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총각을 상사병에 걸려 죽게 하였고, 덕망이 높던 지족대사를 탈선케하여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게 하였던 여인 황진이!
15세 때, 동네 총각이 자신을 보고 한눈에 반해 상사병에 걸려 중매를 넣었지만 거절하여 결국 젊은 총각은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총각의 상여를 옮기는데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자 황진이가 나와서 관을 어루만져 주고 영혼 결혼하고 나서야 상여가 움직였다고 전해진다.
자기를 짝사랑하다 죽은 젊은이, 그를 생각할 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괴로웠으랴. 젊은 총각의 관을 어루만지며 넋을 위로했던 황진이는 그 후 결혼을 하지 않았다 한다.
그는 어머니가 기생이기에 종모법에 따라서 기생의 길을 가야만 했다. 그래서 명월이라는 이름으로 기생 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시(詩), 서(書), 화(畵)에 모두 능통한 초특급 기생으로 명성을 날리며 저명한 문인, 학자들과 교류했다. 그러다가 면벽(面壁)수행(修行)을 하며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의 지족선사를 유혹해 파계시켜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 되게 하였고, 왕족 벽계수(碧溪水)가 한양으로 돌아가려 하자 말을 타고 벽계수의 가는 길 앞에 나타나서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를 읊어 벽계수를 무너뜨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남정네들이 그의 미모에 반해 침을 흘릴지라도 서경덕 만은 어쩔 수 없었다. 학문이 깊고 성격이 고고했기 때문이다. 한번 보자.
벽계수와 지족선사를 모두 무너뜨린 황진이는 송도에서 이름난 학자였던 서경덕이 있는 성거산에 찾아들었다. 주안상 받쳐 들고 송도에서 성거산까지 자주 드나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 내공이 남보다 깊은 서경덕은 황진이의 유혹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얼마나 많은 남정네들이 미혹(美惑)에 끌려 무너졌는가?
그러나 십벌지목 (十伐之木),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가 없을 터. 내 이만한 미모에, 이만한 예능을 갖춘 여인이 또 어디 있으랴!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남정네들은 요동을 친다는데 제 아무리 학문이 깊고 내공이 강한 서경덕이라지만 아직 쉰 살도 안 된 젊은이 인데 두고 보자. 진이는 자신만만했다.
벼르던 황진이에게 절호의 찬스가 왔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가 오후가 되었는데도 그치지 않았다. 천우신조인 기회가 황진이에게 주어진 것이다.
화장을 곱게 하고 주안상 받쳐 들고 종종걸음으로 성거산을 찾았다. 우장(雨裝)을 했으나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어쩌지 못했다. 속옷까지 흠씬 젖어 들어오는 황진이를 서경덕이 반갑게 맞았다.
서경덕: 아니 이렇게 내리는 비를 맞으며 어찌 이 깊은 산속엘. (왔느냐?)
황진이: 온종일 비가 내리기에 선생님 외로우실까 봐.
서경덕; 그래, 어서 젖은 옷 벋고 아랫목에 누워 몸을 녹이거라.
서경덕은 자신이 덮고 자던 요며 이불을 아랫목에 깔아준다. 진이는 속옷까지 벗었다. 알몸이다. 언 몸이 녹으면 잠이 오는 법. 얼마를 잤을까? 눈을 떴다. 눈을 뜨는 순간, 아아! 이 사내, 아니 남들이 우러러 보는 서경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등을 돌린 채로 책을 보며 있는 것이다. 도대체 지금이 몇 점인데, 더구나 미모로 뛰어난 젊은 여인이 알몸으로 당신 곁에 스스로 찾아와 누어있는데 저러고 있다니. 아아 서경덕!
인기척을 느낀 서경덕은…….
서경덕: 일어났느냐? 옷을 말려 놨으니 어서 옷을 입거라.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어떻게 참았을까? 본능인 것을. 이런 조상을 둔 당성(唐城) 서씨 후손들이 자랑스럽고 그와 같은 민족으로 태어난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
뒷말은 하지 않겠다. 아니 할 필요가 없다. 너무 알려진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끼리 주고받은 러브레터로 대신 하겠다.
내 마음은 미인을 좇아 진작 떠나버렸는데
텅텅 빈 몸뚱이만이 문에 기대 서 있다오 - 화담
-혹시나 진이가 오는가 싶어서-
나귀가 짐 무겁다 투덜거려 쌓더니만
그럼 그렇지! 한사람 넋이 덧실려 있었군요 - 진이
-나귀 등위에 님의 사랑이 실렸기 때문에 나귀까지 무거워 했다는 표현-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랴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 화담
-얼마나 그리우면 낙엽 지는 소리까지 임의 발자국으로 착각했을까?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 진이
-밤이 늦도록 오지 않는 임을 향한 원망과 그리움-
김용복/ 극작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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