,동으로 둥그스럼하게 10여 단씩, 길이 이십미터 정도 확실히 잔존해 있다. 이 부분을 중심으로 정상부를 원형(圓形)으로 내성처럼 조성됐다. 내성은 잔존 석축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암반으로 구성된 가운데 부분적으로 흙속에 묻힌 뒤채움석들이나 보축부 석재들이 간간 남았고 외축은 거의 망실된 상태다. 내성 안은 비록 암반 위지만 상당히 넓고 평탄하여 장대지, 건물지 등 시설이 존재하기에 적합하다. 그 일부에 봉수터가 현존한다. 이 부분의 잔존 성벽은 40×25㎝ 정도로 잘 다듬어진 석재들을 바른층쌓기, 들여쌓기 기법으로 축성했다. 잔존 성벽 가운데 양호한 지점에 절단부가 있는데 아마 수구부 구실을 한 듯하다. 외성의 서-남-동벽은 모두 붕괴돼 삭토부 윤곽만 숲속에서 겨우 발견되는 정도이며 등산로 조성 등에 사용된 성돌들만 곳곳에 산재한다. 태을암쪽 진입로 안쪽 습기가 있는 곳에 고기록에 나타난 우물지가 있었음 직하다. 성벽은 암반지대에 설치됐고 서쪽 능선을 제외하고 사방의 경사가 심하며 사주 경계가 원활하여 상당히 깊숙이까지 뻘지대였던 서해 중심 방어거점으로서 이 산성의 임무는 막중했으리란 추측은 무리가 없으리라 추측된다.
환여승람(環輿勝覽)에 '고려 충렬왕13(1287)년 4면 절벽에 축조하고 안에 우물 두 개가 있었으나 모두 폐기됐다', '둘레 2042, 높이 10척 今廢'(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으로 보아 표면상 고려말 왜구 방어를 위해 축조됐다가 후일 평지성인 태안읍성이 그 임무를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내 시설로는 태을암쪽에서 오르는 능선 입구-서문, 정상부 동편 능선으로부터 내성 성벽 사이로 지그재그로 진입하는 동문, 북쪽 능선에서 내성으로 진입하는 곳의 북문 등이 문지로 추정되며 기타 동문지 옆 수구, 봉수대와 고대지 외에 추정 우물지 등을 찾을 수 있다.
태안문화원의 「태안의 석기문화」에 따르면 삼국시대 것으로 편년되는 회색 경질토기편들이 과거에 수습됐다 하는 바 이번 답사에서도 동문지 근처에서 황갈색 기와편들이 발견됐다. 태을암(太乙庵)의 마애삼존불상은 축조 시기가 6세기 무렵으로 추정되며 이곳이 백제시대 중국의 문물 도래지라는 점 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런 점들은 잔존 성벽의 모습들과 더불어 삼국 특히 백제시대로 이 성의 축조 시기를 추정 가능케 하며 후대 읍성의 조성 후까지 외적에 대비 활용됐던 것이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서산마애삼존불처럼 여전히 후덕하고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코와 일부는 여러 가지 헛된 속설에 넘어간 사람들에 의해 파손되거나 떼어져 버려 곰보부처님 같기도 하고 한센 병환자 모습이 돼 버렸지만 백제불의 속성과 마음만은 오랜 시간 속에서도 잃지 않았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간절한 염원도 표현됐을 것이다. 연화대를 밟고 선 통통한 몸에 늘어진 승복의 곡선이 부드럽다. 여늬 마애불들과는 달리 두 주불이 좌우에서 지키듯 작은 관음보살을 가운데에 두고 감싼 모습이 참 다정하고 자애롭다. 중국쪽으로부터 들여왔지만 우리만의 독특한 모습으로 재창조해 냈다는 백제인들의 예술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을 위해 조성했다느니 하는 말들은 귀담아 듣지 않아도 될 듯하다. 변덕스런 인간들이 구실을 달아 각종 시설물을 설치했다 부수고 다시 고친 흔적들은 오히려 부스럼 같다. 때로는 그저 자연스레 비바람을 맞으며 사계절 햇빛과 어울린 천연덕스런 그 모습들을 왜 가만 두지 못하는가. 삼불이 동쪽으로 향한 뜻은 무엇이며 석굴암 불상처럼 아침 햇살에 비칠 불그레한 얼굴 속 미소가 궁금하다. 불상 옆 감로수에 백화산 성지기들도 마른 목을 축이고 갔으리라.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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