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선 편집부장 |
양 손 가득 선물을 들고 '딸랑딸랑' 방울 소리가 나는 수퍼마켓 안으로 들어서면 따뜻한 냄새와 얼굴들이 다가온다. 유리지갑을 털어 무리해 장만한 보따리들을 별 거 아닌 듯 무심하게 안겨드리고 소매를 걷어 붙인 채 부엌으로 향한다.
몇 년 전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엔 추석 전날 온 가족들이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조그만 수퍼마켓 냉장고의 술 칸이 비어갈 즈음, 한 번 맛보면 다음해에 반드시 또 찾게 된다고 소문난 어머니의 담금주가 나오곤 했다.
아들도 딸도 며느리도 사위도 솔 향기 가득한 담금주에 취해 서울생활의 고단함, 승진시험의 압박감,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를 지워버렸다.
집안 어르신의 부재 탓인지 아니면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 각박한 일상 탓인지 지금은 변했다. 의식을 치르듯 모여 서로의 안부만을 서둘러 묻고 추억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뿔뿔이 흩어진다.
그렇게 또 민족 최대의 명절 추석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무려 열흘간의 황금연휴다.
이렇게 오랜 휴일이 있었던가? 대체휴일과 임시공휴일까지 합쳐 9월 30일을 시작으로 개천절(10월 3일), 추석 연휴 (10월 3일~5일), 대체휴무 (10월 6일), 한글날(10월 9일)까지…. 달력을 넘기는 순간 잠시나마 가슴이 뛰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시공휴일 지정을 발표하며 "모처럼 휴식과 위안의 시간이 되고, 내수 진작과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는 기회가 되도록 잘 준비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에 발맞춰 해외여행을 계획하거나 색다른 가족행사 등 행복회로를 돌리는 사람들에게 올해는 그야말로 '최고의 추석'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례상 비용과 선물, 여행비 부담 등으로 인해 허리띠를 죄야 하는 국민들은 '최악의 추석'일 것이다. 정작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극장, 외식업체, 문화시설 등은 비싼 휴일요금을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일터로 나가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추석 당일까지도 업무에 임해야 하는 근로자의 존재도 우울한 팩트다. 그러다 보니 사상 최장의 추석 연휴를 맞이하는 국민들의 감정은 희비의 쌍곡선을 긋는다.
가계빚이 사상 최고치인 1400조를 육박하는 현실 속 일 년에 두 번 뿐인 명절에도 가족을 보지 못하는 취준생,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불안한 미래로 가족을 이루지 않는 나홀로족, 밀린 임금을 받지 못했다거나 잔업 때문에 고향길을 접어야 하는 씁쓸한 추석단상은 2017년에도 존재한다.
가을(秋)과 저녁(夕)이 합쳐진 이름의 한가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선조들의 말처럼 이번 추석때는 보고 싶은 얼굴들 마음 껏 보고, 신나게 웃었으면 좋겠다.
세상 살기 힘들수록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가족'이기 때문이다.
고미선 기자 misuny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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