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송대 교양교육원 초빙교수 송지연 |
한국에는 주입식 교육에 대한 일종의 트라우마나 콤플렉스가 있는 것 같다. EBS 다큐멘터리로 방영되었던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는 창의성을 죽이는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한 개탄이 그 골자다. 교수의 농담까지 수동적으로 받아 적는 "필기의 신"만이 A+를 받더란다.
비판도 나왔다. 지식의 수용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반론이다. 창의성이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것들을 새롭게 조직하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기에, 기존의 것이 없이는 새로운 콘텐츠의 생산도 불가능한 법이다.
좀 다른 얘기를 해보자. 시험에 나온다고 짚어주거나 필기해두라고 지시해야지만 그제야 펜을 들고 메모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 자발적으로 농담까지 받아 적는 건 제법 적극적인, 말에 대한 읽기 행위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핵심 내용과 농담을 구별해 구조도라도 그려가며 적었다면 맹목적인 수동성으로만 보기 애매하다.
교수의 생각을 메모하지 않는다는 학생들은 대부분 이공계열 전공자였다. 김소월의 진달래꽃에 대해 논하라는 서술형 문제의 경우, 답안은 다양한 생각의 레이어를 층층으로 쌓아 인문적 살을 붙인 글이 되어야 한다. 인문사회계열에서 농담까지 받아 적는 학생들의 전체 학점이 높은 것은 의외로 그들의 지식 구성력과 의사소통의 기술 덕분일 수도 있단 얘기다.
교수의 말을 배우는 건지, 학문을 배우는 건지 모르겠다는 한 인터뷰이의 볼멘소리에 부쳐 인문학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지 않을 수 없다. 정말로 교수의 생각을 배운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일까. 철학은 공자의 생각에 대한 주자의 생각에 대한 교수의 생각에 대한 나의 생각,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대한 플라톤의 생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으로 무한히 차원을 넓혀가며 이루어진다. 객관적 사실로 갈아치워지는 과학 지식 생산의 메커니즘과 다르며, 그럼에도 과학적 사고와 연관되는 면이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해서는, 텍스트 상에 보이는 것만큼은 정직하게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물리법칙을 공부하는 분야는 ? 교수가 실험을 하든 학생이 실험을 하든 ? 최소 같은 조건의 실험이라면 실험 결과 자체야 동일할 것이다. 스승과 제자가 평등하다. 그러나 인문예술 분야는 같은 텍스트를 보아도 누군가는 까막눈이고 누군가는 천리안이다. 선생의 권위와 자율이 의외로 더 요구되는 것이다. 나보다 많이 보는 이가 무등을 태워주면 그걸 딛고 나는 또 다른 세계를 자유롭게 그려나간다. 선생 또는 전문가의 권위를 수용하고 인정하는 것을 주입과 억압으로 해석하려는 것이야말로 방어적 고정관념이다. 사제 간에도 계급논리 기반 피해의식부터 작동시키는 것이다.
자기 관점을 정립해보는 경험은 역설적으로 남의 관점이 어떻게 정립되는지를 지켜본 사람에게 주어진다. 2차원의 선에 갇힌 개미가 칸을 넘어 다른 칸으로 이동하려면 3차원의 축을 필요로 한다. 춤을 배울 때에도 강사가 선보이는 동작을 따라해 보며 안 쓰던 근육을 쓰는 과정을 밟은 후에야 자기만의 멋스런 춤을 출 수 있게 된다. 세밀한 단계가 펼쳐져 있고 그 생각이 보다 고차원이라면, 사고의 모방은 곧 창의를 위한 즐거운 훈련이다.
송지연 우송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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