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싸 주셨던 김밥을 재연해봤다. 시중에 파는 조미김으로 싸서 그런 지 부스러지고 제대로 모양이 안 났다. |
세상에서 제일 값싸고 맛있는 게 김밥이다. 김밥의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무얼 넣느냐에 따라 색다른 맛을 연출할 수 있다. 요즘은 럭셔리한 김밥도 나온다. 한우 불고기가 들어가기도 하고 캐비어를 넣기도 한다. 싱글들의 일상을 보여주는 '나 혼자 산다'에서는 방송인 솔비가 게살 넣은 김밥을 싸 먹는 모습이 나와 시청자들의 침샘을 자극했다. 요즘은 송이철이다. 송이는 채취하기도 어렵고 흔치 않아서 고가에 팔린다. 아직 자연산 송이 향이 얼마나 향기로운지, 맛은 어떤지 먹어보지 않아서 짐작만 할 뿐이다. 김에 고슬고슬한 흰밥을 펴서 여기에 캐비어, 게살, 송이버섯, 1등급 한우 고기를 넣은 김밥을 상상해 본다. 아, 송로버섯· 거위 간도 있구나. 세계 최상위 음식 재료들을 넣은 김밥은 어떤 맛일까.
오래 전, 희한한 김밥이 있었다. 제작자는 이순례 여사.
이순례 여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 날도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가마솥에 밥을 안치고 집에서 키운 닭이 낳은 계란 예닐곱개를 삶는다. 식구들 생일날이나 멀리서 일가친척이 왔을 때 찜을 해 밥상에 올리는 귀한 거지만 오늘은 애들을 위해 몇개 삶았다. 솥뚜껑을 열고 뽀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양재기에 퍼 담고 찬장에 넣어둔 김을 서둘러 꺼낸다. 흰밥에 들기름, 깨소금, 소금을 넣어 비벼 놓고 도마에 빤들빤들 윤이 나는 김을 펼친다. 김에 밥을 두툼하게 깔아 하나씩 싼다. 고소한 들기름 냄새가 부엌에 진동한다. 이른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더니 뱃속에서 화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 화들짝 놀란다. 평소엔 깨워도 안 일어나는 얘들이 오늘은 일찍 일어나 북새통을 떨고 있다. "엄마, 내 하얀 블라우스 어딨어?", "엄마, 내 타이즈 빵구 났어." 어휴, 이제 다 했네. 감도 우려놨고 밤도 삶았고 김밥이랑 삶은 계란 넣어주면 되겄지.
서슬 퍼런 유신 시절, 국민학교 2학년인 나는 어젯밤 소풍 갈 생각에 잠이 안 왔다. 마루에 놓인 엄마가 장에서 사다 준 운동화를 몇번이나 만져보고 신어 보느라 닳을 지경이었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엄마가 싸 준 맛난 거와 용돈 50원을 들고 언니 오빠랑 신나게 학교로 갔다. 와~ 학교 앞 점방엔 아이들로 장사진을 쳤다. 눈깔사탕, 캔디, 캐러멜, 쫀드기, 평소에 감히 먹어볼 수 없는 것들을 오늘은 사먹을 수 있다. 군것질할 돈이 없어 늘 입이 심심한 우리는 학교가 끝나면 산에 가서 찔레 순도 꺾어 먹고, 시어터진 싱게라는 풀도 뜯어먹고 삘기, 채 여물지 않은 땡감, 옥수숫대 같은 걸로 주린 뱃속을 채우지만 점방 캔디를 따라갈 순 없다. 우리 반 영숙이는 벌써 볼이 미어터져라 사탕을 물고 있었다. 코찔찔이 제훈이는 뭘 샀는지 바지 주머니가 불룩하다.
보물찾기, 장기자랑이 끝나고 눈 빠지게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왔다. 여기저기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고 도시락을 펼쳤다. 엄마가 싸준 김밥을 꺼내 들었다. 깨소금과 들기름으로 버무린 하얀 쌀밥으로 싼 김밥이 손 안에 꽉 찼다. 현충사 대웅전 기둥만큼 굵은 김밥을 한 입 물어뜯어 와구와구 먹었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세상에 둘도 없이 맛있었다. 어라? 그런데 친구의 김밥은 내 거랑 다르네? 김밥이 벤또에 가지런히 깍두기 썰 듯 담겨 있었다. 더 이상한 건 김밥 안에 계란, 소시지, 시금치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저런 걸 김밥에 넣었네? 엄마가 싸준 통나무 같은 김밥만 김밥인 줄 알았는데 그 김밥은 뭔가 달라 보였다. 그래도 우리 엄마가 싸 준 김밥이 정말 맛있었다.
훗날 어른이 되어 우리는 종종 그때 얘기를 한다. 한가롭게 거실에 길게 드러누워 엄마랑 언니랑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시절을 소환한다. 엄마는 김밥 얘기가 나오면 부끄러워하며 웃으신다. "난 김밥을 그렇게 싸는 걸로만 알았지, 이것저것 넣는 건 생각도 못했다야." 하긴 그 옛날 시골에서 소시지가 뭔지, 계란말이가 뭔지 알았겠는가. 매일 싸가는 도시락 반찬은 실치 볶음, 무 장아찌, 김치 나부랭이였다. 계란 프라이라는 것은 부잣집, 이를 테면 학교 선생님이나 면장 지서장 자제들이나 싸오는 별미였다. 6남매를 낳은 나의 엄마 이순례 여사는 도시락 싸는 일이 전쟁이었다고 한다. 한 두개도 아니고 한꺼번에 너덧개씩 준비했으니 말이다. 오로지 자식 먹여 키우느라 엄마의 손 마디는 소나무처럼 울퉁불퉁해졌다. 집에 가면 엄마의 하얗게 센 머리와 옹이 진 손을 만져보곤 한다. 여전히 따뜻하다. 이 손으로 나를 이만큼 성장시켰다. 난 아직까지 엄마를 위해 그 흔한 김밥 한번 싸 본 적이 없다. 무심한 딸이다. 아! 세상에 둘도 없는 엄마의 미니멀한 김밥.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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