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김인환 |
#입장이 불가능한 소수민족 와족교회
운남성 성도 쿤밍(昆明)에도 소수민족들의 문화공간이 밀집되어 있는 곳이 있다.
입장료가 비싸 같은 중국인이라도 많이 찾는 곳은 아니다.
수 백만 평의 넓은 대지 안에는 중국의 55개 소수민족들의 독특한 문화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또 하루 3,4회 그들만의 소 공연을 준비하고 있어 관람객들은 시간표를 잘 활용하면 소수민족들의 공연을 관람하면서 즐길 수가 있다. 내가 와족의 캠프를 지나칠 때였다. 와족 10여 명이 둘러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복음성가였다. 마침 그들은 공연을 마치고 휴식시간인 것 같았다.
두 명은 기타를 치고 한 명이 드럼을 치며 (내게 강 같은 평화)가 연주되고 있다. (내게 강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할렐루야/ 내게 강 같은 평화/내게 강 같은 평화/내게 강 같은 평화 넘치네)
내 귀가 벌름거릴 정도로 나는 깜짝 놀랐다. 배낭을 내려놓고 배낭 안에서 하모니카를 꺼내 그들과 합류했다. 나의 이같은 행동에 이들은 더욱 신이 났는지 손벽을 치기도 하고 춤까지 추면서 템포가 빠른 복음성가를 연주하기도 했다 즐거운 시간을 마치고 그들이 내 주는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들 와족들은 언제부터 예수님을 믿기 시작 하였느냐?"
"그것은 잘 모른다. 아버지 어머니가 교회를 다니고 계셨으니까 아마 오래 되었을 것이다."
"그럼 너희들 교회가 있느냐?"
"있다."
"어디쯤 있느냐?"
"여기서 약 30분쯤 가면 있다."
"이번 주일에 내가 참석해도 되겠느냐?"
"그건 모르겠다. 선생님께 물어 봐야만 한다."
"내가 그러면 이번 주일에 찾아가 보겠다."
중국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있다 면서도 기독교의 경우 삼자교회만을 인정하고 여타 교회는 문을 열지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중국의 3자교회란 이미 알려진대로 (3자 애국 운동위원회)의 줄인 말로써 자치(自治), 자양(自養), 자전(自傳)을 의미한다.
그들이 얘기하는 와족 교회도 삼자교회로서 내가 막상 예배시간에 맞추어 교회를 방문 했으나 문이 굳게 잠겨서 있어 들어 갈 수가 없었다. 간혹 늦게 오는 사람이 있어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문을 비스듬히 열고 신분을 확인한 후에야 입장을 시키고 있었다.
결국 나는 예배당입장이 어렵게 되었다. 예배시간을 마치고 목사님이라도 만나고 싶었지만 예배를 마치고 어느 문으로 언제 나갔는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교인은 약 30명 정도였고, 목사는 독일인이라고 알려졌다. 교회당은 평소에는 늘 잠겨 있다가 주일 예배시간에만 열린다고 했다. 교인이 아닌 사람, 특히 민족이 다른 사람은 예배에 참석할 수 없다는 것이 삼자교회의 법칙이라고 했다. 목회자는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봉은비는 없다. 목회자도 다른 직업을 갖고 있으며 주일 예배시간에 나와서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광동성의 대도시에 있는 한국인 교회들도 조선족이나 한족(중국인)의 출입을 꺼려한다. 물론 한국인 교회들은 3자교회가 아니다. 그동안 공안 당국에서 임시로 묵인하고 있을 뿐 결코 허가가 난 것은 아니므로 늘 불안했었다. 3년 전 광저우 한인교회에 수 십 명의 공안들이 몰려와 교회문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막았다.
그동안 삼자교회로 들어오라고 수차례 통보를 했으나 무시하고 있다는 이유로 교회 봉쇄령을 내린 것이다.
교회 장로님들이 나서서 종교국과 여러번 만나 협의 끝에 교회사용은 결국 금지되었고 시내 호텔을 빌려 주일 대예배만을 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는 그 다음 주일에도 와족교회를 찾아갔다. 그러나 끝내 나는 그들과 함께 예배를 볼 수 없었다. 이들이 선생님이라 부르는 독일인 목사님을 만나보기로 했다. 수소문 끝에 시내에 그가 근무하는 독일 무역회사를 찾아갔다. 막상 만나고보니 30대 후반의 젊은이였다.
성격이 무척 활달해서 대화하기가 편했다. 자신은 독일에서 목회활동을 했지만 중국에서는 많은 부분에 제약이 있다고 토로했다. 매 주 금요일에 다음 주 설교내용을 종교국에 제출하여 사전 결재를 받아야 하고 일체의 다른 프로그램은 아예 생각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훗날 소수민족 취재탐방 도중 운남성 최 남방 뿌랑산에 있는 소수민족 뿌랑족 촌에 들어갈 때였다. 부락 입구 길가 담벼락에 깜작 놀랄 괴 벽보를 발견하고 놀란 적이 있었다.
일반 모조지 전지 크기의 커다란 종이 위에 누군가가 물을 끼얹으며 기도를 하는데 하늘나라, 하나님의 축복, 영혼 등을 의미하는 몇 장의 그림들이 있었다. 그림의 밑에는 이같은 사람들을 발견 즉시 가까운 공안국에 신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은 기독교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섬찟했다.
이 지역에 선교차 왔던 한국 선교사 한 사람이 밤에 잠을 자다가 집 주인으로부터 공안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듣고 창문을 통해 급히 도망쳐 나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내가 다녀간 6개월 후의 일이다.
아직도 중국 내륙지방에는 기독교를 금기사항으로 인식되고 있어 선교활동이 무척 힘들다.
사진=김인환 |
#와족자치현을 찾아
쿤밍(곤명)에서도 멀리 떨어진 소수민족 와족을 찾아가기로 했다. 참으로 먼 길이었다.
곤명(昆明)에서 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10시간 만에 도착한 서맹현 와족자치현.
퇴근 시간이 가까울 무렵인지라 서둘러 정부 청사를 찾았다. 수 백 개의 돌계단을 오른 후에 장엄한 건물을 만날 수 있었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는 듯 내부 단장이 깔끔하다. 문화국장실을 두드리니 여비서가 왕방울 눈망울을 굴리며 맞이한다. 어디서 온 누구냐고 묻는데 표준말에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어 대화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내 소개를 하니까 그때서야 온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찮아도 기다리고 있었다. 국장님은 행사 준비 관계로 회의 중이고 내가 가야 할 와족촌 영덕(永德)촌장이 오전부터 와서 기다리고 있노란다. 그러면서 쪽지를 하나를 내민다. 정부청사 앞 오른 쪽에 보면 식당가가 있고 쪽지에 적혀있는 집에 가 보면 촌장을 만날 수 있을 거라면서 식당에 지금 곧 전화를 넣겠다고 했다. 허기야 오전 8시에 昆明을 출발 할 때는 늦어도 오후 2시면 도착할 줄 알았다.
어제 省 정부에서 마지막 西盟? 정부에 내가 간다는 통보를 할 때만 해도 내용은 같았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내가 오후 2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알고 있을 수 밖에. 그나저나 오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촌장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다. 서둘러 문화국장실을 나왔다. 들어올 때 너무 바쁜 마음에 온 몸에 먼지를 털지 않고 들어간 것도 부끄러운 일이었다. 내려놓았던 배낭을 다시 짊어지려는데 풀썩! 먼지 다발이 날아오른다.
#온종일 기다렸다는 와족 촌장
서부 대개발이란 중국정부의 정책 때문에 어디를 가나 도로 공사판이다. 그러니 차 안으로 밀려드는 흙먼지들을 피할 길이 없다. 승객들의 온몸은 하나같이 먼지가 뽀얗다. 얼굴도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인데, 그 모습 그대로 사무실에 뛰어 들었으니 그 여비서에게 나의 첫 인상은 아얘 구겨진 거나 다름 없으렸다. 다시 수 백 개의 계단을 내려와 한참을 걸어가서야 식당들 십 여 개가 줄을 잇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쪽지에 적혀있는 식당 이름은 두 번째 집 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식당 앞에는 노동자들인 듯 보이는 거무스레한 사나이 5~6명이 서 있다. 그들 옆을 지나쳐 식당 문을 열려고 하는데 서 있던 사나이들 가운데 한 명이 잽싸게 앞을 가로 막는다. 혹시 한국인이냐? 그렇다고 했더니 시커먼 손을 쑥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그러면서 자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와족(?族)촌장이라는 것이었다. 술 냄새가 확 풍겨온다.(나보다 큰 키에 떡 벌어진 어깨가 다부지게 생겼다. 30내 중반쯤으로 보이는데 같이 둘러 서 있던 사람들을 일일히 소개하면서 모두 같은 부락 사람들이라고 한다. 인사를 끝내자마자 이들은 내 배낭을 벗기기도 하고 양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가방들도 빼앗듯이 받아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간다.
나를 기다리며 무료한 시간을 술로 채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리에 앉자마자 잔을 따라 내 앞에 놓으며 우선 한 잔 하고 보잔다. 목도 컬컬하던 차여서 주욱 한 잔을 들이켰다. 白酒였는데도 도수는 무척 낮아서 우리나라 막걸리 정도 수준 같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소수민족들이 즐겨 마시는 미주(米酒)였다.
#후에 동참한 문화국장
말로만 듣던 소수민족 와족.
간혹 TV에서 보면 남여 구별없이 칭칭 늘어뜨린 긴 머리를 앞뒤로 흔들며 춤을 추는 민족들이다. 막상 식당의 작은 탁자에 둘러 앉아 자세히 뜯어보니 검붉은 얼굴색에 반짝 반짝 빛나는 검은 눈동자들이 이채롭다. 통계자료에 의하면 이곳 云南省 두 곳의 지역에 분산돼 살고 있는 이들의 전체 숫자가 35만 여 명에 불과하다. 村長과 서기(書記)가 같이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일행들은 볼 일이 있어 나왔다가 같이 합석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오늘은 시간이 늦어서 부락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그러나 지금 당장 출발하면 영덕향 정부가 있는 곳까지는 갈 수 있다고도 했다. 縣정부 문화국장이 회의를 마치는대로 이곳에 오겠다고 했으니 섣불리 대답하기가 어렵던 차였는데 건장한 세 명의 사나이가 식당문을 밀치고 들어선다. 와족 청년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반갑게 그들을 맞이한다. 나 역시 엉거주춤 자세로 그를 맞이하려는데 덥석 먼저 손을 내미는 40대 중년 사나이, 그가 바로 문화국장이었다. 주인이 달려와 부랴부랴 의자 세 개가 당겨지고 다시 자리에 앉은 일행들은 오래 헤어졌다 만난 형제나 되는 것처럼 화기애애하다.
내가 늦게 도착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문화국장은 "아닙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요즘 도로공사 때문에 곳곳마다 길이 막혀서 자칫 잘못하면 한밤중에 도착할 수도 있는 걸요. 그렇지?" 하며 같이 온 두 명의 일행에게 동조를 구하기도 한다. 그러자 그들도 "그럼요. 정말 빨리 도착하신 겁니다. 우리들은 밤 10시쯤이나 되어야 도착하시는 거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라며 맞장구를 친다. 내가 미안해 할까 봐 마음을 덮어주려는 배려가 깔려 있음직한 그들의 대화가 맘 편히 들린다. 문화국장을 수행한 두 사람은 정부의 계장급 직원들이었다. 이미 날은 컴컴하게 어두워지고 있다.
#예약된 호텔로 옮기다
미리 성정부에서 연락을 받았기 때문에 알고는 있지만 와족촌 취재는 무엇 때문에 왔느냐며 궁금해 하는 문화국장의 질문이 이어진다. 이미 술잔은 몇 순배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와족만이 아니라 중국의 56개 민족 모두를 취재 중이라고 했더니 하나같이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어떤 이는 (몇 십 년 걸려도 힘들 터인데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무슨 몇 십 년? 십 년 정도면 되겠지! 하기도 한다.)
한 부락에 한 달 내지 두 달 정도 머무르면서 같이 생활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까 고개들을 끄덕이며 또 걱정들을 한다.
소수민족들이 사는 촌동네가 워낙 가난해서 먹는 것, 자는 것 등이 보통 힘들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견딜 수 있겠느냐는 얘기들이다. 여러분들이 자고 먹는데 나라고 못 할 게 뭐냐며 걱정해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문화국장이 더 늦기 전에 예약해둔 빈관(賓館·호텔)으로 가자며 서두른다.
그리고는 와족 촌장과 서기에게 "자네들은 내일 아침 10시까지 빈관 앞에서 만나 모시고 가라"며 일방적으로 지시를 한다. 아마 이들은 스스로 오늘 밤 잠자리를 해결해야 하는 모양이다. 어쩐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고물버스를 타고 정부로
이튿날 오전 10시 정각.
호텔 로비에 나타난 와족 서기와 촌장은 지난밤에 얼마나 마셨는지 눈동자가 풀어진 상태 그대로다. 그래도 행동만은 잽싸다. 내 짐들을 나눠 들고 앞장을 서는데 10분 쯤 걸어가니 시외버스 터미널이 나온다. 오전에 한 번, 오후에 한 번 하루에 두 번 밖에 버스가 없다는 영덕(永德)행 버스가 시동을 건 채 곧 출발 할 것 같다.
24인승 소형버스 내에는 한 사람 밖에 손님이 없었다. 10년 이상 운행했을 듯싶은 소형버스 내부는 한 마디로 너덜너덜하다. 유리창문도 두 곳이나 깨지고 없었는데 두꺼운 종이로 문을 덮어씌운 채였다. 이미 예전에 폐차장으로 갔어야 마땅할 차량이다. 두 시간쯤 비포장 산길을 달리는데 덜커덩 덜커덩거리는 차체가 곧 무너져 내리지나 않을까 심히 걱정된다.
밖으로부터 쉴사이없이 날아 들어오는 먼지를 피할 도리가 없다. 썅정부가 있는 영덕에 도착하면서 첫 느낌은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에 왔다는 생각뿐이다. 버스 종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작으마한 식당 앞에서 차를 돌려세우고 다시 돌아갈 차비를 하는 폼이 자연스럽기만 하다. 버스에서 내려서서 모자를 벗어들고 상체의 먼지를 털고 있는 사이, 몇 사람이 우리들을 마중 나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엔 정복 차림의 경찰관도 있었다. 그들의 신분은 곧 밝혀졌다. 말로만 듣던 한국, 한국인이 이곳에 온다는 소식을 사전에 알고 있던 향장과 이곳 공안국(파출소라고하면 될 것을 꼭 공안국이라고 부른다) 국장(이것 역시 파출소 소장이 맞는 명칭이리라) 등이었다. 일행은 곧 정부 청사 향장실로 들어갔다. 작은 도시에 비해 정부청사는 덩치가 너무나도 크다. 10살난 어린아이에게 어린아이의 옷을 입힌 꼴이라면 어떨까 싶을 정도다.(이 부분에 대해 늘 같은 느낌인 것이 어느 곳을 가나 정부 청사는 으리으리한 것이 중국이기 때문이다.) 향장실도 백 평이 넘는 수준이다. 길가에서 인사들을 나눌 때는 제대로 확인이 안 되었는데 막상 향장실에 들어와보니 향장은 여자였다.
#향장은 30대 여성
3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이웃집 아줌마 같은 인상의 이 여성은 여성다운 면도 갖고 있으면서 한편으로는 행정기관 수장으로서의 카리스마도 풍기고 있다. 파출소장 역시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눈매가 살아 있다. 소수민족 촌 어디에나 마찬가지였지만 이곳 역시 높은 사람들은 한족(漢族)이고, 계장, 주임쯤 되는 계층 몇 명만이 소수민족이다.
모든 행정업무는 철저하게 소수민족이 아닌 한족이 쥐고 있다. 차나 한 잔 마시고 소수민족 촌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점심 준비가 되었다며 자리를 옮기자고 한다. 몇 개 되지도 않는 허름한 식당 몇 군데가 있는 중 한 집으로 들어간다. 밖에서 보기 보다는 꽤 넓은 공간이 있고 방들도 보인다. 그 중 한 방으로 안내되었는데 그곳에는 이미 십 여 명의 손님들이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정부 간부들과 경찰관 그리고 유일하게 한 명뿐이라는 의사도 있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듯이 음식이 나오는데 제법 푸짐하다. 맥주도 나왔다. 보통 이 정도의 시골에는 이름도 없는 맥주가 나오게 마련인데, 중국에서도 알아주는 상표인 칭따오 맥주다.
처음에는 내 눈치를 살피듯 조금씩 조금씩 마시던 술판의 모습이 점점 깐!깐! (한 번에 모두 마셔 버리자는 뜻)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수 십 병을 마셔 버린다.(공무원들이 대낮부터 이렇게 마셔도 되는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들로서는 명분만 닿으면 대낮이고 밤이고 구별이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내 스스로 조절하는 수 밖에 없다.
#서기(書記)집에 여장을 풀고
목적지인 와족촌에 도착한 것은 해가 뉘엇뉘엇 질 무렵이었다.
정부가 있는 곳에서부터는 경운기를 타고 두 시간 정도를 와야 했다. 다른 교통수단이 없는 산간오지부락이었다. 내 숙소는 李서기(書記)네 집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20여 명의 주민들이 나를 둘러싸고 마치 신기한 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들이다.
소수민족촌 어디를 가나 며칠 동안은 으레 경험했던 일이어서 일일이 악수를 해주며 마음의 여유를 부렸다. 나무로 엉성하게 짜 맞춘 침대 하나가 전부인 방이었지만 당분간 내가 거처할 숙소라 생각하니 정감이 간다. 문은 있지만 문짝은 없는 방이다. 옆에 두 개의 방이 있는데 하나는 李서기가 쓰고 또 한 방은 초등학교 3학년생인 딸이 쓴다고 했다. 묻기도 전에 부인은 곤명(昆明)에 나가 공원생활을 하고 있는데 구정 때 한 번 10여일씩 와서 묵고 간다고 한다. 말이 부부이지 늘 떨어져 사는데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남편이 아니면 부인, 또는 부부가 다같이 대도시로 나가 공원(중국 말로 따꿍)생활을 해야지만 자식 학비도 벌고, 다소나마 현금을 만져볼 수 있다는 것이 소수민족들 대부분의 실제 상황이다. 이런 이유로 흔히 대두되는 문제가 이성관계다. 부부가 1년에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만났다가 헤어지는 형편이다 보니 자연히 이성친구를 사귀게 되고 부도덕적인 남녀관계도 생기게 마련이다.
정조 관념에 관한한 우리네의 도덕적인 잣대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 중국인들의 사고 방식이다. 물론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설사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해도 그들은 철저하게 사생활로 치부하고 상대방에 대해서 노코멘트. 상호 인격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모른 척 넘어가는 것 같다.
李서기네 집 아랫쪽으로 소학교가 있었다. 부락이름을 딴 옹샤과(翁?科)소학교.
5개의 교실과 교무실, 그리고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기숙사가 있다. 1~2학년은 같은 교실에서 배우고 나머지 학년은 개별적으로 교실이 있다. 이 부락이 아닌 다른 곳에서 오는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는 남 여로 구별 돼 각 각 20여 명씩 도합 50여 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이 공동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안을 들여다 보니 3층 목조침대가 세줄로 늘어서 있고 결코 청결스럽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저분하고 어지러운 정돈상태였다. 교실 수에 맞게 교사도 6명(2중1명은 교장으로 20대 후반의 총각선생이다)이고 관리인 겸 어린이 식사를 담당해주는 중년 부부가 운동장 한 켠 단칸방에 살고 있었다.
사진=김인환 |
#초라하지만 정겨운 저녁 초대
이백 여 평 정도의 운동장은 산을 깎아 터를 닦은지 얼마 안된 듯 보이는데 해가 지면서 이곳 저곳에 횃불이 세워지기 시작하고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전기가 귀한 곳이다 보니 운동장을 밝힐 형편은 안 되고 횃불을 사용해 밝게 비추고 있었다.
李서기에게 웬일이냐고 물으니 껄껄 웃기만 한다.
그러면서 이웃집에서 저녁대접을 하겠다고 하니까 같이 가자고 한다. 담벼락도 없이 이웃한 옆 집에는 두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한 집은 원주민이고, 한 집은 3학년을 맡고 있다는 선생집이었다. 나를 초청한 곳은 원주민으로서 李서기의 친구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풀어놓으면 무릎을 지날만큼 긴 머리를 둘둘 말아 어깨위에 걸친 와족이다. 그의 부인도 역시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여서 한 밤중 길거리에서 만나면 귀신시리즈 주인공으로 그만일 것 같다. 식탁도 없이 땅바닥에 둘러앉아 식사들을 하는데 한 마디로 원시적이라고 해야 할 지 미개하다고 해야 할 지 첫 경험자로선 당황스럽고 불편할 뿐이다. 두 어린 아이와 부부, 그리고 李서기와 그의 딸이 앉았고 그 틈 사이로 내가 앉았다.
조금 있으니까 옆 집 선생 부부가 갓난 아기를 안고 들어온다. 밥이 가득 담긴 솥이 한 쪽에 있고, 국(이곳에선 탕이라 부른다)이 한 그릇씩 돌려졌는데 멀겋기만 하다. 닭고기국 같기도 한데 고기는 얼마나 삶았는지 보이지 않고 간혹 무 토막이 더러 보일 정도다. 반찬이란 커다란 접시(작은 대야만 하다)에 씁쓸한 맛의 채소 잎 데친 것이 전부다.
외국손님이 왔다고 청한 집에서 내 놓는 음식이 이 정도니까 이 부락사람들의 경제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그래도 순박한 이들의 정성이 눈물겨울 정도다. 시장기가 있던 참이어서 꾸역 꾸역 한 그릇을 다 비우고 나니까 또 한 사발을 떠 담아주고 국도 새로 퍼다 준다. 맛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다 먹어주는 것이 예의일 듯싶어 억지로 두 그릇을 비웠다.
#긴 머리칼을 흔들어대는 독특한 춤사위
길게 한 일자(一字)형으로 지어진 교사와 기숙사 앞으로 10여 미터 정도 낮은 지대가 바로 운동장이다. 그 중간에 오르내릴 수 있는 돌계단이 있었는데 계단 중간쯤에 앉으면 바로 로열 박스가 된다. 방금 전에 인사를 나눈 젊은 교장선생이 나를 안내해 계단 중간에 앉았고 서기와 촌장 그리고 선생들도 주변에 앉았다. 언제 모였는지 50여 명쯤 된 와족 남녀들이 웅성거리며 운동장을 채웠고, 어린 아이들도 그 숫자만큼 운동장 가에 나와 낄낄 거리며 장난질들을 하고 있었다. 횃불이 더욱 밝아지면서 전면에 배치된 악사들의 연주가 시작된다. 와족들은 하나같이 긴 머리칼들을 풀어헤치고 있어 으스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악사라고 표현은 했지만 큰 북이 두 개, 작은 북이 두 개, 그리고 우리나라 농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소 여물통 두 개가 전부다. 북들은 모두 쇠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큰 북은 한 쪽만 씌워져 있고, 작은 북은 양 쪽 모두를 두드릴 수 있도록 쇠가죽으로 되어 있어 큰 북과 작은 북의 소리는 그 소리가 엄연히 구별된다. 소 여물통과 똑같게 생긴 것들은 와족들에겐 아주 중요한 타악기로서 두 개의 방망이로 두들겨 대는데 어느 부분을 때리느냐에 따라 그 소리가 변화무쌍하다. 확성기를 통해 전통 음악이 흐리고 그 음악에 맞춰 북과 나무통을 두드려 박자를 맞추는 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특이한 연주법이 와족의 군무(群舞)음악이다.
군중들은 음악에 맞춰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제자리에서 돌기도 하고 옆 사람이나 앞 뒤 사람과 자리를 바꾸기도 하는데 음악이 점점 빨라지면서 기마자세를 취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인 채 머리를 흔든다. 그에 따라 길게 늘어트린 머리칼은 밑으로 옆으로 또는 뒤로 물결처럼 출렁거리는 독특한 춤사위를 보여 준다. 온몸으로 춤을 추는 와족의 정열적인 모습이 이채롭다. 춤을 추는 동안 기합소리 같기도 하고, 무슨 짐승을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한 괴성들을 내지르기도 하는데 어떤 대목에선 요들송과 같은 현란한 음색으로 바뀌기도 한다. 목청 소리만 같고도 전체 음악을 리드하는 듯 들리며, 춤추는 모두의 마음을 흥분시키기도 한다. 듣고 보는 사람들 역시 눈과 귀가 한 곳에 집중할 수 밖에 없도록 유도하는 독특한 군무(群舞).
사진=김인환 |
#낯선 외국인 위한 특별 공연?
처음부터 이들에 이끌려 구경을 하고 있으면서도 도대체 무슨 영문인 줄 모르고 있는 나에게 李서기가 뒤늦게서야 설명을 해준다. 간단히 추려보면 이런 내용이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한 달 후 음력 6월 15일이 와족의 최대 명절인 빠러지에인데 이 때가 되면 며칠간 와족 전체 주민들이 이곳 저곳에 모여 대축제를 연다는 것이다. 그 축제기간 가운데는 부락들끼리의 전통춤 경연대회가 가장 큰 행사로서 보통 2~3개월 전부터 연습에 들어간다고 한다. 오늘은 특별히 한국에서 손님이 왔기 때문에 횃불도 밝히고 연습이 아닌 진짜 공연을 하는 기분으로 연출 중이라는 얘기였다. 뒤늦게 들은 얘기지만 기쁘기도 하고 무언가 부담스러운 마음도 끼어든다. 그런 얘기를 들어서인지 춤꾼들의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려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무려 한 시간 이상 이들의 춤사위가 이어졌다. 매일 저녁 연습을 하느냐고 물어보니 부분적으로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고참자가 개인교습을 시키듯 해 주고, 일주일에 한 번 같은 장소에 나와 춤연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李서기는 와족의 명절이라는 把??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데 귀에 잘 들어오지가 않는다. 다만 어느 소수민족촌과 똑같이 며칠동안 대축제가 계속된다는 내용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중국에서의 최대 명절은 구정이다(춘절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당연한 한족들의 명절이다. 그러나 지금은 소수민족들도 한족들과 똑같이 구정을 명절로 치고 있지만 가장 큰 명절은 그들의 전통적인 명절이 따로 있다. 이는 소수민족마다 다 일자가 틀리기 때문에 중국의 소수민족을 제대로 보고 싶으면 이들의 명절을 메모해 두었다가 그 기간에 맞춰 방문한다면 무척 흥미있는 여행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소수민족마다 갖고 있는 독특한 문화와 예술, 풍습, 습관 등은 만날 때마다 새롭게 흥취를 더해주고 있어 보람을 느끼게 한다.
<다음 주에 계속>
김인환 시인
중도일보(www.joongdo.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