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0년 나당군의 백제 공격 시 산동에서 출발한 당의 수군도 이 앞을 지났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기록은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 때 삼별초군의 이동도 여기를 거쳤고, 조선시대 삼남의 세곡선, 조운선들이 대부분 이 해안지역을 경유했다. 6.25 때 인천상륙작전의 함선들도 앞바다를 지났다. 남쪽으로부터 연안을 따라 개경이나 한양으로 향하는 옛 수로는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요로였던 반면에 가장 험난한 항로였다.
이렇게 경제나 군사적인 중요성으로 인해 조선시대에는 대산포에도 진(鎭)을 설치했으며 태안읍성 외에 소근진이나 안흥진 등에 진성을 축조했다. 이곳 해안은 지리적으로 현재 상당부분 간척과 개발에 따라 육지화됐지만 고지도를 보면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깊숙한 곳까지 작은 섬들과 넓은 뻘지대가 전개된 리아스식 해안, 곳곳의 많은 포구들이 형성돼 있었다.
그리고 3~8m의 조수 간만 차, 도서에 부딪치는 억센 조류는 물론 계절적 기후변화가 심한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병선이나 후대 조운선들처럼 연안 항로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작은 배들로는 여간 어려운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심지어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리기도 했다.
황해도 임당수, 강화 손돌목, 목포 앞 울돌목 등과 더불어 4대 험저처(險저處) 중 하나로 꼽히던 곳이다. 또한 여말선초 무렵부터 왜구의 출몰로 인한 피해가 막심했다. 그런 관계로 지역에는 크고 작은 관방시설 즉 성이나 봉수 등이 해안 도처에 많이 설치됐다. 그 결과 해안가에 십오륙 기의 성곽들이 설치됐던 것으로 파악됐다(태안군지). 「문화유적분포지도」에 따르면 확실히 파악되는 삼국시대 성은 2, 나머지는 미상이거나 고려나 조선시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고지도를 통해 본 태안/중앙박물관 |
그러나 그보다는 대내적인 투쟁기였던 삼국시대는 이 지역이 투쟁지로부터 멀었다는 점에서 삼국시대에는 성의 축조가 중요성에 비해 적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기존의 시설들을 후대에 개보수하여 사용함으로써 삼국 당시의 자취가 없어진 것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후에 왜구의 출몰이 극심해져 이를 막기 위해 고려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해안가에 읍성이나 진성(해안성) 등을 중심으로 관방시설들을 곳곳에 설치했다. 백화산성, 태안읍성(조선 태종때 1416. 동국여지지), 소근진성(所斤鎭城 중종19. 1504.신증동국여지승람), 안흥진성(安興鎭城 효종6. 1655.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관방시설들은 주변 수로의 중요성으로 미뤄볼 때 그 이전 시대에도 어떤 형태로든 방어시설들은 구축돼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왜구들의 준동이 잦았던 고려 이후에야 비로소 더 많은 봉수와 해안성들이 축조돼 본격적으로 해안 방어임무를 수행했으며 그 배후의 읍성들은 행정치소로서의 구실까지 겸해 수행했다. 그런 시설들은 관방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조운선 보호나 물자 수송 등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그 예로 최근 발굴된 조선 조곡 운반선 마도선들이 그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조선 태조-세조 연간 약 60년에 무려 200여 척의 조운선이 난파돼 곡식 15000석, 인명 1200여 명이 희생됐다고 한다. 더욱이 난지도 앞 가로림만 일대 안흥 앞의 거친 항로 조건들도 많은 봉수와 해안성들의 필요성을 더욱 증대시켰다. 그 천험한 수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 때부터 조선말 경까지 천수만과 가로림만을 연결하는 내륙운하 건설을 6,7차례나 시도했지만 암반지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현재 팔봉 진장리-어송리 굴포에 그 흔적이 남았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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