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민족 마오난족(毛南族)을 만나기 위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야만 했다. 꾸이저우(貴州)의 성도 인 꾸이양 (貴陽)에서 10시간 이상 버스를 타고 내린 곳이 뚜윈스(都?市). 핑탕센(平塘?)까지 가는 차가 오후 4시 30분에 끝났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빈관을 찾았다.
비교적 규모가 있는 호텔이라 프론트에서 방값을 물어보니 일박에 160위안이라고 한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무조건 깎고 보는 습관이 배어 있어서 절반을 뚝 잘라내고 80위안이면 어떻겠느냐고 하니까 선뜻 응해준다. (그럴 줄 알았으면 50위안 쯤으로 더 낮게 불러볼 걸.)
3층으로 안내된 방에 들어가니 언제 손님이 다녀갔는지 물건마다 먼지가 뽀얗다. 몇 번이나 그냥 돌아서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 종업원이 청소를 다 끝낼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체구가 조그마한 20대 여종업원이다.
그녀도 얼굴에 홍조를 띤 채 미안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녀가 나가고 다음 화장실 한 쪽에 걸려있는 샤워기를 틀어 보았다. 시뻘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온다. 녹물이었다. 한 5분 쯤 지나서야 맑은 물이 나올 정도로 낡은 배관, 수명을 다 한 샤워기였다.
그래도 갓 청소를 끝내고 침대보도 새 것으로 교체된 상태여서 조금은 위안이 된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속옷이며 양말을 빨아 널었다. 이것 역시 오랜 여행길에 생활화된 습관 중에 하나다.
내일 아침이면 건조될 것이니 다시 짐 속에 구겨 넣으면 된다. 도시 구경도 하고 저녁식사도 해결할 겸 호텔 문을 나섰다.
시장이 열리는 곳이나 역전 부근, 터미널 부근은 외국인에게 가장 많은 볼거리를 제공해 주는 곳이다. 호텔 뒤쪽 도심지를 가로지르며 내가 흐르고 있었다. 중간 중간에 다리가 있고, 이 쪽 저 쪽 끝나는 지점에는 정자가 있었는데 어디나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이 신기했다.
다리를 건너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10살이 됐을까 말까 한 소년 소녀가 재주 넘기도 하고 허리를 뒤로 꺾어 활처럼 휘게 한 후 땅에 놓여 있는 손수건을 입으로 물어 올리는데, 한국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서커스단의 묘기였다.
소년 소녀가 번갈아 가며 묘기를 보인다. 유리조각을 깔아놓고 맨 발로 제자리 뛰기도 하고, 시퍼런 칼날 위에 서있기도 하지만 발바닥에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다.
마오족 공연 모습/사진=인터넷 발췌 |
그리고 앞에 놓인 깡통 위에 떨어지는 동전소리를 들으며 시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린 소년 소녀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내 등뒤를 쏘는 듯 하는 것이 왠지 모르게 한 쪽 가슴이 쓰려 오기까지 한다.
누군가가 내 바지자락을 잡아 끄는 느낌이 들어 돌아보니 꾀죄죄한 복장의 어린아이가 빤히 쳐다본다. 7~8살 쯤 되어 보이는 남자 어린이의 손에는 장미꽃 한 송이가 들리어져 있다. 사 달라는 눈치다. 10위안을 꺼내 주니까 고개를 꾸벅 숙이며 고맙다는 시늉을 한다. 꽃을 받아들고 돌아서려는데 이 녀석이 다시 바지가랑이를 잡는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까 한 쪽 주머니에서 한 움쿰 동전을 꺼내더니 정확하게 9원을 건네주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꽃 한 송이가 1원이란 말이지? 괜찮다. 너 다 갖거라. 하고 돌아섰는데 꼬마녀석은 다시 뛰어와 내 앞을 가로 막더니 발 아래로 1원짜리 동전 9개를 던져놓고 달아나 버린다. '아하! 꽃을 팔았지 구걸행위를 한 것이 아니란 뜻이구나'. 조그만한 놈이 웬 자존심?!
문득 꽝시(廣西)의 꾸이린 공원이 생각난다. 이미 경험한 독자들도 있겠지만 그 공원엔 8살짜리 쌍둥이 녀석들이 있다. 관광객이다 싶으면 쏜살같이 따라와 꽃을 사라고 조르는데 피해갈 수가 없을 정도로 악착스럽다. 두 송이를 종이에 싸서 들고 다니는데 꼬박꼬박 10원을 받는다. 손에 든 것을 팔고 어디론가 뛰어가는데 화단 한 쪽 숲 속에 감춰둔 나머지 꽃을 확인도 하고 또 두 송이를 뽑아들고 새로운 고객을 찾아 나선다. 그러니까 겉에서 잘 들어나 보이지 않는 숲이 녀석의 창고가 되는 셈이다. 쌍둥이를 같이 세워놓고 보면 쉽게 구별이 안될 정도로 똑같이 생겼다.
몇 번 쯤 만나 꽃을 사주면서 낯이 익은 후의 어느 날이다.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서 하나씩 주었더니 은근히 경계를 하면서도 맛있게 먹어 치웠다. 겨우겨우 얻어낸 가족환경은 아버지가 다리 불구이고 어머니는 장님이라고 했다. 꽃을 많이 팔지 못하고 돌아가면 저녁은 주지 않고 아버지의 매가 기다린다는 대목에선 눈물까지 흘리던 쌍둥이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만난 이 꼬마 녀석은 1원에 꽃 한 송이를 팔고 정확하게 9원을 거슬러 주었던 것이다. 시장통을 몇 바퀴 돌고 나니 다리가 피곤하다. 죽 전문집에 들어가 두 종류의 죽을 시켜놓고 다 먹어치웠다. 죽 맛 한 번 끝내주는 집이다. 호텔로 다시 들어왔을 때는 이미 어둑어둑 날이 저물고 있었다.
3층 계단을 오르려는데 아까 청소를 해주던 여종업원이 곁에 바싹 따라붙더니 샤오지에(小姐)가 필요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무슨 小姐냐고 물으니 안마도 해주고 그리고… 하면서 의미 있는 웃음을 날린다. 불쾌한 표정으로 필요 없다고 일갈한 후 방으로 들어와 다시 한 번 샤워를 하려고 옷을 다 벗었는데 실내 전화벨이 울려온다. 왠 전화가 올 데가 없는데, 생각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호텔에서 항상 겪는 안마서비스
"안마해 드릴까요?"
"필요 없습니다."
"3백위안이면 특별서비스까지 해 드립니다."
"필요 없대두요."
"그럼 200위안으로 깎아 드릴께요."
"필요 없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굴어요" 하고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번엔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한다. 종업원인가 싶어 문을 열고 보니 낯선 아가씨가 쌩긋 웃고 서 있다.
"안마 해드릴까 하고요."
"안 합니다. 괜찮습니다." 쾅! 하고 문을 닫아버렸다. 그런데도 몇 번이나 노크를 하더니 사라진 듯 조용하다. 그러고 나서도 30분 간격으로 전화벨이 울렸다. 아예 수화기를 내려놓고서야 잠에 빠져들 수 있었다.
어느 도시나 호텔에 들면 기가 막히게 알고 전화로 부딪쳐 오는 여인들의 육탄공세. 중국을 잘 아는 친구가 그랬다. 이들 여인들을 받아주면 첫째, 전화로 흥정한 금액은 무시되고 엉뚱한 값을 요구한다.
둘째, 계획적인 조직도 있는데 남녀가 알몸이 되었을 즈음 임검을 핑계로 들이닥친 남자들에 의해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갈취당할 수도 있다.
셋째, 여자가 들어간 것을 알고 경찰관이 뛰어들어 매음행위로 끌려가 벌금 내고 여권에 <호색한>이란 붉은 도장이 찍힌 채 강제 추방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성병, 특히 에이즈가 만연되고 있어 이 문제만큼은 대책이 없다. 한 평생 후회하고 살 수는 없잖은가. 참으로 겁나는 얘기를 친구는 천연덕스럽게 하고 있었다.
이튿날은 일찍부터 서둘러 시외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오전 9시 30분에 첫 차가 갈 예정이었는데 문제가 생겨 운행이 중단 되고 11시 30분 차를 탈 수 있다고 했다 .핑탕센까지 가는 차는 平塘에 조금 못 미처 뚜산(?山)이라는 곳에 선다. 이곳에는 소수민족 마오난족(毛南族)자치향(自治?)정부가 있다고 했다. 마오족(毛南族)을 취재하기 위해서 들려야 할 필수 코스다.
貴陽에 있는 省정부에서 이미 연락이 가 있을 것이고 오늘 향장(??)을 만나면 안내를 받을 수 있으리라.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정부를 찾았고 2층에 있는 향장 사무실을 노크했다. 여비서가 나와 향장은 외출 중이라고 한다. 나는 한국에서 온 작가인데 성정부에서 오늘 쯤 내가 도착한다는 연락이 없었느냐고 물으니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뗀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염없이 기다리기는 퇴근시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끝내 향장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 동안 수 차례 직원들이 들락날락 거렸지만 나에 대해선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 비서가 퇴근할 차비를 하는 가운데 재차 물었다.
"오늘 향장은 오질 않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이웃 부락에 조그만 문제가 있어서 나가셨는데 아마 오늘은 들어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버린다. 더 이상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진 셈이다.
이튿날은 오전 10시에 다시 향장실을 찾았다. 더 일찍 올 수도 있었지만 사무실 방문에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였다. 내가 막 들어서자마자 방금 나간 분이 향장인데 못 보았느냐고 되묻는 비서 아가씨를 보며 순간적으로 낭패감에 빠져야 했다. 그렇다면 3층 계단을 오르면서 얼핏 보았던 땅딸보 아저씨가 향장? 뭔가 서두르는 폼으로 나를 스치고 내려가던 사람이 딱 한 명, 그 사람뿐이 아니던가.
그 역시 배낭을 짊어진 채 올라오는 나를 이상하게 보았을 법도 한데 그냥 지나치다니? 서둘러 아래층으로 뛰어 내려갔다. 그러나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검정색 승용차 한 대가 저 앞 쪽 정문을 막 나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를 피하는 것일까? 아니면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다시 향장실로 올라와 비서와 마주 섰다.
서기네 가족과 함께(오른쪽이 필자)/사진=김인환 |
"혹시 향장님의 모습이 이렇게 이렇게 생기셨습니까?"
"맞습니다."
"제가 어제 왔다 갔다는 얘기를 하셨는지요?"
"네. 했습니다."
"그럼 아무 말씀도 없으셨나요?"
"네."
"오늘은 지금 나가셨다가 언제쯤이나…?"
"그건 모릅니다. 향장님이 너무 바쁘시기 때문에."
"여기서 좀 더 기다려 볼까요?" 점심시간까지 무료하게 비서나 간혹 바라보며 기다려 보았다. 그녀 역시 무척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지만 모르쇠로 일관한다. 넉살 좋게 버티기로 했다. 이들의 점심시간은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다. 구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숙소로 (대부분의 직원들이 건물기숙사를 숙소로 쓰고 있었다.) 돌아가 낮잠을 잔 다음에 출근하는 것이 이들의 습관이다.
남방지방 어디를 가나 거의 똑같은 습관들이었다.
오죽 했으면 낮 시간엔 애인도 필요 없다고 했을까. 어쩌다 이 시간에 낮잠을 자지 못하면 오후 내내 약 먹은 닭처럼 비실거린다.
점심시간이 되자 혼자 나가기가 미안했던지 비서 아가씨가 식사를 하러 가잔다. 염치 볼 것 없이 따라나섰다.
집을 지키고 있는 노인/사진=김인환 |
청년들의 이동 수단인 말/사진=김인환 |
모택동 주석 당시에 밥 먹는 시간도 아끼자는 운동이 일어났고 그 방편으로 생겼다는 콰이찬(快餐)은 글자 그대로 빨리 먹는 법이다. 다른 직원들이 낯선 나의 모습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무슨 얘긴지 쑥덕거린다.
뭐라 하거나 말거나 밥알 하나 안 남기고 깨끗이 그릇을 비우고는 다시 향장실로 올라갔다. 그런데 문이 잠겨 있다.
아하! 비서 아가씨도 낮잠 자러 간 모양이군. 그렇다면 나는 어디로 가지? 맥이 빠진 채 1층 현관까지 내려왔다. 앉을만한 벤치는 없을까 하고 두리번거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밖으로 나오니 작열하는 태양이 불화살이 되어 꽂혀 온다. 저만치 마당 한 쪽에 커다란 나무가 보이고 바위도 몇 개 보이기에 가까이 다가가 앉을 자리를 찾는데 뒤쪽에서 왠 인기척이 있어 놀랐다. 정복을 차려 입은 경찰관이었다.
"어디서온 누구십니까?"
"아. 네. 저는 한국에서 온…."
"그럼, 당신이 한국에서 온 작가선생이란 말이요?"
"네. 그렇습니다만. 어떻게 저를…?"
"어제도 왔다가 향장을 못보고 가셨죠?"
"네. 그런데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네. 모두 알고 있습니다. 선생께서 여기 온다는 것을 나도, 향장도 미리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향장은 무척 바쁜 모양이죠?"
"네. 사실은 직접 향장을 만나면 아시게 되겠지만, 아마 향장은 선생을 만나고 싶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저를 안 만날 이유라도 있는 건지요?"
"그게 글쎄, 제가 드릴 말씀은 아니고, 오늘은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또 시간이 있으시면 찾아보시죠.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러더니 휑하고 돌아서서 정문 쪽으로 향한다. 그제서야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니 정문 바로 건너편이 파출소 건물이었다.
내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그는 처음부터 주욱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왜 향장이 나를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일까. 무슨 이유로 생면부지의 나를 거절한단 말인가.
얘기 도중에 파출소 소장이라고 신분을 밝힌 경찰관은 이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었으며, 왜 나를 찾아와 이런 얘기를 들려주는 것일까.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미스터리였다. 나를 무슨 탐정소설의 주인공 쯤으로 만드는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게 만드는 이 수수께끼 속에서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 것일까? 이 궁금증은 몇 달 후에 향장을 어렵게 만나면서 풀어질 수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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