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은실같이 가늘게, 때로는 가는 솔바늘 같이 뾰족하게, 시시때때 변하며 방울방울 신사의 지붕위에 떨어진다.
신단 앞에 손뼉을 치며 아침 참례를 하고 있는 후루마쓰의 옷은 새벽부터 내리는 빗줄기에 서서히 젖어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절을 세 번 하고 뒷걸음질로 돌아서 신사의 문을 나설 때 빗줄기는 처마 끝에 주렴이 쳐진 듯 은실의 발이 되어 앞길을 막았다.
후루마쓰는 빗줄기를 그윽한 눈빛으로 응시하였다.
고요했다. 세상은 늘 고요하다.
정적 속의 빗줄기는 굵기와 세기가, 바람의 방향에 맞추어 아주 천천히 그렇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변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본다.
수많은 작은 창살이 내려 꽂혀온다.
끊어진 실날 같은 창살, 연실 같이 길게 늘어진 창살, 대창과 같이 굵고 실한 창살이 땅으로 떨어져 꽂혀진다.
모두 선을 이루고 있다.
뿌연 안개 같은 작은 방울의 무리가 반투명한 은막을 이루며 비단 천과 같이 산을 가리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한다.
현란한 오로라와 같이 빗방울의 막들은 바람에 따라 그 면의 크기와 짙고 옅은 농담을 바꾸어 가며 꿈결같은 흰색의 화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부연 영상막이 하늘하늘 아지랑이처럼 나부끼며 세상은 온통 은막으로 가득한 무대가 되어 빗방울들이 펼치는 춤의 향연으로 가득 차 있다.
고개를 내려 땅을 쳐다본다.
땅은 빗물에게 스스로의 자리를 다소곳이 내어주고 있다.
땅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선도 면도 아닌 점이다.
빗방울이 똑똑 땅을 노크하고 있다.
땅이 내어주는 빗방울의 집은 어느덧 손바닥 만한 물웅덩이가 되어간다.
여기저기 작은 웅덩이들이 앞마당에 탄생하고 있었다. 이제 작은 호수를 이루리라.
가을비에 단풍은 낙엽이 되고, 화려한 그 옷도 벗어버리겠지만, 소나무가 많은 신사에는 낙엽보다는 푸른 낙송들이 작은 호수들 속에 잠겨 있었다.
묵묵히 서 있는 소나무의 바늘 가지 끝에 맺혀있는 방울진 빗물은 하나하나가 수정같이 맑았다.
수정방울들은 소나무에 매달려 잠시 세상을 내려다보다 땅을 향해 자기 몸을 던져 작은 호수 속으로 사라져 가곤 했다.
가늘고 긴 빗줄기, 굵고 힘찬 빗줄기, 방울로 떨어지는 빗줄기, 흐느끼듯 나부끼는 빗줄기, 이어지듯 끊어지다가 다시 쏟아 붇는 빗줄기가 연출하는 산속의 교향악.
소리를 들어 본 바는 없었지만, 후루마쓰는 적막 속에 펼쳐지는 현란한 파노라마 속에서 빗줄기가 연출하는 강하고 여린 소리들이 조화를 이루며 내는 아름다운 자연의 심포니를 느낄 수 있었다.
웅장하다가 애간장을 녹일 듯 애절한 자연의 화음에 넋을 잃고 시간을 보낸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후루마쓰는 하늘로부터 오는 심포니가 들려주는 속삭임에 늘 귀를 기울였다.
구름에서 비는 내리지만, 구름은 또 비가 만들어 내는 것.
저 빗방울들은 세상을 돌고 돌며 승천과 환생을 되풀이하여 몇 억 겁의 윤회를 거듭해온 해탈의 존재들이 아니던가.
빗줄기가 소나무를 건드릴 때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소나무는 그들에게 무슨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
맑은 날 머리를 들어 구름에게 했던 말들이 빗물에게 전달되어 다시 속삭이는 그 말들은 무슨 이야기일까.
떨어지며 전하는 빗줄기들의 수많은 말들을 후루마쓰는 진정으로 듣고, 듣고 또 듣고자 하였다.
들리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는 이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후루마쓰를 보는 사람들은 그가 무엇을 듣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서서히 신사 문을 나섰다. 맨발로 빗물과 땅과 흙이 빚어내는 기막힌 부드러움을 발바닥으로 느끼며 팔백 아흔 한 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으며 내려왔다.
891.
3,3,3, 다시 9,9,9.
세상은 셋의 원소로 이루어 진 것이다. 하늘과 땅과 생명들.
우주는 3으로 그 존재를 이루어 내었다.
3의 셋인 9는 변함이 없는 법.
891의 합도 분해하면 9와9의 합이요. 이의 2배 3배의 아니 수십 배의 어떤 수도 다시 9로 다시 3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는 없는 법.
우주의 비밀을 간직한 계단을 걸어 후루마쓰는 신사를 내려와 길 옆 소나무가 자연으로 만들어 낸 한 그루터기에 앉았다.
백년이 넘게 자라던 소나무가 한 여름 밤 번개의 은혜를 받았음인지 무릎 쯤 와 닿는 부분에서 반듯하게 잘리면서 입적하고 말았다.
그루터기는 명상의 좌대가 되었다.
좌대에 자리를 잡은 후루마쓰는 오른발을 왼 무릎 위에 얹었다.
허리를 반듯이 세우고 눈을 감고 힘과 기를 한곳에 모으기 시작했다.
무념무상.
소나무 위의 소나무라도 된 양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후르마쓰의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가면서 머리뿐만 아니라 온 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김은 점점 짙어가고 후루마쓰의 얼굴빛도 점점 소나무의 붉은 빛깔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비단결이 바람결에 나부끼듯 몸을 감싸며 적시고 있었다.
명상에 젖어, 비에 젖어, 더운 김이 되어 피어나는 후루마쓰가 소나무 좌대 위에 앉아있자, 후루마쓰의 몸 위에 떨어지는 빗줄기가 한송이 한송이 꽃잎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빗방울이 후루마쓰 몸 위의 보이지 않는 은막 위에 떨어져, 튕겨 나가는 빗방울 마다 아름다운 꽃잎모양이 되고 있는 것이었다.
꽃잎은 매화꽃을 닮았다.
빗방울은 감히 그 몸을 적시지도 만지지도 못하며 몸 위의 공간에서 수없는 매화꽃잎을 피워내고 있었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매화꽃잎 역시 점점 커졌다.
머리와 어깨위에서 수없이 아름다운 매화꽃잎을 피워내면서 후루마쓰는 좌대위의 그윽한 부처가 되어 있었다.
(계속)
우보 최민호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