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황산성 전경 |
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관동리 황산성 표지판을 따라 들어가면 호남선 철도를 지난다. 거기서 3, 4km 더 지나 노인회관 좌측으로 아스팔트 포장의 마을길을 계속 좇아가면 꼬부랑 산길이 비스듬히 임도처럼 나 있다.
둘레 약 870m의 테뫼식 산성으로 백제 최후 결전장의 심장부에 있었던 유서 깊은 성이다. 백제뿐만 아니라 후삼국 역사에서도 어떤 작용을 했을 가능성은 크다.
표지판 뒤로 조금 오르면 물이 약간 흐르는 계곡 50여 m 위, 성의 남벽이 눈에 확 들어온다. 이젠 거의 다 무너졌지만 성의 모습은 대번 알 수 있다. 남문에 오르도록 무너진 돌틈으로 작은 계단이 나 있다. 남문 위에 서면 아늑한 분지가 억새숲 사이로 전개된다. 동?서?북벽은 활처럼 둥그런 모양을 했으며 그 시위 구실을 하는 남벽은 미인의 눈썹같이 휘었다.
일부 잔존 성벽을 보면 막돌로 내탁기법을 사용하여 허튼층쌓기를 했다. 성은 북쪽 맨 뒤 정상 봉우리를 중심으로 좌우 능선을 따라 축조했으며 성 폭은 대략 상부 1미터, 하부 3~4미터 가량으로 추정된다.
황산성 동벽 모습 |
북쪽에는 자연지형을 이용한 가운데 부분적으로 2, 3m 정도 원래의 모습이 군데군데 남았다. 제법 널찍한 공터(현재 민묘가 차지함)가 장대지의 위치가 아니었던가 한다. 여기서는 남쪽 멀리 수락산까지 내다보이며 연산들(황산벌) 치열했던 격전장이 모두 다 조망되며 동편으로는 아들 신검에 의해 갇혔다 탈출하여 왕건과 합세, 후백제를 문 닫도록 한 최후의 전장 개태사(開泰寺)의 곡간 지대가 연산 시가지로 이어진다. 왕건이 승리한 데 감사의 마음으로 개태사를 열고 하늘이 보호해 준 산이라 하여 이름 붙여진 천호산 줄기가 황령재를 거쳐 황산벌까지 길게 능선지어졌다.
고려 말에는 진포 쪽으로 들어온 왜구들이 개태사 근처까지 들어와 행패를 부린 일도 있었다. 성 서쪽(좌측) 바로 아래로 양화산성을 지나는 웅진길이 열렸다. 남쪽에는 사비로 나아가는 교통로(현재 4호선 국도)가 지척지간이다. 동부로부터 쳐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는 것이 이 성의 존재 가치의 전부라 해도 좋을 것이다. 성의 배후 북쪽은 마치 용이 꿈틀거리는 듯 구불구불하게 계룡산까지 이어지는 능선이다. 황산벌 전투 지역 중앙에 들어 있어 이 일대 거점성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서벽 중간 아래에는 협축한 모습이 남았다.
동·서·북문지의 모습들은 각 능선 위에 있지만 남문지는 계곡 중간부 낮은 지역에 위치했다. 네 문지 중에서 남문으로 올라오는 길목만이 평탄하여 통용문은 주로 이 곳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성 아래에서 문으로 오르는 길은 약간 비스듬히 나서 직접 들어갈 수 없으며 계단으로 이뤄졌던 것 같다. 북쪽 정상부 아래 삼태기의 안처럼 아늑하고 넓은 공간에 수 채의 건물들이 있었음직하다. 실제로 이 공간 중간 중간에 돌덩이와 기와 조각들이 무더기로 섞인 채 남아서 그를 뒷받침한다.
황산성 우물과 집수지 |
그 상부에는 현재도 맑은 물이 솟는 아담한 우물이 존재해서 주변을 운치 있게 석축으로 꾸민 예쁜 연못 속으로 물을 흘린다. 아마 실제로는 이 연지가 멋보다는 우물로부터 흘러나오는 물을 저수했다가 유사시 활용하고자 한 목적이 더 컸을 것이었겠지만 여러 성들 중에서 궁성의 화려함, 큰 성의 연못에서 느끼는 위압감 등과 달리 이만큼 소박하고 자연스런 미를 간직한 곳이 현존 성들 중에는 별로 없을 듯하다.
못 주변은 잘 다듬은 직사각형 돌을 재료로 직경 7~8미터 원형으로 정교하게 석축했다. 폭과 깊이 30센티 가량의 노출된 작은 배수로가 정면으로 길게 나 호리병 형태를 하고 있다. 가을의 노랗고 부드러운 잡풀, 갈대 사이로 스쳐오는 바람소리가 연못과 어울려 어느 고가의 정원처럼 멋스럽기까지 하다. 따뜻한 양지 속 아늑한 분위기가 배롱나무 한 그루쯤 갖춰져 있다면 더없이 아늑하고 멋있는 분위기를 자아낼 듯하다. 관리를 안 하여 못물이 파란 이끼로 차 있다. 계획적으로 잘 만들어진 작은 배수로를 통해 넘치는 물은 남문 옆으로 빠져 입구 계곡으로 흘러내리도록 만들어 10여 미터 아래 돌 틈에서 그 물이 솟아나오는 것만 발견된다.
황산성 연지 |
「輿地勝覽」에 “군창지(軍倉址)와 우물이 있다”는 기록으로 미뤄볼 때 당시 이 성에는 많은 군사가 주둔하여 활동하였음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성내에서는 삼국시대 기와와 토기, 조선시대 백자편까지 발굴되었으며 발굴된 기와 조각에 “大安元年(1209년. 고려 희종5)”이라는 명문이 있었다고 한다. 출토물로 미뤄 이 성이 백제시대 축성된 후 고려, 조선까지 계속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정상에 서서 황산벌을 바라보며 천오백 년 전으로 돌아가 5000의 결사대로 신라군을 맞아 싸우던 백제군들의 모습과 계백의 비장한 결의를 상기해 본다. 외성리 남쪽 감곡리에는 계백장군 묘소와 그를 받드는 충곡서원(忠谷書院)이 있다. 시원스럽고 평화롭기만 한 놀뫼 들을 바라보면서 맛보는 감정이 묘하다. 천사백 년 전 황산벌 전투에서 쫓긴 어느 병사는 이 줄기 어느 곳에 숨어 목숨을 부지한 이도 있었으리라. 성 남쪽 바로 밑에 연산향교가 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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