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인환 |
뚜산에 위치한 소수민족 마오난(毛南)족 자치향 정부를 다시 방문한 것은 이런 일이 있은지 3개월 후의 일이다.
그 사이 여러 차례 전화 접촉을 시도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바쁘다는 이유를 대며 전화를 끊어버리는 향장이었다.
귀주성 정부에서 연결시켜 주었고, 그의 고급 상관이 일부러 전화까지 했는데도 나를 기피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또 다른 힘을 빌리기로 했다.
평탕현에는 이미 의형제를 맺은 모기주란 아우가 있었다. 그는 전직이 공무원으로서 내가 올 적마다 안방을 내 줄 정도로 극진히 대해 주는 아우였다. 나는 그에게 독산에서의 일을 얘기하는 한편 평탕현 공안국에 혹시 아는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다. 모는 공안국 정보과장이 소학교 동창이라며 즉시 소개를 시켜주었다. 사람 좋게 생긴 정보과장은 내 얘기를 듣더니 관할 파출소 소장을 전화로 불러 이러 이러한 한국인이 가면 직접 향장에게 안내를 해 드리라고 지시를 했다.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역시 꽌시(關係)가 잘 먹혀들어가는 나라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다시 독산 모남족 자치향 정부 정문 앞에 있는 파출소를 찾아갔고, 3개월 전에 내게 먼저 와서 말을 걸던 파출소 소장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는 상관으로부터 예상치 못했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인지 무척 정중하게 대해 주었다.
이미 향장에게 외출할 일이 있어도 기다리도록 얘기를 해놓았다면서 벗어 두었던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서 옷매무시를 매만졌다. 공무집행에 임하려는 공직자의 자세를 새삼 느끼게 했다. 이렇게 해서 파출소 소장과 함께 향장실로 들어섰다. 낯익은 비서 아가씨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하는 기색이다.
향장은 자리에 앉았다가 우리들을 맞이한다. 딱 한 번 내게 눈길을 준 후 나를 쳐다보는 일이 없는 향장.
파출소 소장은 비서가 갖다 주는 차 한 잔을 다 마시고는 바쁘다며 일어선다. 내게 의미 있는 미소를 던지고는 내 어깨를 툭 쳐 보인다. 아마 잘 해보라는 뜻이려니.
소장이 나가자 둘만 남은 사무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내가 먼저 입을 여는 수밖에.
"이런 식으로 당신을 만나게 돼서 미안하다."
"…….."
"섭섭했다면 풀어라. 거듭 말하지만 미안하다."
"……."
"나는 한국에서 왔다. 지금 소수민족들을 만나고 다닌다. 그 이유는 너희들의 아름다운 풍습, 습관 그리고 독특한 문화 예술을 직접 보고 글로 써서 한국인들에게 소개를 하기 위해서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많은 한국인들이 관광차 중국에 오게 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
한마디도 대답 없이 멀거니 나를 바라보는 그 앞에서 이런 모양으로 나 혼자 계속 지껄여대는 꼴이 되어버렸다.
입이 얼어 붙기라도 한 듯 침묵을 지키던 그가 드디어 응답해 온다. 그런데 그 첫 마디가 내 귀를 의심케 했다.
"워먼 부스 마오난 주(我?不是毛南族)"
직역하면 (우리는 마오난족이 아니다)란 말이 되는데, 그렇다면 정부 청사 입구에 걸려있는 毛南族自治?政府란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대목에서부터는 구체적인 얘기를 줄여야 함을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예민한 부분임을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서술만으로 앞 뒤 정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사진=김인환 |
#중국 소수민족 정책의 면모
중국 총 면적의 64%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소수민족.
그러나 인구는 13억 인구 가운데 8%정도에 그치는 글자 그대로 소수민족이다.
1953년 소수민족 등록을 받고보니 수 백 개에 달했다고 하는데 윈난(云南)지역만 해도 206개나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운남성에 가장 많은 소수민족이 살고 있는데 모두 26개 민족이다. 이 가운데 최소한 자치향이라도 갖고 있는 민족은 16개 민족.
광서 역시 정부측에서는 16개 민족이 살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취재를 하면서 느낀 것은 7개 민족으로 축소되었었다.
한 기록을 보면 민족의 종류와 명칭을 식별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고 한다. 먼저 한족인지 아닌지를 구별한 뒤 소수민족 내부에서 다시 세밀한 식별과정을 거치는 등의 단계를 거쳤다고 한다.
관련 전문가들이 총동원되어 현지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 사람들이 일정한 역사와 그 발전 단계에서 형성된 공동의 언어, 공동의 지역, 공동의 경제생활과 공동의 문?라는 특징을 구별하는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위의 이야기 자체는 무척 논리적 근거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막상 취재 도중 불쑥 불쑥 맞닥뜨렸던 소수민족들이 있었다. 이들은 내가 갖고 있는 55개 소수민족 가운데는 그 이름이 없었다. 일테면 하니족(哈尼族)을 취재하다가 만난 아이니(?尼人)런 같은 경우다.
이들은 겉으로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는 그들 민족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있음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아이니런을 취재하려다가 밤늦게 찾아온 정부요인에 의해 "내일 날이 밝는 대로 이 고장을 조용히 떠나라"는 점잖은 추방명령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중국에는 내몽골 자치구를 비롯, 신장-위그르, 시짱장족, 광시 쫭족, 닝샤 회족 등 5개의 성급 자치구가 있고, 조선족 자치주를 비롯한 30여개의 자치주와 1300여개의 민족향 (鎭과 동급)이 있다.
1952년「민족구역 자치제도」가 시행되면서 ▲각 민족은 소수민족을 중심으로 자치기구를 구성한다. ▲별도의 언어와 문자를 사용한다. ▲자치권을 행사할 경우 해당 지역 민족의 특징과 풍습, 습관을 충분히 고려한다. ▲자치기관은 민족의 특징을 고려해 조례와 법률, 규정을 제정한다. ▲자치기구가 자치구의 재정권을 행사할 때에는 동급의 정부보다 더 많은 권한을 가진다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가운데 시행되어 왔다.
이것 역시 명목상의 내용으로 과연 이대로 지켜지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할 수밖에 없다.
#예상 못했던 LF족 부락을 가다
마오난족 향장과 장시간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친근감이 생겼다. 그 역시 얘기를 하는 도중에 몇 번이나 3개월 전, 의도적으로 나를 피한 건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그와의 시간은 오후까지 이어졌다.
소수민족 자치정부의 장(長)급은 대부분 한족인 것이 늘 궁금했었는데 이곳 마오난족 향장은 LF족이어서인지 한족이 아니었다.(사정상 이 부락의 이름을 밝히지 못함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며 거듭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오늘 저녁으로 이곳을 철수해야 할지 어떨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는데 향장은 이왕 온 김에 LF족을 만나볼 생각이 없느냐고 묻는다.
꿩 아니면 닭이라고 했던가! 내 입장으로선 이것 저것 가려가며 만나야 할 필요가 없었고, 오히려 예상 못했던 소수민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도 있겠기에 그 자리에서 고맙다는 인사부터 했다. 그는 핸드폰으로 누구에겐가 급히 전화를 했다. 10분도 채 안 되어서 30대 젊은이가 나타났다. H향장은 서로 인사를 시키더니 지금 곧 나를 모시고 너희 부락으로 안내를 하라며 지시를 했다.
부락 촌장인 것을 안 것은 막상 그의 집에 도착해서였다. 향장과 헤어져 두 시간 정도 촌장의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왔더니 그렇지 않아도 짓물러 있던 양 쪽 엉덩이가 쓰리고 따가웠다. 촌장집은 옛날 우리네 풍습이듯 대가족이 한 집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형님 부부와 두 명의 조카, 그리고 촌장 내외와, 촌장의 여동생 두 명, 거기에 촌장의 어린아이 두 명을 합하면 모두 열 네 식구가 된다. 늘 북적대는 것 같은데 앞 뒷집, 옆집 등도 가까운 친척들이어서 이 역시 한 가족처럼 뒤섞여 지내다 보니 깔깔깔깔 웃음이 떠나질 않는다.
대대로 농사를 지어오는 부락민들은 아주 훌륭한 공동체로서 행복한 구성원들이다.
집에 도착해 여장을 풀기도 전에 앞 마당엔 임시 테이블이 놓여지고 20여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낯선 한국인을 환영하기 위한 즉석 잔치다. 모락 모락 더운 김을 날리우는 닭고기며 오리고기, 산채나물들과 부락에서 직접 담궈 마신다는 미주(米酒).
우리네 막걸리보다도 도수가 훨씬 낮은 이곳 미주는 마시기도 쉬웠지만 어지간히 마셔도 취기가 오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녀노소 누구나가 즐기는 술이다. 돌아가면서 쏟아지는 질문 또 질문. 텔레비전을 통해 본 한국과 한국인, 특히 한국여성의 아름다움을 얘기하기도 하고, 간혹 어떤 젊은이는 한국이 어떻게 해서 부자나라가 되었느냐며 엉뚱한 질문을 하기도 한다.
어느 정도 흥취가 돌자 한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 부락에 처음 온 한국인인데 직접 한국노래를 청해 듣는 게 어떠냐고 좌중을 돌아본다.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모든 시선이 내게 쏠린다. 이런 경험은 이미 여러 차례 겪은 터여서 나는 일어나서 꾸벅 인사를 한 후 아리랑을 목청 높여 불렀다.
후렴 부분만 두 번째 부르는데 어느새 이들 중 몇 명이 따라 부를 정도로 음감이 예민했다. 답례인 듯 한 처녀가 노래를 시작하자 다 함께 따라 부르니 곧 합창이 되어 버렸다. 이러는 사이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마당 가득 50여 명이 둘러서게 되었다.
사람들의 흥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더욱 무르익어, 집집마다 새로운 술동이를 들고 나오고, 별별 야채를 다 날라오며 마치 축제일이나 된 것처럼 즐기게 되었다.
잠자리에 든 것은 밤 12시가 훨씬 넘어서였다. 곯아떨어져 잠이 들었다가 소변생각이 나서 일어나려는데 창문 쪽으로 인기척이 들린다. 이 밤중까지 자지 않고들 노는가 싶어 문을 열어보려는데 후닥닥 뛰어 달아나는 사람들이 어림잡아도 열 명은 넘어 보인다. 그것도 남자가 아닌 여자들이었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사진=김인환 |
낯선 남자, 그것도 외국인이라는데 대한 호기심이 그녀들의 장난기를 발동시켰을 것이다. 한 두번 겪은 일이 아니어서 짐짓 태연한 척, 화장실을 찾아 나섰다.
60년대 우리나라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이다. 컴컴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것 같은 내부구조. 대충 어림짐작으로 총구를 겨누고 방뇨를 마쳤다.
바지춤을 여미고 다시 숙소로 막 돌아서려는데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끈다. 사방이 암흑세계여서 전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에서다. 나도 모르게 몇 발자국 끌려가다 보니 숙소 뒤쪽 커다란 나무까지 가게 되었다.
나를 유인하듯 끌고 온 사람은 남자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느끼는 순간, 와락 내 가슴으로 안겨오며 두 손으로 내 목덜미를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불 같은 키스, 또 키스.
밀쳐내고 고개를 돌려도 여인의 힘이 얼마나 완강한지 힘이 부칠 지경이다. 그렇다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처지여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내 오른손을 잡아끌더니 자신의 가슴에다 얹어버린다.
물컹! 보통 대물이 아니다.
아찔아찔해지는 정신을 수습하고 있는 힘을 다해 그녀를 밀쳐냈다. 그리고 도망치듯 숙소로 돌아왔다. 여인과 입을 맞추었음에도 황홀하거나 달콤하기는커녕 입 안 가득 시큼털털하기만 하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지만 도대체 상대가 누군지 알 길이 없으니 이보다 더 황당한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잠그고 또 확인까지 한 후 설친 잠을 청하노라 애를 먹었다. (이런 상황이 벌써 몇 번째인가. 외국인이라는 호기심에 용감무쌍한 소수민족 여인들의 저돌적인 공격이 당혹스럽기만 하다.)
사진=김인환 |
얼핏 보기에 1백 호 쯤 되는 평화스러운 농촌. 두 군데 우물이 있고 주변엔 빨래터도 있다. 마을의 모습만 본다면 우리네 농촌과 다를 바가 없다. 마을 뒤쪽의 조금 높은 지대로 올라가 보니 커다란 분지가 보이고 온갖 농작물이 풍성하다.
내 키를 넘기는 옥수수 밭들과 푸른 채소들 그리고 새벽을 깨우는 온갖 새들의 군무가 일품이다. 소수민족들의 아침식사는 보통 9시가 넘어서 시작된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들이다.
뒷동산까지 두루 한 바퀴를 돌고 내려올 무렵에야 우물가에 하나 둘씩 여인들이 보인다. 그리고 저만치 뚜벅뚜벅 말을 탄 소년 하나와 물소를 타고 동산 쪽으로 향하는 소년도 보인다. 말 타고 소 탄다는 그 말을 모습으로 직접 보게 되니까 흥미롭기까지 하다. 숙소인 촌장 집에 들어서니 이 집 식구들도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모양으로 어젯밤 마당에서의 파티 뒷 수습을 하느라 바쁜 모습들이다.
어젯밤 나를 습격했던 여인은 이 집 가족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하며 여자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촌장부인을 제외하고 나면 두 명의 여동생과 조카들이 있다. 누가 조카이고 누가 여동생인지 구별이 쉽지 않았지만 예의 그들의 동태를 주시해 보았다. 그러나 천성이 밝고 명랑한 그녀들인지라 전혀 구김살이 없는 표정으로 아침인사를 한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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