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만필] 아이들에게서 배운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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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만필] 아이들에게서 배운 열정

  • 승인 2017-09-04 15:37
  • 신문게재 2017-09-05 22면
  • 허혜영(대전화정초 교사)허혜영(대전화정초 교사)
▲ 허혜영(대전화정초 교사)
▲ 허혜영(대전화정초 교사)
아이들과 새롭게 만난 3월 어느 날, 우리는 우리 반 별칭을 정하기로 하였다. 아직 회장을 선출하기 전이어서 진행은 교사가 맡았다.

“여러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집어넣어 우리 반 별칭을 만들면 어떨까요?”

“저는 우리 반을 ‘돼지반’이라고 했으면 좋겠습니다. 돼지꿈을 꾸면 행운이 온다고도 하고, 핑크색 돼지가 예쁘기 때문입니다.”

“저는 존프반으로 불렀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반은 특별한 존대말 프로젝트를 하니까, 줄여서 존프반으로 부르면 좋겠습니다.”

폭소가 터지기도 하고, 진지한 침묵이 흐르기도 하였다. 저마다 그럴듯한 이유를 대며 짓기 시작한 이름이 무려 12개나 되었다. 칠판에 빼곡히 적혀 있는 이름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열정반’이었고, 아이들이 잘 쓰지 않는 낱말인 ‘열정’이 뽑히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였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반이 되었으면 좋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이 열정반을 뽑게 만든 아이가 밝힌 이유였다. 무엇인가 대단한 이유를 기대했지만 매우 평범했다. 그래서 우리 반은 ‘열정반’이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다. 원래 아이들이 열정적이었던 것인지, ‘열정반’이라는 이름을 붙여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아이들은 생활하면서 내게 신선한 경험을 선사해 주고 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이 1인 1악기를 연주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우리 학년 학생들은 1년 동안 리코더를 연습하여 단계별 연주곡을 모두 연주할 수 있으면 인증서를 받게 된다. 처음 리코더 연습을 하던 날, 아이들의 연주 실력 차이가 상당히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리코더 연주를 잘 못하는 아이들이 걱정되었고, 고민 끝에 아이들에게 솔직해지기로 했다.

“여러분, 지금 우리 반에는 리코더를 잘 부는 친구도 있고 그렇지 못한 친구도 있어요. 하지만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모인 우리 반은 금방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모둠을 만들어 연습에 돌입했다. 연주가 힘든 친구들은 짝에게 또는 모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한 소절씩 연습을 했다. 자투리 시간이 있을 때마다 각자, 모둠끼리, 그리고 반 전체가 함께 연습을 했다. 처음에는 교사가 주도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끼리 스스로 연습하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점점 아이들이 리코더 연습을 즐기며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고, 이런 것이 ‘열정’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열정적으로 연습한 아이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1학기에 리코더 연주곡을 모두 통과해 버렸다.

국어사전에서는 ‘열정’을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아이들이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리코더 연주에 열중하는 것을 보고 중요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리코더 연주는 아이들이 처음부터 자발적으로 애정을 가지고 한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주어진 과제였음에도 아이들은 열정적으로 해 냈다. 내가 해 준 것은 과제에 대한 안내와 소소한 도움, 그리고 격려와 칭찬의 말뿐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즐기며 성공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나의 역할이 이런 것이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교육학 지식과 교수법에서 배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사실이지만 아이들에게서 나는 또 다시 배운다.

우리 반은 계속해서 열정적이다. 놀이 시간에 1초라도 허비하랴 싶어 비석치기와 제기차기를 하며 열정적으로 논다. 학예회 때 부르자고 한, 처음 본 만화영화 주제가 가사 학습지에 잠시 시무룩했다가도 노래를 들려주면 틀리든 말든 씩씩하게, 열정적으로 부른다. 나도 너희들의 열정을 배우고 싶다. 아니 이미 배우고 있다. 정말 고맙다. 모든 친구들과 반갑게 인사하라는 나의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 열심히 교실 안을 오가는 우리 ‘열정반’의 순항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허혜영(대전화정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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