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대봉산성 나리실재 |
충남 논산시 양촌면 산직리는 계룡산에서 갈라져 내린 천호산 줄기의 거의 끝부분 국사봉(國師峰) 동록의 끝자락에 위치했다. 현재 산성의 동벽 곡간평야에는 벌곡천과 곰내 상류 등의 하천변으로 난 호남고속도로, 대전-양촌 방면 지방도가 나란히 지난다. 이 도로 동쪽 건너편에는 곰티재가 있는 수락산(대둔산) 줄기가 이 산맥과 평행을 이룬다. 국사봉 남쪽 맨 끝 모촌리 앞 양촌 들에는 곰내(熊川)와 68번(금산-강경) 지방도가 통과한다. 서쪽 국사봉 너머는 현재 1번 국도가 전주 방면으로 내려가는 황산(연산)벌이다.
산성은 대전에서 양촌 방면으로 가다가 산직리 장골에서 우측으로 1km쯤 들어간 마을로 접근할 수 있다. 성의 동벽은 경사가 심하며 서쪽은 완만한 경사의 평탄지를 안은 서벽이 둘러싸고 있다. 서벽에서 동남과 북쪽으로 능선까지 연결하여 남북벽을 형성한다. 따라서 이 성은 자연스레 복어처럼 배가 불러진 타원형을 이룬다. 동고서저의 지형에 둘레는 약 400여 미터 가량 테뫼식으로 축성된 성벽은 많이 파손됐으나 아직도 붕괴석들이 상당의 잔존상태로 성의 윤곽을 알아보기에는 충분하다. 주변의 다듬지 않은 크고 작고, 모나고 길고 짧은 화강암 막돌로 비교적 허튼층쌓기를 한 축성 방법의 면모를 찾을 수 있다. 붕괴 석재들로 추정해 볼 때 높이 3~4미터, 너비 2~3미터 정도는 돼 보인다. 동남과 서벽 민가 부근 성벽은 성돌이 군데군데 간헐적으로 잔류해서 거의 삭토한 토성벽과 흡사하다.
산직리산성에서 본 곰티재 |
문지는 성의 안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곳의 양 끝이 동서문지로 유력해 보인다. 토성같은 서벽(장골 입구)에 주 출입구로 추정되는 서문은 지금도 그곳을 오르내리는 지그재그식 길의 흔적이 남았다. 서벽 바로 아래 지붕과 시멘트벽으로 보호되어 현재도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고 있는 우물은 계백장군도 먹었다는 전설 속 우물은 80년대까지만 해도 온 마을이 사용했다고 한다. 이 물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전설이 있고 아무개 아무개는 실제로 아들을 낳았다는 우스갯소리를 듣는다. 그 부분에 수구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정상에는 원형을 이루는 축대가 있는데 아마 장대지가 아니었을까 한다. 성내에서는 지금도 백제계성들에서 발견되는 흑색 및 적색 벽돌과 경질토기편들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조선시대 분청사기편도 발견됐다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도 활용됐던 것으로 여겨진다.
성에서는 동쪽 곡간 들 맞은편 4 km 지경 산줄기의 곰티재가 보인다. 그 곰티재 서편에 일제시대까지 주막거리가 있었다고 산직리 이장 임성빈 씨가 증언한다. 그에 따르면 당시에는 주막거리 밑까지 양촌-은진-강경으로 곰내가 흘러 배로 수송돼 온 어염 등을 곰티재를 넘는 육로로 금산, 진산 방면으로 유통시켰다고 한다. 육로는 진산-검천-오작실-곰티-뒷목(성 동벽 인근) 나리실재(천호산맥의 가장 낮은 지점)-연산(황산)들, 수로는 곰티-모촌리-신흥리-양촌-은진으로 통한다. 특히 이 길들은 금산 방면의 조곡들을 경창으로 수송하기 위해 그 중간 거점인 시진창(市津倉:은진-논산)으로 보내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이 두 길들은 그런 경제적 용도의 관로(官路)로써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큰 의미를 지녔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금산-진산 방면으로부터 사비 진격을 위해 거쳐가던 신라군들의 사비 진격로로 가장 주목을 받는 루트들이다.
산직리산성 우물 |
이웃에 승적골(勝敵골)이 있어 글자 그대로 적을 이긴 골짜기였다. 주민들은 여기서 계백 장군이 신라군을 맞아 5전4승했다고 하는데 삼국사기 속의 4전4승의 기록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인근에 가정골, 수락, 벌곡 등의 지명과 함께 이 일대가 치열한 격전장이었음을 의미한다. 산직리 뒤 국사봉 서쪽 죽안마을은 고대에 말을 기르던 곳으로 현재 국방대학이 들어서는 곳이다.
주민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성벽이 훨씬 양호했었다고 한다. 농촌 환경 개선사업이 벌어지면서 곰내도 하천 정비에 들어갔는데 그 책임자 전모란 사람이 약간씩의 돈을 주어 주민들로 하여금 성돌을 운반해 오게 하여 하천 제방 축조에 이용했다고 한다. 그 사람은 그 후 결국 다른 일로 횡사했고, 마을은 그 뒤로 남자들이 단명해진다고 어느 고승이 예언했듯이 남자들이 일찍 죽는다고 한다. 돈에 눈먼 한 사람의 몰지각으로 인해 소중한 문화 유산이 사라진데 대해 분개와 섭섭함을 토로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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