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논산 신라군 진격로 |
삼년산성을 떠난 신라군은 대왕성의 양산 수로와 육로를 따라 만악산성 좁은 계곡과 진동산성을 통과 검천리 곰티재(熊峙) 밑에 이르렀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식장산 북록의 탄현이 아니었다. 당군의 보급 부담까지 안고 약속 시간에 쫓기던 그들로서는 말도 나란히 걸을 수 없는 험한 길을 택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웅진성 소관 백제군들도 녹록지 않았다. 가장 손쉽고 비교적 평탄한 루트인 금산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길은 성왕 사후 치열한 전투 끝에 탈취한 대왕성(조천성?)길의 연장선상이다. 작전 면에서 이 길의 선택은 어찌 보면 필연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신라군은 곰티재 근처에 이르러 삼로로 진군을 시도했고 백제도 요지에 3영을 설치하고 대치하고 있었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백제 조정에서는 궁여지책으로 계백의 결사대 5천을 급파해서 맞섰다. 사비 방어를 하던 최정예 부대를 파견한 것은 나당군의 연합을 깨기 위해 신라군을 먼저 제압해야 하는 전략상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곰티재-산직리산성 주변의 길은 신라군으로서도 사비에 이르는 가장 경제적인 지름길이자 수월한 루트였다. 곰티재 근처에서는 세 갈래 길이 나뉜다. 하나는 검천리 오작실, 곰티를 넘어 직선으로 산직리 산성과 그 뒤 나리실재를 통과 신양리 황산벌에 이르는 가장 첩경이다. 다음은 곰티재 근처에서 서편 곰내(熊川)를 따라 모촌리, 신흥리, 국사봉 북편 신양리, 감곡리 방면의 길, 나머지는 검천리에서 곰티를 우측으로 돌아 한삼천리(벌곡), 황령재 넘어 황산벌로 가는 길이다.
이것이 신라의 사비 진격 삼도(三道)요 백제 방어의 삼영(三營)지이고, 이 세 지점을 통과하여 합류하는 신양리, 감곡리 일대가 소위 황산벌이라 일컬어지는 곳이다. 이곳만 통과하면 사비까지는 파죽지세로 나아갈 수 있는 평지이다.
천호산 줄기의, 함박산, 깃대봉 등 300m급 높은 산들이 연결된 이 계룡산 줄기는 백제로서는 이곳을 점령당하면 곧바로 적에게 수도 접근을 허용하게 되므로 마지막 방어 요충지가 된다. 성주탁의 견해처럼 신라군이 활용한 이 천호산맥상 삼도길 지역이 성충 등의 충신들이 대비를 진언했던 탄현일 개연성이 높으며 그 때의 탄현은 어느 특정 지점이 아니라 이 일대를 포괄적 탄현으로 비정한 의견에 믿음이 간다.
계백이 최후를 맞기 전 적과 싸워 네 차례나 크게 이겼다는 사실은 이런 지세를 잘 활용한 결과였으며 그의 패배는 전략상 잘못보다 군사력의 한계나 작전의 실기 등 다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계백같은 명장이 소규모 군사로는 험지를 지키며 게릴라전을 펼쳐야 한다는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기초적인 병법조차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황산벌 전투에서 가장 큰 패배 요인은 누가 뭐래도 병력의 절대적 열세였다. 당시 기벌포 전선과 양분된 상태에서 황급히 계백이 이끌고 온 파견군 오천은 사비 주둔의 정병(精兵-정예부대)이었다. 그 외에 비록 숫자에는 잡히지 않지만 최소한 1000 명 내외의 동방성(東方城-德安城) 소속 부대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 볼 때 신라군 5만, 계백의 결사대와 동방성군을 포함한 오륙천, 양국간 군사력은 최소한 5, 6배 정도의 차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백제군이 초기에 4전 4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계백의 군사가 잘 조련된 정병이었고 계백의 분투와 지략에 따른 산성전을 수행했기에 가능했다고 보인다. 비록 성공은 못 했지만 계백도 이 험한 천호산 줄기에 황급히 삼영을 설치하고 공격해 오는 신라군에 대비하고 있었다. 요지를 점령하고 있던 백제군들은 초기에는 4전 4승 나름대로의 선방을 하면서 신라군을 궁지에 몰아넣었으나 절대적인 숫적 열세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점차 군영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신라로서도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반드시 돌파해야 할 절체절명의 전투였지만 백제군들의 워낙 완강한 저항 때문에 신라군은 하루 이상 전진을 못 했던 듯하다. 자식들(반굴이나 관창 등)까지 선두로 몰아 희생시킨 심리전 끝에 떨어진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고서야 간신히 이겼을 뿐이다.
이 전투에서 황산들 허허벌판으로 내몰린 백제군들은 들판에 선 사냥감 신세로 사즉생(死卽生)의 각오를 가지고 최후 1인까지 싸웠지만 거기까지가 끝이었다. 처자까지 죽이고 출전한 계백의 분투도 이제 한낱 물거품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같은 날 계백은 전사하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고위층 20여 명은 포로가 됐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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