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유산 종주, “실패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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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유산 종주, “실패해도 괜찮아”

8일 오전 5시 30분 육구종주 시작
12시간 걸어 설천봉 도착, 해는 지고
곤돌라 관리직원 트럭에 실리듯 하산
체력은 고갈됐지만 가을풍경 마음에 담아

  • 승인 2017-10-13 11:48
  • 임병안 기자임병안 기자
덕유산 종주, “실패해도 괜찮아”



백두대간의 한 자락인 덕유산은 어쩌면 오르기 쉬운 산이라고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상 곤돌라를 타고 10여 분 만에 도착하는 설천봉에서 15분만 걸어가면 도착하는 곳이 향적봉(1614m)이기 때문이다. 남한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이고 국립공원 너비가 전라도와 경상도 4개 군의 229.43㎢에 달한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했다.

기자는 지난 8일 ‘덕유산 육구종주’라는 32㎞ 길이의 나 홀로 산행에 도전했다가 체력고갈과 준비 없는 밤을 맞으며 종주 실패의 쓴 맛을 봤다. 곤돌라는 운행을 멈춘 시간에 도착해 더는 걸어 내려가는 것은 무리라 생각해 곤돌라 운영직원의 퇴근 트럭을 얻어타고 지상에 내려왔다. 지난 여름 지리산 2박3일 종주를 가뿐하게 성공했던 때와 너무 달라 당황스러우면서 등산 사전준비 필요성을 다시금 느꼈다.



무주리조트, 무주구천동, 빨치산으로 기억되는 덕유산은 그만큼 산이 높고 물이 풍부하며 그 산맥이 경상도와 전라도 깊숙이 침투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기자가 ‘육구종주’의 출발점으로 삼은 전북 장수군 육십령(734m) 고개는 소백산맥이 침식작용으로 높이가 낮아져 옛날로 치면 보부상 등이 산을 넘는 능선이었다. 소령(643m), 죽령(689m), 팔량치(513m)처럼 교통이 불편했던 시기에 육십령은 주요 교통로로 활용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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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령에서 시작한 덕유산 종주. 이른 새벽 달빛이 선명하다.
오전 5시 30분 스트레칭 후 본격적인 등산을 시작했다. 주변에 마을이 있는지 동물이 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왔고, 앞서 등산객들이 지나간 흔적들도 느낄 수 있었다. 종주 시작부터 최종 목적지인 향적봉까지 남은 거리를 생각할 순 없다. 당장 눈앞에 높이 솟은 봉우리부터 하나씩 통과해 대략 10개의 봉우리를 넘어 가장 마지막에 닿는 곳이 향적봉이다. 그런데 할미봉(1026m)부터 오르는 길이 심상치 않다. 계룡산처럼 돌과 바위만 있는 산은 아니지만 오히려 흙길이면서 경사가 급하게 느껴졌다. 정확히 1시간 만에 할미봉에 도착하니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낮게 내려앉은 구름이 산 구릉을 넘어가는 게 보이고 충분히 밝지 않은 시간 산 아랫마을은 조용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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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로 나무계단이 파손돼 있다.
큰 숨을 들이켜고 곧바로 다음 목표인 서봉(1492m) 등정을 시작했다. 출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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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내려가는 길에 나무사다리.
기 전 자료를 찾아보니 덕유산에 일부 등산로는 국립공원 부지가 아니어서 정비가 덜 되어있다고 했는데 이곳이 정말 그랬다. 바위가 겹겹이 쌓인 곳을 통과하는데 밧줄 하나가 나무 밑동에 묶여 위태롭게 보였고, 일부 등산로 계단의 나무는 깨져 그곳에 발을 디뎠다가는 곤두박질을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바위에서 조심히 내려오라며 누군가 만들어놓은 나무 사다리는 그나마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전국에서 찾아오는 등산로가 정비가 이 정도밖에 안 된 것에 실망스럽기도 했다. 전문 산악신발이 아닌 트레킹화를 신은 기자는 습기 머금은 경사로에서 발이 밀렸고, 낙엽을 밟고 미끄러져 두 번 엉덩방아를 쪘다.

등산 3시간 만에 오른 서봉은 빼어난 경관을 선보였다. 서봉에서 남쪽을 향해 바라보면 앞으로 더 걸어갈 능선이 아파트처럼 줄 서 있는데 가장 가까운 곳에 남덕유산과 가장 멀리 향적봉까지 눈에 들어왔다. 서봉에서 설천봉 상제루까지 보이는데 너무 멀리 느껴져 이때부터 이날 종주에 대한 불안감이 몰려왔다.

해발 1492m까지 올라왔으니 향적봉까지 높이 차이는 122m에 불과하다. 하지만 해발 고도차이는 산 종주에서 고려할 대상이 아니다. 서봉까지 올라왔으니 조금만 더 오르면 될 것 같지만, 등산이라는 게 마냥 올라가기만 하는 게 아니다. 당장 다음 봉우리인 남덕유산(1507m)까지 코앞에 뒀지만, 오히려 해발고도는 1300m까지 내려가다 남덕유산을 앞두고 급경사로 오르막이 시작된다. 또 열심히 남덕유산의 정상에서 바람을 쐬며 빵과 과일을 먹어 힘을 보충했지만, 다시금 하산하듯 내리막이더니 해발 1200m를 찍고 삿갓봉(1386m)까지 다시 올라가야 했다.

오전 11시 40분, 삿갓재대피소에서 서둘러 점심을 준비했다. 배낭에 넣어온 포장백반에 카레를 산악용 가스버너로 데웠다. 대피소마다 인근에 샘물이 있는데 5분 정도 내려가야 먹는물을 뜰 수 있다. 잠시 쉴 요량에 들른 대피소에서 물을 뜨려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삿갓재대피소는 그나마 샘터가 가까운 곳에 있었고, 특이하게도 그 샘물은 밑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는 수원지였다. 덕유산은 금강의 낙동강의 발원지를 품은 산이다. 그중에서 낙동강 발원지 샘물을 삿갓재대피소에서 물통에 가득 담았다. 점심을 먹고 충분히 휴식을 취한 뒤 다시금 등산가방을 맸다. 걸어온 길보다 앞으로 가야 할 거리가 더 많이 남아 있다. 무룡산과 가림봉을 지나면서 나뭇잎에 가을 색이 점점 진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붉고 노란색의 낙엽은 산맥 중에서도 양지바른 곳부터 물들었는데 햇볕에 그을린 아이들의 팔죽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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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엽령에서 바라본 덕유산의 능선. 가을단풍이 곱게 들고 있다.
동엽령에서 가장 기대했던 풍경을 마주했다. 완만한 경사에 시야가 확 트여 멀리까지 한눈에 보이는 그런 곳이다. 지리산에서도 세석평전이나 촛대봉에서 연하봉까지 구간이 고산지대의 평야지대처럼 평화롭다고 느낀 바 있다. 덕유산에서는 동엽령부터 향적봉까지 높은 나무가 없는 구릉지형이 계속된다. 비로소 골짜기를 타고 올라오는 바람을 마음껏 맞으며 여유 있게 걸어본다. 꽃은 없지만, 철쭉군락도 구경하고 노루오줌풀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산을 걸을 때 느낄 수 있는 가벼움이라는 게 있다. 어제까지 나를 고민스럽게 하고 걱정을 주었던 일보다 도전적인 생각이나 해보고 싶은 일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채운다. 능선을 오르다 말고 수첩을 꺼내 몇 줄 끄적여본다.

‘바람은 내가 나무인 줄 알거야’

능선에 선 사람 바람은 알까 / 단풍나무 철쭉 온갖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일 때

그 안에 나도 있다는 걸 / 나뭇가지 흔들리는 소리도 / 방귀 소리도 산속에서는 매한가지

바람은 또 그렇게 불어온다 / 나뭇잎을 타고 벌레 등껍질을 넘어 골짜기를 지나 나에게로.



등산을 기억하는 몇 가지 방법 중 산에서 느낀 바를 적어보는 것도 참 재미있는 일이다.

오후 5시 30분께 향적봉대피소에 도착해서야 종주 말미에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앞으로 2시간 30분은 더 내려가야 한다는 걱정이 시작됐다. 곤돌라를 타고 내려갈 것인지 끝까지 걸어 내려갈 것인지 설천봉까지 걸으며 계속 고민했다. 어떻게든 걸어 내려갈 수 있겠지만, 피로감에 이미 지쳐있었고, 해가 지는 상황에서 두려움도 있었다. 거기다 하산 후 다시 육십령고개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해 대전까지 운전해야 한다는 점도 고민의 무게를 더했다. 결국 곤돌라를 타고 하산해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는지 이미 뒤늦은 결정이었다. 곤돌라는 운행을 종료했고, 직원들이 문단속을 하는 상황이었다. 곤돌라 운행이 종료됐다는 설명을 들으며 난감해하자 담당 직원은 선뜻 저 트럭에 태워주겠다며 선의를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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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주의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내려왔다.
그렇게 결국 직원들의 퇴근용 트럭에 끼어 앉아 종주의 마침표를 찍지 못한 채 하산하고 말았다. 대피소에서 구입할 수 있는 음식을 가방에 넣어 처음부터 너무 무겁게 시작한 점과 체력안배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웠다. 덕유산은 쉬운 산이 아니다.
임병안 기자 victoryl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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