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윤옥 전 국회의원 |
요즘 한국사회에서 가장 이슈가 되는 이름 중 하나, 김지영이다. 82년생, 이제 고작 서른여섯 살인 그녀는 그 어떤 정치인이나 유명 연예인보다 우리 사회 여성들의 큰 공감을 이끌어 내며 한국사회의 현 주소를 말해주는 인물로 대두 되고 있다. 소설 속 인물이면서도 실존인물 못지않은 존재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82년생 김지영이 말하는 소설 속 이야기가 단순히 김지영의 문제가 아닌 30대 여성의 문제, 아니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 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구체적인 가족계획이라든가 출산 시기를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정대현씨도 김지영씨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정대현 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82년생 김지영 중에서)
나는 나이가 들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하고, 첫째를 낳으면 둘째도 낳아야 하는 게 당연한 시대를 살았다. 우리 부모님 세대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은 결정의 문제가 아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저출산 극복 시민운동을 10년이 넘도록 해온 나조차도 지금 젊은이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 이 시대 여성들에게 결혼과 출산을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산다던가 ‘클림트의 키스’를 거는 것처럼 단순한 문제가 아닌 이유는 분명하다. 낳고 키우는 일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영아,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얻게 되는 걸 생각해 봐. 부모가 된다는 게 얼마나 의미 있고 감동적인 일이야. 그리고 정말 애 맡길 데가 없어서, 최악의 경우에, 네가 회사 그만두게 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책임질게. 너보고 돈 벌어 오라고 안 해.” “그래서 오빠가 잃는 건 뭔데?.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82년생 김지영 중에서)
대한민국 여성의 경제활동참가율이 50%가 넘어섰다.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여성들은 결혼을 하는 순간 심각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일과 가정’, ‘아이와 나’ 중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 육아휴직이 당연한 권리라고는 하지만 여전히 그것은 대부분 일하는 여성들에게는 ‘남의 회사 이야기’다. 출산을 선택한다는 것은 승진은 둘째 치고 직장에 내 자리를 계속 지킬 수 있느냐 없느냐가 될 수 있는 문제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런 고민은 여전히 여성들만의 문제라는 것이다. 출산 지원금을 아무리 많이 준다고 해도, 내 일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 출산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다. 진정한 일-가정 양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출산이 내 일에도 플러스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임신과 출산을 응원하고 배려하고 지지할 수 있는 기업과 사회 문화가 일-가정 양립의 시작이며 저출산 극복의 첫 번째 열쇠다.
“그놈의 돕는다 소리 좀 그만할 수 없어? 살림도 돕겠다, 애 키우는 것도 돕겠다, 내가 일하는 것도 돕겠다. 이 집 오빠 집 아니야? 오빠 살림 아니야? 애는 오빠 애 아니야? 그리고 내가 일하면, 그 돈은 나만 써? 왜 남의 일에 선심 쓰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82년생 김지영 중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많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가사는 여성의 몫’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돌보거나 설거지나 청소, 빨래를 하는 남자들은 큰 선심이라도 쓰듯 ‘도와준다’고 말한다. 우리 아이를 돌보고 우리 집을 치우는 일이 ‘아내의 몫’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출산과 육아에의 남성 참여, 저출산 극복을 위한 또 하나의 열쇠가 바로 남성의 가사, 즉, 육아 참여이다. 정부의 저출산 정책의 초점이 ‘가족 행복’에 맞춰진다고 한다. 가족 행복의 중심에는 엄마의 행복이 있다. 출산과 육아가 엄마의 삶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닌 행복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출산과 육아를 함께 하는 제도와 문화가 필수적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곁의 김지영씨를 알고 있다. 일과 가정, 자아와 육아 사이에서 갈등하고 허덕이는 그의 고민을 우리는 함께 해야 한다. 이 시대의 김지영씨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낳고 키우는 일이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박윤옥 전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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