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숙빈 을지대 간호대학장 |
긴 꿈을 꾸듯 TV는 지난 몇 년간 방송했던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들을 반복해서 틀어주고 또 틀어주었다. 그 중에 신선하게 필자의 관심을 끈 것은 '굿 닥터' 라는 미국 드라마였다. 몇 년 전 같은 제목의 한국 드라마가 있었던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원작인 한국 드라마를 미국과 함께 다시 만들어 방영한다는 것이었다. 한국 드라마를 미국이? 원작을 보지 않았으니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되었을까 잘 모르겠지만 여하간 멋지고 흥미로웠다.
서번트증후군을 가진 청년이 의대를 졸업하고 외과 레지던트로 채용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편견에 맞닥뜨리는 내용이었다. 응급상황에서 천재성을 발휘하며 환자 상태를 파악하고 처치함으로써 생명을 구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였지만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장애를 가졌기에 의사로는 적절치 않다고 이사회 사람들 대부분이 그의 채용을 반대했다. 그러던 중 왜 외과의사가 되려 하느냐는 질문에 어릴 때 아끼던 토끼의 죽음과 늘 함께 하던 동생의 죽음을 떠올리며 그들이 어른이 되게 해주고 싶었고, 아이를 낳고, 사랑하게 해주고 싶었다는 말로 그들의 반대를 넘어서는 감동을 연출하였다.
서번트증후군은 자폐 증상이나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수학이나 음악, 예술 등의 특정 분야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학자들에 따르면 좌뇌의 손상을 보상하기 위해 우뇌의 기능이 촉진되어서 그렇다고 하는데 엄청난 수의 암산을 하거나, 한 번만 듣고도 그 곡을 연주하거나 복잡한 기계를 수리하는 등 대단한 능력을 보인다. 오래 전에 상영된 '레인 맨'이란 영화는 킴 픽이라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했는데 그는 우편번호부와 달력을 통째로 암기했고, 스티븐 윌트셔라는 화가는 뉴욕 상공을 20분 날고도 뉴욕 전경을 완벽히 그려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천재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므로 실제 일상생활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생각나는 모습들이 있었다. 국내에 자폐증이 소개되던 1980년대 초 발달장애아 주간치료실에서 치료교육을 받던 아이들의 말간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00이의 암기력도 참으로 특별났었다. 가끔 타는 지하철 2호선의 역과 어느 쪽 문이 열리는지를 빠짐없이 외우고, 병원으로 오는 동안 보았던 시내버스의 번호, 시발점, 주요 정류장, 종점까지 외워서 쓰곤 했다. 그 내용이 맞는지 보겠다며 아이가 쓴 종이를 가져갔던 자원봉사 학생이 다음 날 혀를 내두르며 감탄할 정도였는데.
당시 네 살, 다섯 살 정도였으니 지금은 마흔 나이에 이르렀을 것이다. 어디에서 어떻게들 지내고 있을지… 초기 행동 진단과 사회성 증진을 위한 치료적 놀이를 주로 했던 주간치료실 프로그램을 마친 아이들은 특수교육기관으로 갔다. 그 부모들과 언제까지나 소식을 나누며 지낼 듯이 친밀한 관계였는데, 어느 새 먼 기억 속에 쌓이고 말았다. 아쉽고 미안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드라마에서 주인공 숀을 보호하고 지지하는 병원장의 말이 머릿속을 계속 울린다. " 숀 머피를 채용해야 합니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됩니다." 그렇다. 이 드라마의 원작자가 자폐장애를 소재로 삼은 것은 인간적 관심에 기초했을 터이고, 환자가 아닌 의사로 쓴 것은 희망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방송사가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하자고 제안한 것도 편견을 넘어서 '더불어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리라. 그래야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을지대학교 간호대학장 임숙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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