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하고 졸린 오후에 우연히 집어든 만화책 '신과 함께-저승편' 3권을 다 읽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가는 무겁고 딱딱한 저승 세계의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나간다. 가볍다고는 하나 경박하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현대식으로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저승차사나, 저승 변호사라는 설정에서는 젊은 작가의 톡톡 튀는 현실 감각이 느껴진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재치 있는 위트는 만화를 웃음과 재미로 이끈다. 그러면서도 은근히 다가오는 교훈적 메시지는 '어! 이 만화책 괜찮네~'하는 여운을 남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책의 진솔한 끌림은 아마도 나에게 삶을 뒤돌아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킨 점이 아닐까?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서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에 대해 얼마나 생각할까. 그리고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의 뜻에 따라 사후 세계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그리고 죽은 후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 현세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럼 나처럼 종교가 없는 사람들은?
이 책은 우리가 죽은 후 갈 수도 있는 길에 대한 설명서다. 그리고 죽은 후 우리가 좋은 곳으로 가기 위해선 살아있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주인공 김자홍은 평생 남에게 서운한 소리 한마디 못하고 손해만 보며 살아온 자다. 직장에서 얻은 과로와 술병으로 이승에서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40살도 안된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김자홍 앞에 무섭지도 않고 오히려 친근해 보이는 저승사자 해원맥과 이덕춘이 나타나 저승으로 안내한다. 저승열차에서 할머니를 돕기고 하면서 저승에 도착하자 저승입구에서 그를 맞이한 것은 저승 변호사 진기한이다. 변호사 진기한은 저승에 온 자는 저승에 있는 열 명의 대왕, 즉 저승시왕(十王)에게 차례로 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은 김자홍을 도와줄 것이라고 한다. 이 장면에서는 단테의 신곡이 생각났다.
각각의 저승대왕은 죽은 사람이 자신들이 담당한 죄에 해당하는 죄를 지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결한다. 그리고 죄지은 자를 구분해 자신들이 관리하는 지옥에 집어넣는 것이다. 저승에서는 인간들의 어떤 잘못을 처벌할까? 첫 번째 진광대왕부터 일곱 번째 태산대왕까지의 재판은 7일 간격으로 이뤄지고, 그 다음은 100일째, 1년째, 3년째에 이뤄진다.
첫 번째 진광대왕은 공덕을 베풀지 않은 자를 골라 도산지옥 칼의 다리를 계속 건너는 벌을 내린다. 두 번째 초광대왕은 남의 물건을 훔친 자,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자, 주기보다 받기만을 원한 자를 골라 끓는 물속에 집어넣는 화탕지옥에 보낸다. 세 번째 송제대왕은 불효한 자를 골라서 얼음으로 만들어진 한방지옥으로 보낸다. 네 번째 오관대왕은 살생, 절도, 음행, 망언, 주사의 죄를 지은 자들을 저울로 재서 못된 사람들을 칼의 숲으로 이루어진 검수지옥으로 보낸다. 다섯 번째 염라대왕은 입으로 죄를 지은 자들의 혀를 잡아 빼는 발설지옥을 맡고 있다. 여섯 번째 변성대왕은 살인, 강도 등 강력 범죄를 지은 자들을 골라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독사지옥에 집어넣는다. 일곱 번째 태산대왕은 장사로 남들에게 못된 짓을 한 사람들을 골라 톱으로 몸을 자르는 거해지옥으로 보내기도 하고, 49일간의 재판결과를 종합하여 재판 종료 여부를 결정하거나, 두 번째 판결을 통과하였다는 조건 하에 육도환생의 문을 결정한다.
육도의 문은 천상문, 인간문, 아귀문, 아수라문, 축생문, 지옥문으로 돼 있다. 49일 동안의 재판으로 끝내지 못하면 다음 세 개의 지옥을 더 거쳐야 한다. 사후 백 일째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은 자를 쇠못이 박힌 침상으로 만들어진 철상지옥으로 보낸다. 사후 일 년이 되면 간음한 자는 살을 찢는 칼바람으로 처벌하는 풍도지옥을 지나가야 한다. 마지막 삼 년째에는 낮도 없고 밤도 없는 암흑뿐인 흑암지옥을 가게 된다. 흑암지옥에서는 49일째와 마찬가지로 다시 태어나는 곳이 결정된다. 단, 천상문이 없고 다섯 개의 문이 있다는 점이 다르다.
아무리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이 사후 세계를 정확히 아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존재여부도 그렇고 실제로 존재한다고 치더라도 어떠한지를 알기는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저승을 바라보는 것은 이승이 불완전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이승에 살면서 저승에서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추구한다. 저승에서의 좋은 삶을 기대하면서 현실의 고단함에 위안을 삼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저승을 바라보는 것도 어쩌면 현실을 잘 살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저승이든 이승이든 고통스럽게 살지 않고, 잘살기 위해 "착하게 살아야겠다!"
서성민 한밭도서관 사서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