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간의 꿀 같은 정기휴가를 내고 오색 단풍에 취해 산을 오르고 올랐다. 선크림은 물론 로션 하나 바르지 않고 맨 얼굴로 원시인마냥 걷고 또 걸었다. 저녁이 되면 온 몸은 천근만근 물 먹은 솜뭉치가 되어 쓰러져 자곤 하지만 아침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말짱했다. 그게 여행이다. 인간은 놀이하는 동물이라고 어느 인문학자는 통찰력있는 이론을 내놓았다. 놀고 먹고 자고, 이 단순한 명제가 나의 정체성을 확연하게 증명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김밥 사들고 산속에 들어갔다가 오후 늦게 내려오는지라 기름진 음식이 마구 당겼다. 여행 중에는 하루 한 끼만 배부르게 먹는 게 철칙인데 워낙 빡세게 움직이다 보니 에너지가 고갈될 지경이었다.
뭐에 홀린 듯이 서둘러 내린 춘양은 고소한 들깨 냄새가 진동했다. 들판 여기저기 베어진 들깻단이 무더기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한층 누그러진 햇살이 따사로워 길가에 주저앉아 담배라도 피워 물고 싶은 허기가 몰려왔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즉에 담배를 배워두는 건데. 멀리 산 아래 집 굴뚝에서 뽀얀 연기가 피어 오른다. 식욕이 동했다. 춘양은 시골 면소재지 치고는 집들이 널찍하고 우아했다. 어느 집 정원의 늙은 느티나무, 모과나무가 그 집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한때 번성했던 한 가문의 영락이 고스란히 느껴져 발걸음을 멈추고 담장 틈새로 안을 기웃거렸다. 잡풀이 무성한 걸 보니 나이 지긋한 어른들만 사는 모양이다. '춘양'이라는 고혹적인 이름이 새삼스럽지 않다.
뒤를 돌아보니 기차에서 같이 내린 할머니가 가방을 들고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짐을 들어드린다 해도 꿋꿋이 사양하며 여긴 무슨 일로 왔냐고 물었다. 기차타고 지나다가 춘양이란 이름이 이뻐 내렸다고 하니까 별 싱거운 사람 다 보겠다는 듯이 웃었다. 무릎이 아파 삼척 가서 한약을 지어온다고 했다. 거기에 용하다는 한의원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아침 일찍 갔다가 이제 오는 길이란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다. 배가 고파 우선 뭘 먹어야 할 것 같았다. "이 길 따라 조금만 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으면 용궁반점이라는 중국집이 나와. 외지인들이 종종 오더라고. 여기 사람들도 많이 먹어."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시주하고 인당수에 몸을 던져 간 곳이 용궁 아니던가. 춘향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춘양에 용궁도 있고, 하여간 춘양은 까도까도 자꾸 나오는 양파 같은 곳일까. 밥 때가 아니어서인지 용궁은 적요했다. 세 여인이 나를 반겼다. 할머니 한 분과 중년의 여자 둘. 짜장면을 시키고 식당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어라? 재담꾼 성석제도 다녀갔네. 그가 먹고 중앙 일간지에 쓴 에세이가 인쇄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계란 프라이를 처억 얹은 간짜장이 나왔다. 아, 이 냄새! 입 안에 침이 고인다. 아이 어른 할 거 없이 누구나 다 좋아하는 짜장면. 소스를 듬뿍 넣고 썩썩 섞어 볼이 미어터져라 입에 욱여 넣었다. 내 옆에서 할머니도, 짜장면을 만들었던 할머니의 딸도 짜장면을 먹었다. 또다른 여인은 할머니 딸의 시누이다. 그들과 내가 한 가족처럼 짜장면을 먹었다.
"분천에 산타마을이 생겨서 사람들이 이젠 여긴 안 와. 춘양이 예전엔 장도 크게 서고, 춘양목 들어봤지? 여기 소나무가 유명했거든. 큰 목재소도 있었고…." 쇠락해 가는 마을과 사람들은 왜 매혹을 발하는가. 내가 짜장면을 다 먹은 걸 보고 그 딸이 "밥 있는데 줄까?"하길래 사양했다. 짜장면은 온전히 짜장면으로 끝나야 한다. 딸의 시누이가 진한 믹스커피 한 잔을 타 줬다. 커피를 홀짝이며 봉화 사과가 엄청 맛있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니까 딸이 옆집에서 줬다며 사과 세 알을 봉지에 담아 줬다. 시커먼 하늘에 뜬 고양이 눈 같은 손톱달을 의지하며 버스를 타고 봉화 읍내로 갔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다음엔 나른한 봄볕이 쏟아지는 춘양에서 세 여인과 짜장면을 먹어야겠다.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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