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소설] 아웃터넷(OUTERNET) 46. 후루마쓰 노트

[최민호 소설] 아웃터넷(OUTERNET) 46. 후루마쓰 노트

  • 승인 2017-11-10 00:00
  • 김의화 기자김의화 기자
나리코는 다시 일본을 찾은 순원을 진심으로 반갑게 맞았다. 후루마쓰도 절제하면서도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순원은 나리코 및 후루마쓰씨와 함께 저녁식탁에 마주 앉았다. 나리코는 어디선가 김치를 구해 상에 놓았다. 순원에 대한 배려가 가슴에 살며시 스며왔다.

순원이 말했다.

"지난 번 네덜란드로 떠날 때 후루마쓰 선생님께서 주신 편지는 잘 읽었습니다.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습니다만, 라이덴 연구소에서 여러 연구를 접하다 보니 선생님의 말씀이 조금씩 이해가 갔습니다. 정말로 식물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예를 들어 멀리 떨어져 있는 주인의 심리를 알 수 있다든가, 아니면 자기에게 다가오는 존재가 이로운지 해로운지 알 수 있다든가 하는 말씀말입니다."



후루마쓰는 나리코가 전해 주는 말을 듣고도 식사에만 열중할 뿐 대답이 없었다. 머쓱해 하는 순원을 향해 나리코가 말했다.?

"식사하고 직접 경험해 보시죠."

"예?"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은 후루마쓰의 연구실로 향했다. 가을도 늦가을이라 밖에는 어둠이 짙었다. 순원은 다시 한번 연구실을 둘러보았다.

여러 가지 계측기같이 생긴 기계들이 연구실의 벽에 연이어 놓여져 있었다. 상표도 없고, 여기저기서 부품을 구해 조립한 시설인 듯 조잡해 보였다. 모든 기계에는 코드나 케이블이 줄줄이 달려 있었다. 식물과의 연결코드였다.

"순원씨 미안해요, 실례합니다."

나리코는 상냥하게 양해를 구하고서는 연구실로 들어 온 순원의 머리에 둥그렇게 코드단자들을 부착하기 시작했다. 뇌파검사 때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였다. 그리고 단자들을 모니터에 연결했다.

나리코는 그 장치를 감성뇌파전환기(COFW)라고 설명했다.

사람의 감정이 뇌파의 파장형식으로 모니터에 나타나게 하는 기계였다.

후루마쓰의 작품이었다.

먕성
"먼저 명상을 하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세요."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온갖 상념들이 순원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 끊임없이 밀려닥치는 궁금증, 낯설음, 어색함, 초조함 등 이런 감정들이 뒤섞여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나리코가 모니터의 스위치를 켰다. 모니터에 순원의 마음이 파장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파장에는 규칙성이 없었다. 한줄기 파장이 불규칙적인 파동을 그리며 모니터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는 순원을 보고 있던 후루마쓰가 조용히 순원에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순원의 두 손을 잡았다. 그리고 눈을 감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순원은 눈을 감았다. 후루마쓰도 가부좌를 틀고 눈을 감더니 조용히 명상 상태로 들어갔다.

순원은 후루마쓰의 손을 통해 따뜻한 기운이 들어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원은 마음의 평정이 이루어지는 느낌이었다. 모니터 속의 뇌파는 순원의 마음을 닮아가는지 일직선으로 반듯이 펴지면서 일정한 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연상과 집중이 중요합니다. 먼저 아까 저녁식사가 어땠는지 연상해 보세요. 맛있었나요? 맛있었으면 '맛있었다'는 감정에 몰입하세요."

모니터 상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시종 일정하게 한 방향으로 흐르던 뇌파가 파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동은 일정한 형태를 반복하며 계속됐다. 나리코가 재빨리 기계의 자판에 있는 스위치를 클릭했다. 뇌파의 기록을 기억시키는 스위치였다. 그리고 영문자판을 두드렸다.

'맛있다'라는 말을 영어로 입력했다.

나리코는 순원에게 다시 속삭이듯 말했다.

"'기쁘다'라고 연상하고 스스로를 기쁜 마음 상태로 몰입하세요."

뇌파는 이윽고 일정한 형태의 다른 곡선을 그리면서 반복하며 흘렀다. '기쁘다'라고 말로만 중얼거려서는 안 된다. 실제로 마음이 기쁜 상태로 감정이입을 해야 했다. 그래야만 뇌파가 반응을 하는 것이다. 나리코는 먼저와 똑같이 스위치를 클릭하며 영문자판으로 입력했다.

다시 나리코는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순간 순원은 당황스러웠다. 이런 감정에 어떻게 몰두할 수 있는가. 모니터 상에 순원이 마음이 그려졌다. 모니터의 곡선은 한동안 헤매었다.

여러 가지로 사랑의 감정을 잡으려고 시도하다가 순원은 나리코를 떠올렸다. 가슴이 두근거리며 마음이 부끄럽기도 하고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가슴이 아련해지는 복잡한 감정의 기복이 일어났다.?

헤매던 모니터의 웨이브가 신통하게도 일정한 파동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곡선이었다. 사랑의 물결은 저런 것인가. 순원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리코의 주문은 계속되었다.

'즐겁다', '화가 난다', '그립다', '밉다' 등등 주로 형용사적인 표현이었다.

한참동안 그러한 작업을 계속한 뒤 나리코가 말했다.

"수고하였어요. 너무너무 기뻐요. 감사합니다, 순원씨."

그러면서 아버지를 쳐다보며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려 보이면서 무언가 수화로 말을 건넸다. 그의 표정이 환하게 빛났다.

나리코가 입을 열었다.

"사실 이 작업은 그동안 아버지와 수없이 해오던 것이었습니다. 저와 번갈아 감성뇌파전환기에 우리의 감정을 입력시켰지요. 놀랍게도 결과는 일치했습니다. 예컨대 아버지의 슬픈 감정이 모니터에서 그려내는 웨이브와 저의 그것은 파동곡선이 같았습니다. 대체로 다른 감정 모두가 그랬습니다. 감정은 말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말이 없으면 감정에 몰두하는, 쉽게 말해 감정 몰입이 어렵습니다. 즉, 어휘가 감정과 상상을 구속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말은 나라마다 민족마다 다릅니다. 말은 다르지만 그 말이 의미하는 감정이 같다면 모니터 상에 나타나는 파장은 동일하지 않을까하는 가정을 해왔습니다마는 오늘 증명이 된 것입니다."

나리코는 이 대목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순원을 응시하는 나리코의 눈은 밤하늘의 별처럼 초롱초롱 빛났다.

"잠시 전의 얘기로 돌아가서 일본어로 '아이스루(사랑한다)'라는 말을 되 뇌이며 뇌파를 검사하면 바로 순원씨가 아까 '사랑한다'는 말의 감정에서 그려내는 웨이브와 같더라는 말입니다.

앞으로 다른 언어권에 있는 사람들과 이 실험을 계속해 비교할 생각이지만 저는 확신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그려내는 뇌파는 인간이라면 인종이든 문화든 무엇이든 초월해서 누구라도 동일할 것이라고….

인간은 어떤 종류의 감정에서 나오는 파장이든 감정이 같으면 파장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보세요."

그러면서 나리코는 옆의 기계로 자리를 옮겼다.

뇌파감성전환기와 케이블로 연결되어 있었다. 감성뇌파전환메모리라고 쓰여 있었다.

메모리기계를 켜고 작동을 하자 일련번호가 붙어 있는 수많은 단어가 영어로 씌어 있고 각각의 단어마다 파동곡선이 마치 단어장의 해설문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방금 끝낸 순원의 감정 표현어들이 맨 마지막에 그려져 있었다.

한국어의 'saranghanda(사랑한다)'와 일본어의 'aisuru(사랑한다)'는 그 곡선이 분명히 같은 패턴을 그리고 있었다. '기쁘다' '슬프다'도 마찬가지였다.

놀라운 일 아닌가?

순원은 왜 이들은 이런 실험을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듯 나리코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이 작업은 저희들에게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지요. 왜냐하면 인간의 감정곡선과 식물의 감정곡선을 일치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다음 나리코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무언가 말을 건넸다. 잠시 뒤 나리코는 순원에게 다가와 살며시 소매를 끌었다. 나리코가 안내한 곳은 연구실 안의 벽을 따라 늘어선 서가 쪽이었다. 그녀는 서가의 한쪽 끝을 밀어냈다. 서가가 양쪽으로 스르르 열렸다. 또 하나의 문이 그곳에 있었다.

그곳을 연구실이라 해야 하는가. 온실, 아니다. 실험실, 상황실?

별실은 후루마쓰의 연구실보다 3배는 넓어 보였다. 거기에는 꽃과 나무를 심은 많은 화분들이 질서정연하게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모두 126본입니다. 개수는 큰 의미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좋아하는 9자의 숫자일 뿐. 하지만 아버지가 수십 차례 실험하여 엄선한 식물들입니다."

테이블 위의 식물들은 한결같이 잎, 줄기, 꽃 등에 뇌파단자 같은 코드를 달고 있었고 앞에는 모니터가 반듯이 놓여 있었다. 지진측정기처럼 모니터는 프린터와 연결돼 있어 언제든 모니터에 나타나는 파장을 인쇄할 수 있었다.

바로 플라워텔레스코프였다. 126대의 플라워텔레스코프가 각각의 모니터에 각 식물의 파장을 기록하고 있었다.

"플라워텔레스코프군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시더니…."

순원은 가슴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했다. 나리코가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렇습니다. 사실 저희들은 플라워텔레스코프라는 기계는 어느 정도 완성을 보았습니다. 정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한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플라워텔레스코프의 완성에 연구의 목적을 두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를 통해 식물의 의사를 알고자 했던 것이 궁극의 목적이셨습니다. 이러한 실험실을 갖춘 것도 사실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매일 매일이 경이의 세계라고 하십니다."

"실험들에 대한 분석결과는 있습니까?"

나리코는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았어요. 순원씨에게 만은 보여주어도 된다고요."

그러면서 실험실 구석에 있는 책상으로 가서 열쇠로 서랍을 열더니, 얇은 노트 한권을 가지고 왔다.

"한 번 읽어 보세요. 쉽진 않지만, 제가 도와드리지요."

'후루마쓰 노트.'

겉장에는 단지 그렇게만 씌어 있었다.

순원에게 이제까지의 세상은 세상이 아니었다.

해와 달이 있고, 낮과 밤이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는 세상, 그런 곳이 이 세상이거니 믿어왔었다.

그렇지만 지금 순원에게 세상은 두 종류로 나뉘어 보이기 시작했다.

식물이 있는 세상. 그리고 없는 세상.

순원은 어안이 벙벙했지만, 후루마쓰 부녀가 이룩하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놀라운 혁명의 내용이 몹시도 궁금했다.

(계속)

우보 최민호

최민호컷1
최민호 전 충남도 행정부지사는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도시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 행자부 인사실장,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200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사무차장(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배재대학교 석좌교수, 공주대 객원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국회의장 직속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위원(2016)으로 활동했으며 현)홍익대 초빙교수이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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