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나 치료될 수 없는, 그래서 평생 고생하는 병이 고질병입니다. 그런데 '고질병'이라고 하면 참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사전적인 의미의 '고질병'은 '오랫동안 앓고 있어 고치기 어려운 병'이라고 합니다. 우선 앓고 있다는 것이 '아프다'는 것을 뜻하고, 또 고치기 어려우니 '평생 안고 살아야 함'을 의미하니 정말 부정적이고 좋지 않은 질환이 바로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게 이 고질병이 몇 개 있습니다. 먼저 독일 유학시절 얻게 된 알레르기성 비염이 그렇습니다. 이 알레르기성 비염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온 후 1년도 되지 않아 정말 거짓말 같이 나았지만, 그래도 가끔 비염 증상이 나타나곤 하는 그런 고질병입니다. 대부분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분은 꽃이 피기 시작하는 봄철부터 초여름까지 이 비염으로 고생하곤 합니다. 그런데 내 경우 이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일 년 내내 고생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공기 좋고 한적한 곳으로 이사를 오면서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래도 봄철이 되면 증상이 나타나고, 특히 아침에는 기침과 콧물로 고생하고 때때로 눈도 충혈 되고 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고질병으로 일종의 중독 증상이 있습니다. 흔히 '일 중독'이라고 하는 '워크홀릭'(workholic)이 또 다른 고질병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일 중독'을 고질병이라고 하기는 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던 평소 그냥 일이 없으면 이상하기도 하고 약간의 불안감도 느끼는 그런 병입니다.
이 병의 증상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부랴부랴 서둘러 연구실로 출근하는 증상부터 시작됩니다. 이 증상은 점점 심해져서 요즘은 7시 전에 연구실에 도착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출근해서는 가장 먼저 컴퓨터를 켜고, 컴퓨터가 부팅하는 동안 커피를 내리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합니다. 매일 무슨 일이 그리도 많은지 단 하루도 그냥 일이 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경우는 정말 거의 없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모르겠지만, 매일 매일 할 일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마무리 했다 싶으면 다른 일이 생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아침 일찍 출근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할 일이 없다면 아마도 의미 없는 출근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무료한 아침 시간을 보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내게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을 하는 것들을 보면, 사실 자발적으로 어떤 일을 찾아서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누구의 부탁으로, 누구의 의뢰에 의해서, 그리고 원고 청탁 등등 내가 하는 거의 모든 일이 자발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솔직히 고백하면, 학자로, 또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연구자로 그 동안 꽤 많은 연구논문을 발표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논문들 역시 자발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것이 아니라, 학회의 부탁이나 원고청탁을 받고 연구하고 발표한 것이 대부분입니다. 물론 내 전공과 일치하지 않거나, 할 수 없는 것은 정중히 거절했지만, 그 동안 발표한 연구논문은 대부분 그렇게 연구된 것들입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연구한 결과물을 곰곰 따져보면 전공과 관련된 영역의 연구결과물이 아닌 정책연구 등과 같은 것은 대부분 연구비를 지급받고 수행한 결과물입니다. 그러니 이런 정책연구의 결과물도 엄격히 따져보면 자발적인 연구가 아니라 연구비를 받고 연구한 결과물이기 때문에 순수한 '자발적 결과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행태를 곰곰 생각해 보면, 학자로서의 연구조차도 생계형, 습관형, 복합형 등등 뭐 이런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정말 하고 싶은 연구를 찾아서 스스로의 계획에 따라서 연구하고 고민했다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낮은 우리 대학의 보수를 보전하기 위해 부탁받는 거의 모든 것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과거 해외파견과 연구년을 다녀 온 후 일정 기간 동안 연구와 원고 등에 대한 부탁과 청탁이 이상하게도 줄어든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를 생각해 보면 갑자기 일이 줄어드는 것이 전혀 익숙하지 않고 또 약간 이상하기도 하면서 일종의 불안감이 들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일종의 존재감이 상실된 느낌과 같은 그런 것입니다. 이런 기억 때문인지 그 후 누가 내게 일을 부탁하거나 원고청탁 등을 해오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종의 의무감이 들기도 합니다. 이것은 아직까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도 하지만, 또 반드시 해야만 할 것 같은 그런 의무감입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이런 것들이 모두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일종의 자기만족, 자기 합리화, 그리고 심지어는 자가당착적 증상을 나타내는 고질병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고질병을 고쳐야 하고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할 일이 없다'는 것으로부터 오는 존재감 및 자존감의 상실이 크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런 고질병에서 벗어나 치료나 치유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고질병'으로 인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주위에 보면 나와 같은 '일 중독' 고질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얼마 전까지 같이 근무했던 우리 대학 도서관의 윤팀장님도 그런 분 중에 한분입니다. 본인은 결코 아니라고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분명 심각한 고질병을 앓고 계신 분입니다. 매일 매일 쏟아지는 일을 그날 바로 처리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소위 '학대'하는 그런 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새로운 종류의 일이 쏟아져 쌓이는 것은 비록 아니지만,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일을 바로 바로 처리하지 않으면 쌓이는 꼴을 보지 못하니 말입니다. 일상의 일을 차일피일 미루고 안하는 것도 일종의 병이지만, 일이 쌓이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도 병입니다. 일종의 일에 대한 유연성을 가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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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런 고질병은 어쩌면 반드시 치료하고 치유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리 현재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할지라도 의술이 발달하면 언젠가는 고칠 수 있고 완치가 가능한 병일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일 중독'과 같은 고질병은 결국 마음먹기에 따라 치료나 치유가 될 수 있는 소위 '의지'에 달려 있는 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따라서 내 스스로 고질병이라고 여기고 아직 고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아마도 마음속에서 고치려고 하는 생각이 없기 때문일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이 고질병을 즐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듭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건 고질병이 아니라 정신적 장애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가을이 깊어 이제 겨울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 주말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혹시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습관 같은 것이 내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려고 하는 고질병은 아닌가 한 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고질병을 고치고 치유하는 것이 또 다른 삶의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점을 한번쯤은 염두에 두고 말입니다.
이번 주말에는 가을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스스로 치유하고 치료할 수 있는 마음속의 고질병은 없는 지 돌아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보심은 어떨까요?
대전대학교 정치외교학과
박광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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