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인터넷에서 발췌 |
산모퉁이 외딴 집 한 채가 있었는데 노부모를 모시고 아들 내외가 살고 있는 집이었다. 우연히 그 집 앞을 지나가다가 안에서 고성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같이 가던 金서기와 한참을 집 밖에 머물러 소리를 들었다. 한참 후 金서기 말인즉 도시에 나가있던 남동생이 돌아왔는데 형제 지간에 싸움이 벌어진 것이라고 설명해 준다.
와족의 습관은 부모를 모시고 사는 아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게 되어 있다. 그런데 도시에 나가있던 작은 아들이 나타나 형에게 재산 일부를 떼어 달라고 하면서 언쟁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이 문제는 며칠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았고 드디어 친척들이 나서서 중재를 하며 결론을 지었다. 오랜 세월 관습을 무너뜨릴 수 없다며 친척들은 형의 손을 들어 주었고, 둘째 아들은 버럭버럭 성질만 부리다가 겨우 여비 몇 푼 얻어 다시 도시로 떠났다는 뒷 얘기다.
와족들의 결혼이나 가정의 습과, 전통 등은 다른 민족과 틀린 점이 많다.
보통 15세 이상이면 연애도 하고, 결혼까지 이어지는데 근친 간의 결혼이 일반적이다.
촨꾸냥(串姑娘)이라는 말은 와족들에게만 있는 남녀 활동을 뜻한다. 결혼 전 남녀간의 교제활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고모나 외삼촌 자녀들 간에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한다. 한마디로 근친상간인 셈. 상대를 고를 때 경제적 조건은 아예 해당이 안된다. 인물도 뒷전이다. 같이 어울리며 이성간에 감정이 통하면 그것으로 OK. 연애가 무르익으면 총각은 대개 삼촌을 내세워 여자 집 쪽에 중매형식을 취하게 된다.
이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것이 나이무첸(?母?)이다. 또 다른 말로는 마이꾸냥첸(?姑娘?)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하면 여자의 몸값을 일컬음이다.
금액은 최하가 큰 소 한 마리 값으로 경우에 따라 두 마리, 세 마리 값을 원하기도 한다. 기준은 장모가 시집 올 때 장인에게 얼마를 받았느냐가 적용되기도 하는데, 여자 집 쪽에도 돈을 주어야 하고, 신부에게도 따로 주어야 한다. 만약에 신랑이 가난해서 결혼식 때 돈을 내놓을 수 없으면 약속을 해야 한다.
그 약속이란 것이 참 재밌다.
#딸 낳으면 외삼촌 집에
사랑하는 아내를 맞아야겠는데 소 한 마리 값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다면 후불조건을 달기도 한다. 물론 특수한 경우지만 상황에 따라 여유가 있는 약속이 아닐 수 없다.
단 한 가지 방법은 결혼 후 딸을 낳게 되면 외삼촌의 아들에게 시집을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다. 아직 낳지도 않은 딸에 대한 얘기니까 절로 웃음이 나올 수 밖에 없다. 만약에 딸이 성장해서 외삼촌의 아들에게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버틸 경우도 있다. 그러면 외삼촌에게 찾아가 전 후 사정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만 한다.
얘기는 여기까지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결혼 후 꼭 딸을 낳는다는 보장도 없고, 외삼촌 역시 아들이 있다는 보장도 없다. 단지 그러그러한 가정하에 이루어지는 약속이고 보면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와족들은 결혼과 함께 분가를 한다. 독자인 때에는 반드시 부모를 모신다.
아들이 한 명 이상인 경우에는 부모가 어떤 아들과 한 집에 살 것인지를 결정한다. 다시말해 꼭 장남과 같이 산다는 원칙이 없다는 얘기다.
부모의 눈에 둘째 아들이 더 마음에 들면 큰 아들은 분가시키고 작은 아들과 사는 것이다.
부모의 재산은 같이 살아온 자식에게 100% 물려준다. 가정단위로 보면 우리네 처럼 가부장적이다. 남편의 권위가 대단하다는 얘기가 된다. 모든 결정권은 남편이 갖고 있어서 여자들은 순종의 미덕을 가장 크게 여기는 민족이다. 아직도 원시종교를 믿고 있는 이들이지만 간혹 불교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지금도 누가 몸이 아프면 동물의 영혼이 해꼬지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부락마다 점술가이자 해결사이기도한 무당이 존재한다. 감기가 들렸다면 그 즉시 무당을 찾아가 영혼을 달래는 주문을 외우게 하고, 약초 뿌리 같은 것으로 목 둘레나 어깨쭉지를 핏물이 배어나도록 문지르는 주술행위가 성행하고 있다. 옆에서 바라보면 하나같이 순박한 원시종교 행위이고 미신 신봉자들이다.
#원시종교 신앙 지켜
집에서 키우는 모든 가축이며, 산에서 자라는 동물들 모두에게 영혼이 있고, 이들 영혼들은 와족의 생활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는 그들이다. 와족의 고유한 언어도 있다.
사투리도 세 가지나 된다. 전체 인구를 합쳐도 삼십여만 명에 지나지 않지만 자체 언어를 갖고 있다는 것 만으로도 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좀처럼 습관과 전통을 바꾸려 들지 않는 이들에게서 고집스러운 면도 보이지만, 와족 특유의 정체성을 고수하려는 노력은 높이 사 줄만하다.
일테면 남여 똑같이 긴 머리를 기르고 있는 것 한 가지만 봐도 느낄 수 있다.
보통 무릎을 지나칠만큼 긴 머리칼을 자랑하고 있는데 물이 귀한 지역이다보니 매일 매일 씻지 못하기 때문에 때가 낀 채로 빗질만 열심히 한다. 도시민들이 그들 곁에 가까이 가면 심한 냄새를 맡게 되리라.
필자의 경우는 늘 그런 느낌을 갖고 있듯이 천성적으로 냄새를 맡지 못하기 때문에 참으로 편리하기도 하고 다행스럽다는 생각이다.
부락에 온지 한 달이 다 되어갈 무렵부터 갖고 온 구급 상비약이 바닥이 났다. 다친 곳에 바르는 소독수며 머큐럼과 설사 멎는 약, 두통치료제 등이 주류를 이루는 것들이다. 한국에서 특별히 부탁해서 건네받은 마이신은 정말 특효약 중에 특효약이다.
평소 약을 써보지 못한 이들이기에 항생제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한 번 얻어먹어본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 약을 원하지만, 관찰해 본 후 아니다 싶으면 좋은 말로 거절하곤 했다.
비록 취재여행에 과용하게 되는 약값이지만 얼마나 보람있는 가짜의사 노릇이었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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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존중하며 지내는 수신제
봄이 되어 파종시기가 되면 와족 남자들은 먼저 사냥길에 나선다. 물가에 사는 와족들은 낚시를 나가기도 한다. 사냥에 나가 멧돼지나 노루 같은 큰 짐승을 잡으면 이를 부락에 알리는데, 부락민들이 모두 나와 춤과 노래로 사냥나갔던 남자들을 환영해 준다.
사냥으로 얻은 짐승은 집집마다 나눠주고, 뼈들도 나눠갖고 집안에 걸어둔다. 사냥 나가기가 어려운 상황이면 부락에서 제일 큰 소를 잡아 나눠먹기도 한다.
농번기를 앞둔 부락민들의 단합축제 같은 분위기다. 이들의 자연숭배 사상은 철저하다.
산천수를 식수로 쓰는 이들은 봄철에 제일 먼저 물의 근원지를 찾아가 청소를 하고 집집마다 사용하던 대나무 물통도 수리하거나 교체한다. 수원지를 청소할 때도 집집마다 한 명씩의 남자가 동원되는데 그냥 청소하는 것이 아니라 예의 전통악기인 木鼓를 두드리며 춤을 추며 水神?를 지낸다. 이것을 와족들은 接新水?라 부른다.
여자들도 곱게 단장을 시작하는 때가 봄철이다. 긴 머리칼을 휘날리는 모습은 와족 여성의 매력을 한껏 과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절대로 묶지 않는 긴 머리 위에 은으로 만든 장식품을 얹고, 은제품 귀걸이, 은제품의 치렁치렁한 목걸이, 역시 은제품의 팔찌에 발목에까지도 은제품이 출렁거린다. 허리에는 검정칠을 한 대나무 장식품을 두르고 상의는 앞 뒤가 갈라진 차림에 치마는 질질 끌릴 정도로 길고 크다. 비록 피부색은 검지만 긴 속 눈썹 속에 커다란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와족 미인들을 보면 볼수록 정감이 간다. 한 가지 티를 잡는다면 그들이 사용하는 화장품이다. 꼭 밀가루를 덕지덕지 바른 것 같은 얼굴화장이 처음 보는 사람은 역겨움을 느낄 정도다.
#술이 없으면 예의가 아니다
술이 없으면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민족이 와족이다. 水酒라고 부르는 이들의 민속주는 수 천 년 이어온 풍습이기도 하다. 술 담그는 재료는 같은데 한 두가지 재료의 변화에 따라 맛의 차이가 난다. 먼저 쌀을 물에 충분히 불린 후에 계피와 ?果껍질, 파초 열매 껍질, 야생 약초 등이 주 원료로 10일쯤 발효시키면 술이 익는다. 술이 익으면 친척과 친구들을 부른다. 나도 여러 차례 초청을 받아 갔었다. 제일 먼저 걸른 첫 잔을 귀빈이나 연장자에게 권한다. 첫 잔을 받은 사람은 중지(中指)를 술잔에 담갔다가 땅바닥에 튕긴다. 이는 집 주인의 조상에게 드리는 감사의 표시다. 와족이 권하는 술을 받지 않으면 이것 역시 큰 실례가 된다. 다시 말해 술잔을 거부하는 것은 당신에게 감정이 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니까 조심할 일이다. 마시지 못하거나 마실 형편이 안되면 일단 잔부터 받고 마시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
초대 받아 가는 것 까지는 좋은데 억지로라도 건네주는 잔을 받아야 하는 일이 고역스러울 때가 많았다. 물론 우리네 같은 술잔이 아니라 긴 대나무통에 가득 담겨진 술잔을 돌리는 것임은 이미 소개한 바 있다. 와족촌에 와서 가장 맛있게 먹은 것은 ?肉??이란 요리다. 닭을 잡아 한참 끓이다가 닭을 건져내고 남은 국물에 쌀을 넣고 끓인다. 밥이 다 되기 직전에 닭고기 살만 발라내서 몇 가지 양념과 함께 밥솥에 넣고 밥이 다 될 때까지 저어가며 익히는 요리인데, 그 맛이 참으로 별미였다. 지금도 간혹 닭 요리라면 당시의 와족 민족의 특미가 생각나 군침이 돌군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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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일이면 정든 와족 부락을 떠나는 날이다.
30여일 간 이곳에 머물면서 흩어져 있는 3개 부락을 오르 내리며(고지대에 거주하고 있어서 부락에서 부락으로 이동하려면 계곡 아래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오르든가 아니면 산정상으로 올랐다가 내려가야 했으므로 오르내리며란 표현이 적당할 듯 하다.) 이들의 애환을 같이 느꼈다.
생전 처음 보는 외국인이라 신기하고 호기심도 많았지만 이들 특유의 수줍음 때문에 보름 정도는 근접하기가 어려웠지만 그 후로는 이들이 먼저 친근감을 보일 정도였다. 내가 지나치는 것을 보면 집안에 있다가도 뛰어나와 팔 소매를 잡아 끌고 들어왔다 가란다. 들어가봤자 어두침침한 마루방, 모닥불의 열기를 받으며 대접받을 것도 없고, 이들 역시 대접하고 싶어도 가진 게 없는 상황인지라 마시다 남은 농주를 내미는 게 전부다.
그러나 이들의 눈빛에서부터 온 몸 전체로 나를 환대하려는 모습이 풍겨옴을 감지할 수 있다. 그 동안 들고 왔던 비상약들이 골고루 전달되었고, 무척 귀중하게 사용해온 마이신 같은 약은 너무 효과가 빨라 토박이 무당들이 나를 질투할 정도였다.
마지막 밤이라고 서기와 촌장 그리고 학교장과 선생 두 명, 부락의 회장격인 청년 둘 등이 서기네 집에 모였다. 그 동안 구경할 수도 없었던 야릇하게 생긴 버섯을 들고나온 친구가 있는가 하면 학교장이 가난한 주머니를 털어 장닭 두 마리를 사는 눈치다.
술이 거나해 지도록 침묵들이다. 분위기가 무겁기만 하다. 더 머무를 수는 없느냐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같은 표정으로 일제히 나를 바라본다. 순간적으로 목이 메어온다. 고맙다. 너희들 모두 고마울 뿐이다. 술이나 마시자. 오늘 실컷 취해보자. 이렇게 뭉게버릴 수밖에 없었다. 남자답잖게 한 쪽에 앉았던 친구가 눈물을 훔친다.
그 옆에 있는 친구가 엉뚱한 얘기를 꺼낸다. 내가 갖고 온 약으로 많은 사람이 덕을 보았다면서 폐병을 않는 젊은 부인과 원인 모를 두통으로 학교에도 가지 못하는 어린 딸의 얘기를 꺼집어 낸다. 그러면서 밖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자 남자 한 명이 들어서는데 방금 얘기하던 여인의 남편이었다. 한 손에 술병 그리고 또 한 손에는 신문지를 둘둘 말아 쥔 것이 있었는데, 쑥 내미는 것을 엉겁결에 받아 펴보니 죽순을 말린 나물 뭉치다.
술은 권하기 위한 것이고 죽순나물은 선물이라고 했다. 모두 다 대취했다. 나중에는 모두 일어나 어깨동무를 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하고, 서로 껴안고 울기도 했다. 어떻게 침대까지 와서 잠이 들었는지 모른다. 목도 마르고 소변끼도 있어서 일어나 보니 뿌옇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주춤 주춤 나가 뒷 곁에서 급한 볼 일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왠 여인이 앞을 가로 막는다. 첫 날 운동장에서 불 같은 벼락키스를 퍼붓던 여자, 취한 척 남의 침대에 올라와 당황스럽게 만들던 여자, 어쩌다 마주칠 때마다 끈적끈적한 눈빛으로 쏘아보던 여자,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으니 대도시 공장이든 회사든 소개시켜 달라고 강짜아닌? 강짜를? 부리던 바로 그 여자였다.
오늘 떠난다는데 자기 집에서 아침밥을 대접하고 싶다며 새벽부터 문 입구에서 내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노라며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 끈다. 마지막 날까지 나를 난처하게 만드는 여자였다. 일부러 큰 목소리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옆 방에 金서기가 빨리 일어나도록 실랑이를 벌이는 척 했다. 고맙게도 金서기가 나타나 주었다. 그 역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눈물 콧물 흘리며 석별
金서기 역시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용단을 내린다.
"이 손님은 이미 이곳에서 몇 명이 모여 아침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으니 그리 아시오. 그리고 돌아가서 일자리를 알아보고 연락해준다고 했으니 그냥 돌아가는게 좋겠소." 내 마음을 읽었다는 증거다. 여인은 못내 섭섭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른 새벽부터 여인의 집을 출입하기는 정말 힘든 문제다. 경제적으로는 빈곤층에 들어가지만 마음만은 넉넉한 부자들인 소수민족 와족.
아직 환경을 다룰 줄 모르고 있는 그대로 전통만을 고집하는 이들이다.
우직하면서도 순박하기 그지 없으며 꾸미지 않은 맑은 심성의 소유자들이다. 배낭정리를 마치고 金서기가 준비한 오토바이를 이용해 몇 시간쯤 아랫마을로 내려가면 향(?)정부가 있는 마을이 나올 것이다. 버스 종점에 西盟?으로 나가 다시 란창?에 도착후 곤명(昆明)으로 가는 대형버스를 타면 내일 저녁쯤 심천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에 란창에서 차 시간이 맞지 않으면 하루밤을 보낸 후 아침차를 타야한다. 이렇게 마음 속으로 일정을 그려보고 있는데 문밖이 시끌벅적하다.
나가 보았더니 언제 모였는지 수 십 명의 부락민들이다. 대부분이 아녀자들이었는데 오늘 가지 말고 좀 더 있다 가라면서 애원을 한다. 취재를 마치고 떠나는 날이면 어느 소수민족 할 것 없이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이들 앞에 고작 할 수 있는 얘기라곤 내 곧 다시 올 것이다. 라는 말 뿐이다.
#병든 모녀가 눈에 밝혀
金서기와 촌장이 탄 오토바이 두 대가 부릉 부르릉 시동을 건다.
한 쪽 오토바이에는 내 배낭 두 개와 자잘한 보따리들이 실려있다. 이제 남은 한 쪽 오토바이 위에 내 엉덩이만 걸치면 출발이다. 그러나 눈물 콧물까지 흘리며 이별을 아쉬워하는 이들과의 실랑이가 무려 한 시간.
끝내 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길이 없다. 꾸불꾸불한 산길을 돌아돌아 내려오며 수 십 번이나 덜컹거리는 오토바이와 함께 엉덩방아를 찧다보니 종점이 있는 거리에 들어섰다.
이미 점심시간을 휠씬 넘긴 시간이다. 1시간 후에 출발한다는 마지막 버스가 기다리고 있다. 金서기와 촌장을 데리고 주막집에 들려 막국수로 대충 점심을 때우고, 金서기를 앞세워 의원을 찾았다.
원인 모르는 통증 때문에 학교에도 가지 못하고 폐병으로 누워있는 엄마 옆에서 시름없이 앉아있을 소녀가 눈에 밟혀오기 때문이다. 하얀색 가운이지만 언제 빨아 입었는지 때가 꾀죄죄한 차림의 젊은 의사 앞에서 약을 부탁했더니, 환자를 보기 전에는 처방을 할 수 없다고 거절이다.
그렇다면 왕진 비용을 줄 터이니 직접 부락에 갔다올 수 있겠느냐고 하니까 그것도 역시 어렵단다. 金서기와 촌장을 내 세워 졸라대기를 한참 후에야 겨우 항생제 종류를 살 수 있었다.
돌아갈 비용을 제외한 남은 돈 모두를 항생제 구입비로 쓴 후 金서기에게 약 전달을 부탁했다.
이미 시간적으로 볼 때 西盟?에 도착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은 끝일 것 같다. 허기야 김삿갓 신분에 어디 시간 맞춰가며 다닐 수 있을까 마는.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5일장
-김인환 시
가난과 부유함 비교할 줄 모르는
천진무구 소수민족들은 장날만을 기다리며 산다..
인근의 학교까지 문을 닫는
소수민족의 5일장
꾸냥은 지나쳤던 이웃 마을 머슴아가 그리웁고
머슴아들은 시장보다 꾸냥들 꽁무니 좊기가 바쁜 날
王서방은 삐엔딴 무게만큼 행복함을 흥얼거리며 장터로 향한다.
중국에서 태어났으니 중국 사람
하필이면 소수민족으로 태어나 대를 이어
恨을 유산으로 물려 받았다.
살아오는 동안 살아가는 동안
움켜쥔 채 버리지 못한 누더기 같은 가난
누가 이들을 신의 은총이라 부를 것인가
흰머리에 이 꼬이듯
두루두루 끼리끼리 부락 이루며
땅과 하늘만 바라보고 살아온 아름다운 사람들
이들에게 5일장은 축제이고 작은 명절
오늘따라 하루가 너무 짧고나
허허 고오공 파시(虛虛 空空 罷市)장터에 흑구 한 마리
어슬렁 어슬렁이다.
개념없이 먼 산 보며 컹컹 짖는다.
※삐엔:어깨에 긴 막대기를 걸치고 양 끝에 물건을 매단다. 우리나라의 지게와 같은 용도로 쓰인다. (중국의 소수민족 사회는 어디에나 5일장이 선다)
<문예지에 기 발표작품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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