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인환 |
#맘씨 좋은 멋장이 국장
문산주(文山州) 정부 여유국 란국장(旅游局 ?局?)은 50대의 중후한 신사였다.
내가 그의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이 임박할 때였다.
더듬거리는 중국어와 필답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는 가운데 그는 진지하게 내 얘기를 경청해 주었다.
그리고 나를 안내해 가까운 호텔에 방을 잡아주었다. 프론트에서 등기를 하고 요금을 선불하려는데 1박에 180元인 호텔비가 그의 한 마디로 80元이 되어 있었다. 공무원의 입김이 센 나라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호텔비가 50%이상이나 할인시키는 저력(?力)에 놀랄 수 밖에.
방에 짐만 내려놓고 바로 내려오라며 로비에서 기다리겠다는 ?局?의 얘기대로 피곤한 몸이지만 따르기로 했다.
그가 안내한 식당은 이 고장의 특미로 알려진 당나귀 고기집이었다. 한국에선 말로만 듣던 말고기 요리다. 수육으로 큰 접시에 가득 담겨온 당나귀 고기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다. 탁자 위에는 각종 야채와 곁들인 당나귀 탕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 고기보다 먼저 숟가락으로 탕을 떠먹어 본다.
구수하다. 야채부터 건져먹다가 술이 몇 잔 돌면서 자연스럽게 고기도 한 점 두 점 먹기 시작햇다. 말고기라는 생각을 술기운으로 지워버리며 먹다보니 제법 입맛이 당긴다.
하기야 쇠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개고기도 먹는 판에 말고기인들 못먹으랴.
?局?은 참 재밌는 사람이다. 말이 공무원이지 집안에 재산이 넉넉해서 시간만 나면 외국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한국엔 한 번도 못 가보고 한국사람만 만나게 되었다며 너털웃음이다. 술기운이 차 오르자 남자들만의 주석(酒床)대화가 터져 나온다. 소련에 갔을 때 소련여자는 어떻고, 일본에 갔을 때,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 등등 그가 다닌 곳마다 단순한 여행인지, 여자탐색 여행인지 모를 얘기들이 농도가 짙어진다.
사진=김인환 |
그러나 재미는 있다. 그리고 생전 처음 만난 나에게 10년지기나 되는 듯 쉽게 마음을 열고 대해주는 그의 마음씨가 고맙기만 하다.
어지간해서 비틀거리지 않던 내가 이날 조금 과했나보다. 우리 둘은 서로가 서로를 부축하며 호텔로 돌아왔고, 그와 어떻게 헤어졌는지 기억이 없다.
눈을 떠보니 옷을 입은 채로 침대 위에 쓰러져 그대로 잠이 들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출근할 무렵 다시 사무실을 찾았다.
엊저녁에 엄청 취한 줄 알았는데 보기에도 말짱한 란국장.
이제 곧 묘족자치현 문산진 부진장(苗族自治? 文山? 副??)이 나를 데리러 올 것이라며 차를 권한다. 그리고 묘족에 대해 사전 설명을 통해 이해를 더해 준다.
중국 전역에 苗族이 흩어져 살고 있지만, 이곳 운남성과 귀주성 그리고 광서 등지에 가장 많이 있는데 전체 인구는 740여만 명 정도라고.
같은 묘족(苗族)이라해도 16개 분파가 있으며, 대부분이 농사가 주업이고 苗族의 고유 언어를 갖고 있다고 했다.
여성들의 의복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전통의복 종류가 100 종이 넘을 만큼 복장문화가 발달한 민족이라는 것도 귀띔해준다.
또 한가지, 먀오족 여성들은 성문제에 관한 한 무척 개방적이므로 각별히 주의를 하던가, 아니면 눈 맞는 여인을 하나 선택하던가…하면서 농담을 즐기며 여유를 부린다. 그러나 이미 귀주나 광서에서 만난 苗族에 대한 경험이 있으므로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광서(?西)에서는 두 번이나 여인들의 공세에 혼이 났었고, 귀주(?州)에선 아예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과부가 있었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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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국장과 차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고 있는데 누군가가 얼굴 전체에 가득 웃음꽃을 피우며 들어선다.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 사나이는 국방색 바지에 상의를 입고 있어 얼핏 보아서는 군인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했다. 란국장이 반기며 악수를 나누더니 나를 소개한다.
"이 분이 바로 한국에서 온 작가선생님이신데 잘 부탁하네."
"아, 그렇습니까? 나는 성이 가(加)입니다. 반갑습니다." 내미는 손이 우악스럽다. 어느새 눈이 내리고 있었나보다. 가(加)의 상의엔 녹다만 눈송이들이 조금씩 묻어 있다. 문산진의 부진장이라는 가(加)는 갈 길이 머니 서둘러 나가자며 일어선다.
란국장은 내 손을 잡으며 의미있는 웃음을 보낸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꼭 다시 만났으면 좋겠다고 당부까지 한다. 만난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치 십년지기나 되는 양 깊은 정을 보여주는 란국장이 고맙기만 하다.
밖으로 나오자 희끗희끗 눈발이 섞인 회오리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다.
가 부진장이 몰고온 자가용은 이미 폐차시간을 넘긴 고물 승용차였다.
달릴 때마다 문들이 덜커덕거린다. 세차도 않은 차여서 겉모양부터가 구질구질함 그 자체다.
10분 쯤 아스팔트길을 달리자 다음부터는 벌판으로 이어진다. 자갈밭에 황톳길이다. 갑자기 날씨가 변덕을 부리며 바람이 멎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또 다시 한 시간 쯤 달리고나자 날은 맑게 개였고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붉은 색 뿐이다. 길도 붉은 황토길, 양쪽으로 보이는 나즈막한 산등성이들도 나무는 보이지 않고 붉은 흙들을 쌓아놓은 듯 황토빛 뿐이다.
이상하다 못해 신기할 정도다.
란국장의 사무실에서부터 처리하지 못한 소변이 급해졌다. 가 부진장에게 잠깐 차를 세우자고 하니까 길 옆으로 세워 준다. 오는 쪽 가는 쪽 모두 사람도 차도 보이질 않아서 맘놓고 바지 지퍼를 끌어내렸다. 언제 나왔는지 가 부진장도 옆에서 나와 같은 동작이다. 그 역시 소변이 급했었던 모양으로 철철 소리까지 내며 소변줄기를 내 뿜는다. 그리고 나를 보며 씩 웃는 얼굴이 꼭 장난꾸러기 소년이다.
소변을 보면서도 황토 흙더미에 떨어지는 오줌줄기에 풀풀 피어나듯 튀어오르는 황토가루에 눈이 간다. 다시 차에 오르면서도 보이는 것들은 바람에 날려온 황토 흙먼지들 뿐이었다.
그러고보니 내 얼굴에도 손이 닿자마자 붉은 색이 묻어난다.
내가 피란 내려와 소년기를 보냈던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동 498번지 일명 모래내란 마을은 온통 모래뿐인 지대여서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그렇다면 이곳은 황토부락이라고 불러야 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사진=김인환 |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직원들 너덧 명이 사무실 한 쪽에 모닥불을 피우고 노닥거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부진장이 나를 소개하자 모두들 박수를 치며 환영의 뜻을 보내왔다. 진장은 공석이고 현재는 부진장이 대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사무실 안에서 난롯불도 아니고 모닥불이라니! 잠시 후 부진장이 나를 데리고 2층의 사무실 두 곳, 그리고 1층의 사무실들을 보여 준다. 전체 직원이 어림잡아 30여 명에 불과하다. 5층이 아니라 1층 절반만으로도 널찍널찍한 사무공간이 가능할 듯하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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