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은 빛과 색채의 영화였습니다. 국가 존망의 위기로 가득 찬 산성과 임금의 거처는 어둡고 무겁습니다. 계절도 겨울이라서 산과 들, 나무가 모두 짙은 회갈색입니다. 내리는 눈 역시 비애의 덩어리처럼 쓸쓸하기 그지없습니다. 낮 동안의 일도 있었으련만 기억에 남은 영화의 시간은 줄곧 밤으로 이어집니다.
어전에 엎드린 신하들, 그 위로 흐르는 참담한 침묵, 그리고 그 광경을 견뎌내려는 창백한 임금의 얼굴이 대비를 이룹니다. 영의정의 비루한 노회함과 감춘 발톱 같은 당파의 책임 회피와 전가는 흔들리는 검은 그림자 속에 음험합니다. 이들의 어리석고 무책임한 결정을 따라야 하는 백성의 고초가 겨울이라 더 희어 보이는 무명옷과 함께 비참해 보입니다.
화친을 주장하는 최명길의 냉정함과 척화를 외치는 김상헌의 결연함은 흑과 백, 확연한 복색의 대립으로 나타납니다. 클로즈업으로 잡은 그들의 얼굴은 조명으로 인해 반은 밝고 반은 어둡습니다. 두 사람의 논리와 입장 어느 것도 당면한 상황을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는 것임을 보여 줍니다.
영화는 춥고 어두운 겨울 속에서도 봄을 기약합니다. 할아버지를 죽인 자의 손에 거두어진 소녀 나루는 봄을 암시합니다. 새로운 시간이자 시대를 상징하는 봄. 나루는 또 그 새로운 시간과 시대를 살아갈 새로운 세대입니다. 치욕스런 삶보다 당당한 죽음을 말하는 김상헌, 견딜 수 없는 죽음보다 견딜 수 있는 치욕을 주장하는 최명길. 두 사람 모두 자기 시대를 책임 있게 산 이들일 것입니다. 하지만 어두운 이들의 얼굴과 달리 영화는 봄의 소녀 나루를 밝고 환하게 그려냅니다. 작품의 주제의식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남한산성>은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원작처럼 영화도 강렬한 액션과도 같은 말들이 넘쳐납니다. 임금과 신하, 신하와 신하 간에, 그리고 청의 장수 용골대와 최명길, 용골대와 청의 칸 사이에도 치열하고 긴장감 높은 논쟁과 대화가 오고 갑니다. 그러나 영화는 원작 소설의 서사, 넘치는 말뿐 아니라 이미지로도 깊은 아름다움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마치 초반에 김상헌이 뱃사공을 칼로 벤 뒤 눈밭으로 번지는 핏빛을 감싸던 풍경과 같습니다. 강렬한 언어와 논리가 날카로운 칼이라면 익스트림 롱 숏으로 잡아낸 겨울 산하의 처연한 빛은 그것을 싸안는 이미지의 힘을 느끼게 합니다. 언어와 서사의 뼈대를 둘러싸는 빛과 색채의 이미지를 통해, 영화는 한결 웅숭깊은 감동을 자아냅니다.
김대중(영화평론가/영화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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