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책표지와 영화 포스터. |
'살인자의 기억법'은 70세가 된 연쇄 살인마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게 되고 또 다른 연쇄 살인마를 만나 소중한 딸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는 시나리오다. 소설은 죽음과 공포를 반야심경에 빗대 1인칭 주인공의 철학적 글쓰기에 의존한 채 풀어나가지만 2017년 개봉한 원신연 감독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주인공 병수의 주위 망상 속 인물들을 병수의 분신들로 분산시킨다. 원작과 가장 닮아 있으면서 또 가장 먼 작품이 될 것이라는 감독의 말에 고개가 끄떡여진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 이미지. |
소설과 영화 모두 연쇄살인범 김병수가 있다. 원작의 그는 완벽한 쾌감을 위해 살인을 일삼은 사이코패스다. 기회가 되면 살인을 하는 무자비한 병수의 질문과 독백에 따라 한 방향으로 독자들을 몰아붙인다. 숨가쁘게 달려 막바지에 도달할때쯤 밀려드는 불안과 허무함. 김병수의 세상의 끝에서 소멸당하는 아찔함이 싫다면 영화를 보자.
영화속 그의 세상엔 살인의 동기가 있고,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인간미가 있다. 치명적인 반전을 버리고 부성애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다분히 상업적이다. 딸 은희와 박주태(혹은 민태주)도 원작과 영화 모두 존재하지만 이들의 결말 또한 전혀 다르다.
2. 공포의 기억이냐 아버지의 고군분투냐
소설은 1인칭인 병수 본인을 제외한 등장인물들을 사이코패스의 병적 기억의 산물로 만들어 버렸다. 빨리 읽었으나 오랜 후유증이 남는 이유는 독자들 모두가 살인자가 안내하는 대로 달리다가 급정거해 버린 탓이다. 결론은 공(空)이다
하지만 영화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은희(설현)를 지키려는 핏빛 가족사로 그려진다. 살인마에 대한 미움이 병수에게서 태주(김남길)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확신과 의심, 증오와 동정이 엇갈린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 이미지. |
책에서는 무기력하게 소멸한 김병수가 영화에서는 치열하게 기억에 대항하는 사내로 남는다. 상업영화에 흔히 등장하는 폭력의 전시물, 연쇄살인의 잔인함, 여성의 신체적 묘사등의 이미지화 대신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는 병수의 구겨진 얼굴에서 영화 '박하사탕'과 같은 먹먹함을 남겼다. 연쇄 살인마를 다루는 두 방법중 어느 쪽이 더 끌릴지 선택은 역시 관객의 몫이다.
tvN 예능 '알쓸신잡'으로 대중에게 알려진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 소설이든 영화든 그 무엇을 삼켜도 텁텁함은 남는다. 병수가 말했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
고미선 기자 misuny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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