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인환 |
소여물통이 훌륭한 타악기
이들의 춤은 무척 단조로워 보이지만 격렬하면서도 열정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타악기다.
아무리 보아도 영락없는 소여물통인데 그 두드리는 소리가 둔탁하면서도 묘한 여운을 남겨준다.
통나무에 홈을 파서 윗 부분과 옆 부분을 두드려 대는데 박자도 박자거니와 온몸을 흔들며 머리를 아래위로 휘두르는 폼이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춤사위들이다.
한국에서 개발한 「난타」라는 프로그램이 기억난다.
두드릴 수 있는 것은 깡통이든지 솥뚜껑이든지 소리를 얻을 수 있는 모든 걸 두드려대는 기발한 공연으로서, 국제무대까지 진출했던 그야말로 한국적인 타악기 연주였다.
소여물통이 저렇듯 훌륭한 타악기로 변신될 수 있다는 와족들의 전통이 지혜스럽게만 느껴진다.
한 시간쯤 연습이 계속되다가 잠시 멈추는 듯 싶었는데 지휘자 쯤 되어보이는 사람이 성큼 성큼 걸어오더니 내 손을 잡아 끈다.
나와서 같이 춤을 추자는 얘기였는데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극구 사양을 하자 옆에 있던 서기와 촌장이 등을 떠밀고, 운동장에 있던 와족 춤꾼들이 박수를 쳐댄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인 순간이었다.
나가자니 그렇고, 안 나가자니 또 그렇고 그런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마지못해 끌려나갔다. 그들은 맨 앞에 나를 세워놓고 한 사람이 춤동작 시범을 보여준다. 그들처럼 긴 머리칼이 없으니 목운동 밖에 안되는 꼴이지만 가슴을 앞 쪽으로 밀었다가 당긴다든지, 엉덩이를 흔들고, 아랫배를 넣고 빼는 동작이 보기보다 쉽지가 않다.
게다가 두 팔을 흔들며 묘한 모양을 짓는 것인데 하루 이틀 연습으로 될만한 춤사위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디스코 춤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옛날의 림보춤 같기도 한 이들의 전통춤은 영화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토인들의 춤과 많이 닮았다.
엉터리지만 그들의 춤사위를 흉내내려니 모두들 까르르 까르르 웃음판이다.
이왕 나왔으니 같이 놀아보자는 뱃짱으로 온몸을 흔들어 댔다.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땀이 흐른다.
사진=김인환 |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추던 춤
알고보니 이들의 춤은 깊은 역사를 갖고 있었다. 아주 아주 오래 전, 사냥이 주업이던 시절에 남정네들이 떠나기에 앞서 부녀자들이 모여 그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데서 시작되었고, 이웃 부락과 전쟁을 치루기 전에 역시 모든 부족들이 춤을 추며 무운을 빌었던 춤이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웃 부락과의 전쟁이란 곧 H족들과의 싸움을 의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소수민족이나 상황은 비슷하다. H족들은 시도 때도 없이 소수민족 부락을 공격하며 괴롭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도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이 고지대에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를 증명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평지에서는 H족들의 괴롭힘 때문에 살 수 없었던 그 옛날의 소수민족 역사.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중화'라는 폭 넓은 사상으로 거대한 땅과 숱한 민족을 아우르는 공산주의가 지배하고 있지만 아직도 H족들에 비해 많은 차별대우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며,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 소수민족들의 의식인 것 같았다. 횃불이 아무리 밝기로서니 대낮 같을 수는 없다. 어두컴컴한 속에서 시종일관 내 춤동작을 가르쳐주던 사람이 남자인줄 알았는데 끝난 후에야 자세히 보니 여자였다. 30대쯤으로 보이는데 긴 머리를 뒤로 넘겨 둘둘 말아 놓고 보니 얼굴 윤곽이 또렷해지고 비록 피부색은 검지만 미인쪽에 들어가는 맵시였다.
수고했다는 뜻으로 두 손을 든 채 모두에게 박수를 보내고 돌아서려는데 이 여인이 잽싸게 물병을 들고 온다.
"씨에 씨에! ??!" 인사를 하고 벌컥 벌컥 소리까지 내며 마시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 물병을 돌려 주려고 앞으로 내밀자 이 여인이 닷짜고짜 달려들어 내 볼에 키스를 퍼붓는다. 그것도 쪽 쪽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지켜보던 와족들이 박수를 치며 깔깔깔 재밌다는 모습들이다.
사진=김인환 |
땅바닥에 차려진 술상
대담한 소수민족 여인들을 만나면서 놀랐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날도 기습적인 키스 세례를 받고 보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다고 마주 붙들고 대응해 줄 수도 없는 일, 주춤주춤 뒷걸음질로 제자리에 돌아오니까 이번엔 李서기와 촌장이 박수를 쳐대며 기분이 어떠냐고 놀려댄다.
그러면서 자리를 옮기자며 이끈다. 李서기네 집 앞 마당이다. 그 사이 누군가에 의해 술상이 준비되어 있다. 비록 땅 바닥이긴 하지만 삶은 닭고기에 몇 가지의 야채안주, 그리고 이들이 즐겨마시는 옥수수 술이 있었다.
5~6명이 둘러 앉으면 딱 알맞는 바닥 면적인데 10여 명이 넘는 식구로 불어났다.
옥수수 술은 여러번 마셔본 적이 있지만 이곳에선 조금 거칠다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옛날 우리나라의 위스키가 처음 나왔을 때도 이렇게 거칠었던 기억이 난다.
李서기와 촌장, 그리고 학교 교장과 내가 기본적인 멤버이고 나머지는 계속 바뀌고 있다. 몇 잔 마시다가 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또 어디선가 나타나서 새롭게 옆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다. 그 가운데는 여자들도 듬성 듬성 끼어 앉았는데 불쑥 술잔을 들고 곁으로 와서 단 둘이 깐!(건배)하자며 나서는 여인이 있다. 이 모습을 보고 좌중이 또 박수를 쳐 댄다.
가까이서 보니 바로 그 여인이다. 벼락 키스를 퍼부었던.
잔을 부딪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여인은 주욱 한 입에 마셔버리고는 잔을 거꾸로 들고 터는 시늉을 한다.
이미 자기는 잔을 비웠으니 나도 어서 마시라는 눈치다. 얼떨결에 나도 주욱 잔을 비우고 거꾸로 터는 흉내를 낸 후 나도 모르게 잔을 내 밀었다. 한국에서의 버릇이 쉽게 가시질 않은 증거다. 한 잔 마시고 잔을 권하는 습관 말이다. 중국사람들은 결코 잔 돌리는 습관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잔을 내 밀면 술을 더 따라 달라는 줄 알고 술병을 들고 오게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나 역시 술이나 더 달라는 얘기가 되고 만 셈이다. 게다가 좌중들로부터 엄청 술이 센 사람으로 인식되어 버렸다. 너도 나도 같이 건배 하자며 잔을 내미는데 이미 거절하기에 어려운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아리랑도 불러주고
이들 역시 다른 소수민족처럼 술이 얼큰해지니까 그 자리에 서서 춤을 추는데 나머지 사람들은 즉석에서 아카펠라(?) 음악으로 흥을 돋구어 준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추다가 두 사람 세 사람으로 늘어나고 나중엔 모두 일어나 덩실 덩실이다. 그 모습은 영화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토인들의 춤을 연상하면 된다. 드디어 나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는데 엉터리 디스코 솜씨로 어울려 주었다. 비록 가난하지만 행복한 사람들. H족에게 떠밀려 산상으로 산상으로 피해 다녀야 했던 이들이 장구한 세월동안 한(恨)을 담아 노래와 춤으로 풀어내며 살아야했던 역사가 있다.
앞 집, 옆 집이 그러하고 또 뒷 집도 역시 비교거리가 없이 빈곤한 살림살이. 그러나 티없이 맑은 눈망울들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옛날 옛적 조상은 미얀마로부터 왔다고 한다. 아주 검정색 피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족들처럼 황색도 아닌 유색인종이다. 검은 피부지만 윤기가 흐르는 아름다움도 지니고 있다. 머리 숫은 많고 또 남여가 길게 기르고 있다. 키는 작지만 우람차다. 정이 많아서 남의 불행을 보고 덩달아 우는 모습들을 보면 옛날 어린시절을 회상케 된다.
너무 정이 많아서 탈인 것이 우리 민족이 아니던가.
이날밤도 처음 준비는 李서기가 한 모양이지만 이 집 저 집에서 술이며 안주거리를 떨어지지 않도록 들고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웃고 떠들며 중간 중간에 춤까지 추어대는 바람에 술기운은 취하고 깨고를 반복했다. 우리나라 노래를 듣고 싶다고 조르는 통에 아리랑을 불렀더니 이들은 금새 이 노래에 맞춰 춤을 춘다. 참으로 정열적인 사람들이다.
아침식사 한 끼는 한국식단으로
앞 마당 잔치는 밤 12시가 넘어서야 파장이 되었다.
너무 피곤해서 씻지도 않은 채 들어와 그대로 누워 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생리적 작용때문에 소변을 볼 양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새벽까지는 이른 캄캄한 밤중이다.
문 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서 귀를 세워 보았더니 분명코 인기척임에 틀림없었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 같았다.
끝난 줄 알았던 술판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가 싶어 형겊 쪼가리로 문을 대신한 차일을 밀치고 밖으로 나서는 순간 10여 명의 검은 물체들이 후닥닥 뛰어 달아난다. 그리고 깔깔 깔깔 웃어대는 소리들.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이었다. 이 역시 아침에 들은 얘기지만 이곳 소수민족 처녀들이 생전 처음 낯선 외국인이 자기들 마을에 들어왔다는 것이 하도 신기해 잠자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구경거리 대상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보며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온다.
날이 훤히 밝았는데도 아무도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의 소수민족들은 아침잠이 많다. 보통 8시가 넘어 일어나고 그때서야 아침식사 준비를 한다. 9시 반이나 10시쯤에 아침식사가 보통이다.
6시 30분이나 늦어도 7시엔 아침식사를 해야 하는 습관(실은 당뇨병환자 이기에 너무 일찍 배가 고프다.)때문에 나는 버너와 코펠을 들고 다닌다. 먼저 쌀 한 줌을 씻어 밥을 끓이고, 잊지 않고 챙기는 된장병을 열어 적당량의 된장을 푼 후 감자나 양파 같은 것을 조금 썰어넣고 된장국을 만든다.
간단한 아침식사지만 유일하게 하루 한 끼는 우리 식의 식사를 한다고 자위하며 이날도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마을 구경에 나섰다.
오전 9시가 지나면서 이곳 저곳에서 드문드문 사람들이 눈에 띠기 시작한다.
사진=김인환 |
유난히 담배를 즐기는 민족
보통 두 세 가구가 모여 있고 또 2~3분 걸어가야 산 모퉁이를 끼고 두 세 채, 또는 서너 채가 모여있는 식이다.
유난히 무성한 대나무 숲을 기고 산 모퉁이를 돌 무렵인데 7~8세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저만치서 걸어오고 있다. 인민군모 비슷한 국방색 모자를 삐닥하게 쓰고 있었는데 아니 이게 왠 일이냐? 담배를 멋지게 피워대면서 어른 흉내를 내는 것이 아니가. 깜찍하다고 해야 할지, 앙징 스럽다고 해야 할지 금방 표현이 되질 않는다.
이 꼬마녀석은 내가 옆에 다가 섰는데도 전혀 부끄럼 같은 내색도 보이질 않는다.
한 손에 든 담배를 입에 갖다 대더니 연신 뻐끔뻐끔이다.
소수민족들 가운데서도 유난히 담배를 즐기는 민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을 도착 며칠 후의 일이다. 남녀노소 구별없이 장소와 때를 가리지 않고 이들은 담배를 피어 문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이들이 즐겨 피우는 담배는 한 갑에 50전 짜리다. 도시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담배 종류다.
한 대 얻어 피어 봤는데, 어찌나 맵던지 콧날이 쌔앵할 정도였다. 그리고 짙은 풀냄새가 위를 자극한다.
어른들 사이에 끼어 있는 어린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피어무는 담배. 이를 보는 어른들은 그냥 무관심일 뿐이다.
허기야 그들 역시 어린시절부터 그러했을 터이니 그냥 무덤덤하게 보아 넘길 수 있으리라.
부자지간에 맞 담배는 고사하고 손자와 할아버지가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우리네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않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초상 소식에 "절대 가보지 말라" 신신당부…
와족 부락에 기거한지가 10여 일 되었다.
아랫 쪽 부락에서 초상이 났다고 부락 서기며 촌장이 아침부터 바쁜 모습이다. 그런데 이들은 내가 절대로 가보지 말라고 몇 번이나 신신부탁을 한다. 여자가 자살을 한 것인데 나중에 이야기 해 줄터이니 가 볼 생각은 아예 말라는 것. 서기와 촌장은 이틀 후에나 돌아왔다. 피곤에 지친 모습들이다. 훗날 이들에게서 듣게된 장례방법이 독특했다.
먼저 죽은 사람에게 죽기 전에 입었던 낡은 옷을 입히고 겉옷은 새옷을 입힌다고 한다. 그런데 겉옷을 뒤집어서 입히고 앞뒤를 바꾸어서 입힌다. 죽은 사람을 편하게 해 준다고 단추를 모두 떼어 버린다.
장례를 할 때 남자이면 총소리를 울리고 여자이면 북을 쳐 준다.
성인이 아니면 화장을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죽지 않거나 자살이나 물에 빠져 죽으면, 또는 난산 도중에 죽거나 짐승에게 물려 죽었으면 수림에 들어가서 묻을 때 무덤 밑에 가시같은 것을 놓아 손과 발이 찔리게 하는데 이것으로 징벌하는 것이라고.
토장을 할 때 달걀을 던져 보는데 달걀이 깨지면 무덤자리가 좋고 달걀이 깨지지 않으면 무덤자리가 나쁘다며 다른 곳으로 옮긴다.
서기와 촌장의 장례풍습 이야기를 들으며 참 이상한 풍습도 다 있다라고만 생각할 뿐이다.
소학교의 기숙사
소수민족 부락에 있으면서 가장 불편한 애로사항 가운데 하나는 식사시간이 맞지 않다는 점이다. 아침식사는 보통 9시~10시에 하며, 점심은 오후 2~3시, 그리고 저녁은 해지기 전에 마쳐버린다. 점심과 저녁은 그들과 맞춘다 해도 오전 6시 30분~7시엔 식사를 해야 하는 내 습관으로선 고역이 아닐 술 없다. 하는 수 없이 고안해낸 것이 등산용 코펠과 버너를 이용해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이다. 출발 시에 된장을 한 병 담아오고 감자나 마늘은 현지에서 조달하여 된장국을 끓인다. 밥 한 그릇에 된장국 한 가지라도 맛은 꿀맛.
오늘도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한참이 지나서야 金서기가 일어나는 게 보인다. 딸 아이는 아침도 먹지 않고 곧장 학교로 간다. 학교에서는 기숙사에서 묵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죽을 끓여 준다. 딸아이도 이 틈에 끼어 한 그릇 얻어 먹는 눈치다.
수 십 명의 남녀 어린이들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는데 기숙사 비용은 따로 없고, 방학 때 집에 돌아갔다가 오면서 쌀이며 야채 등을 짊어 질 수 있는 만큼 등짐을 지고 온다고 한다. 물론 그것으로 수 개월 간 먹는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을 터, 썅(?)정부가 주는 약간의 보조금으로 부족분을 해결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오전 11시쯤 金서기와 둘이서 마을 구경을 나섰다. 긴 담뱃대를 뻐끔 뻐끔 빨아대며 실을 짜는 여인들이 보인다. 비쩍 마른 강아지들과 돼지새끼들이 어슬렁거리는 부락은 한적 하기만 하다.
그 중 한 집을 택해 金서기가 앞장을 선다. 집 구조가 대동소이한 모습으로서 받침 기둥이 있고 그 위에 목조가 들어서 있다. 대 여섯 계단을 올라가면 곧장 큰 방 하나가 전부다. 빛이 들어와야 할 창문은 없고 지붕 두 군데쯤에서 약간의 햇살이 들어오는 게 유일한 채광로다 보니 10여분 쯤 지나야 방안이 보일 정도다. 방 한 쪽으로 발목 높이의 낮은 침대가 놓여 있는데 인기척을 듣고 누워있던 여인이 비스듬히 일어나 앉는다.
소수민족 풍습병 흔해
침대 모서리엔 10살쯤 돼 보이는 소녀가 턱을 고이고 앉아있는데 그 역시 건강이 좋아 보이질 않는다. 침대 옆에는 벽돌 몇 개로 만든 모닥불이 있고 그 위로 시커멓게 그슬린 주전자가 받침대를 이용해 매달려 있다. 1년 365일 하루도 불씨를 꺼트리지 않는다는 이들의 습관 때문에 한 여름에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을 뻘뻘 흘리게 만든다. 金서기는 반갑게 그들을 부르면서 몸이 좀 어떠냐고 묻는다. 침대 위의 여인은 빙긋이 웃는 듯 마는 듯 대답이 없다. 내가 무슨 병으로 누워있는 것이냐고 묻자 金서기는 대뜸 폐병이라고 답한다. 딸아이는 소학교 4학년인데 전부터 무릎이 아파 학교에도 못가고 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무릎 통증. 소수민족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병이 소위 풍습병이라고 하는 관절염 계통과 편두통, 그리고 폐병 등이다. 높은 고지대,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왜 이런 병으로 고생을 해야하는지 그 대답은 간단하다. 물이 귀한 반면 펌프시설 주변의 환경이 엉망이다. 개나 돼지, 닭, 오리 같은 동물들의 배설물이 여과되지 않은 채 수원지로 흘러 들어가고, 집안 구조 자체가 병균을 불러들인다는 것을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병이 걸려도 두 세 시간 걸려 나가면 있는 의원엘 가지 못한다. 돈이 없기 때문이다. 겨우 푼돈을 모아 약국까지 찾아가지만 근본적인 치료약은 어림도 없고, 임시방편 약 몇 알 사오는 게 고작이다. 그래서 마을마다 무당이 있고, 말도 안되는 주문을 외어대며 괴상한 풀 뿌리로 피가 나도록 목덜미를 문지르면 끝이다.
잠시 후 중년 사나이가 성큼 방안으로 들어선다.
그림처럼 앉아있던 소녀가 발닥 일어나 달려가더니 안겨든다. 여인의 남편이자 소녀의 아빠였다.
金서기와 나를 보더니 만면에 웃음을 띄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金서기가 그들의 언어를 사용해 무어라고 묻는 눈치다. 힘없이 바닥에 주저 앉으며 한숨부터 쉬는 사나이. 金서기의 말인 즉 새벽같이 아랫마을 형님집에 약값을 빌리러 갔다가 그냥 돌아왔다는 얘기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김인환 시인은 시집<님의 마음에:1968년> (비가 내리는 :1970년) (다시 한밤에 돌아와:1973년) (시음집:1978년:한국 최초의 음반시집) (바람의 노래:1992년) (저 높은 곳을 향하여:1998년) (낙엽이 되어보지 못한 그대는;2013년) 등의 시집과 방송칼럼집 (내일을 향하여), 시론집으로 (마두금을 어디서 찾나) 등이 있다. 1972년 부산 최초의 시 전문지를 발간한 바 있으며 MBC, KBS, 한국경제 등에서 30여 년 간 언론인으로 활약했다. 부산 크리스천 문인협회 회장, 중국 광동성 한인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국 문인협회, 현대시인협회,국제 펜클럽, 대전 펜클럽 회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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