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호 소설] 아웃터넷(OUTERNET) 26. 후루마쓰의 편지

[최민호 소설] 아웃터넷(OUTERNET) 26. 후루마쓰의 편지

  • 승인 2017-09-01 00:01
  • 최민호최민호
동이 텄다.

순원은 후루마쓰 부녀의 집에 3일 정도 머물렀다. 별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후루마쓰가 하루 더, 하루 더 하면서 오히려 순원을 잡아 둔 때문이었다.​

드디어 순원이 네덜란드로 떠나는 날.

아침 일찍 나리코가 순원의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순원에게 파일에 담은 깨알같이 적힌 서류 묶음을 하나 건넸다.

아버지 후루마쓰의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순원은 말을 하면 목이 메일 것 같은 기분에 문을 나서면서 말없이 나리코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리코는 내미는 손을 잡아 주었다.

“사요나라. 나리코”

“조심하세요. 순원.”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으로 향하는 전일공 일본 비행기는 힘차게 오사카 창공을 박차고 올랐다.

비행기 안에서 순원은 후루마쓰씨가 건네준 선물이라고 하는 것을 펼쳐 보았다. 서류인지 편지인지가 가득 들어 있었다.

편지같이 보이는 글의 첫 장을 열었다.

놀랍게도 한글이었다.

순원은 나리코의 말이 생각났다.

후루마쓰 집안사람들은 언어에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후루마쓰의 편지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1)
모국어란 무엇인가?

어머니 나라의 말이란 뜻인가?

우리 어머니가 일본 나라 사람이니까 나의 모국어는 일본말인가?

‘mother tongue’. 모국어라는 말의 원형이다.

모어라고 해야 옳다. 모국어라는 말은 틀렸다.

왜 ‘엄마의 혀’가 ‘엄마 나라의 말’이 되었는가?

말은 나라가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다. 엄마가 가르쳐 준다.

엄마의 혀로 배운다.

내 어머니 나라의 언어. 나의 모국어는 일본어이다.

나의 모어는 무엇인가? 일본어인가? 아니다.

나는 모어가 없다. 

우리 어머니도 나에게 말을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어느 나라 말도 나에게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었다.

모국어인 일본어도 나에게는 외국어와 다를 바가 없다.

어머니에게 배우지 않은 언어는 다 외국어인 것이다.

나에게는 모든 언어가 다 외국어다. 그리고 모든 언어는 나에게 동등하게 다가온다. 일본어라서 쉽고, 한국어가 영어보다 더 배우기 쉬운 것이 아니다. 

나에게 가장 쉬운 것은 정확한 문법이 적용되고 예외가 없는 언어일 뿐이다.

나에게는 독일어가 일본어 보다 훨씬 쉬울 수 밖에 없다.

문법이 정교하니까.

나는 모든 언어에서 자유로운 사람이다.

몇 개 국어를 잘한다 라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별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저 외국어는 나에게 몇 개의 과목일 따름인 것이다. 수학 공식과 같이 언어는 나에게 오로지 외우고 논리적으로 전개시켜 익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을 풀듯이 나는 언어를 푼다.

말은 듣는 것이지만, 나는 말을 듣지 않는다. 본다.

소리도 마찬가지다.

나는 본다. 소리를 본다.

듣는다는 단어는 나에게는 추상어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나는 식물과도 같다.

동물은 소리를 낸다. 소리를 듣는다.

식물은 소리를 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귀와 말하는 입이 식물에게는 없다.

바로 나다…….

그러면 나는 말을 못하는가?

말은 입으로만 하는가? 

말은 문자로도 하는 것이다. 입이나 귀로 이해하는 말보다 눈으로 보는 말이 더 많고 정확함을 문명은 기록해 왔다.

나의 말은 실수가 적고, 정확하다. 나는 누구보다도 말을 잘할 줄 알게 된 사람이다.

나는 신을 늘 바라다보고 살았다. 사당에 있는 붉은 신목.

신은 나에게 말씀을 하셨다. 

“소리를 내고 듣지 못한다 해서 말을 못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알겠느냐? 명심하거라.

너만이 나와 대화할 수 있다.

하늘이 주신 축복임을 명심하거라. 너의 사명이거늘…….”

사과나무가 떨어지는 때, 나는 진리를 깨달았다.

나무도 말을 하고 산다.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귀가 없을 뿐이다.

그들의 말소리……

나는 보아야 하겠다.

나는 보아야 하겠다. 

(2)
나 

하나는 나 속에 갇혀 있고

하나는 세계 속에 나와 있다.

​하나는 나만을 움직이고

하나는 우주를 움직인다.

하나는 물질 속에 갇혀있고

하나는 허공 속에 함께 있다.

하나는 시간에 묶여 있고​

하나는 영원에 통해 있다.​

하나는 있는 듯 없고

하나는 없는 듯 있다.

(*이것은 한국의 한 시인(김시헌)의 '두 가지의 나'라는 시입니다.*) 

(3)
나의 정직한 눈으로 볼 때, 나는 사람들의 믿음을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은 스스로의 믿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무엇을 믿는 것이고 무엇을 믿지 않는 것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한다.

그들은 평일에는 생명의 진화를 믿다가도 주일에는 신의 창조를 믿는다.

그들은 모순있는 믿음을 믿으면서, 그 믿음의 모순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때로는 스스로의 앞날이 운명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것에 집착해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의지로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아집을 강하게 갖는다.

그리고 모순되게도, 운명도 아집도 아닌, 제 3의 신의 존재에 강렬하게 의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절대적인 신의 존재에 대한 정의에 대하여 서로를 믿지 못한다.

때로는 운명을, 때로는 의지를, 때로는 신을 믿거나, 또는 이 모두를 동시에 믿거나, 아니면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또는 믿지 말아야 하는지를 그들은 모른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거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존재를 목격하면서도 존재를 믿지 아니하거나, 증명할 수 없는 존재를 존재한다고 강하게 믿는다.

외계인을 보면서도 없다고 믿고, 운명에 눈물 흘리면서도 없다고 믿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두려워하면서도 없다고 믿는다.

그것은 과학과 종교를 동시에 신봉하는 모호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서는 증명할 수 없으면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면서, 정작 종교라는 이름 하에서는 믿을 수 있으려면 증명을 요구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그들에게 과학과 종교의 차이는 이토록 영향력이 지대한 것임에도, 그들은 양자의 차이를 정작 구분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차이가 굳이 거론되는 것을 피하려 한다.

그들은 과학은 자연의 이치를 밝히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종교는 삶과 죽음, 영혼의 존재 여부, 삶의 주관자의 소재, 죽은 후의 세계, 나아가 우주의 창조 등에 관한 진리라고 한다. 

하지만 과학에는 몇 가지 변하지 않는 법칙을 정해 놓고, 그 법칙에 부합되지 않으면 비과학적인 것으로 증명의 자격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종교에 있어서도 몇 가지 범주를 정해 놓고 그 범주에 해당되지 않으면 죄악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만다.​

그들이 정해놓은 몇 가지 과학적 법칙이나, 종교적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들의 반응은 모호하고 적대적인 것으로 돌변한다.

사악한 미신이라고 지탄해 버리고, 있을 수 없는 비과학적인 현상으로 착각이나 무지로 치부해 버리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일상에서 제외시켜 버리고, 마지막에는 기적이라고 하는 단어로 함몰시켜 버리고 만다.

나의 정직한 두뇌로 생각해 볼 때 비과학적인 착각이나,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미신이나, 기적이나 불가지론은 같은 뜻의 단어이다.

과학의 법칙과 종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들의 믿음은 이때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

생각해 보면, 법칙이나 교리는 인간이 만든 것 아니었던가?

천사나 악마의 존재나 영혼의 윤회, 자연의 섭리를 비롯한 생명존재의 운명같은 것은 그들이 알고 있는 법칙과 교리에서 벗어나 있을 뿐, 이를 믿어야 하거나, 믿어서는 안 되거나 할 성질의 것들이 아니다.

믿어야 할 대상은 종교요, 규명해야 할 대상은 과학이라는 이중적인 잣대로는 우리의 믿음은 완성되지 못한다.

믿어지지 않으면서도 믿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믿음의 위선에 빠져서는 더 이상 안된다. 

정직하게, 보이거나, 들리거나, 느껴지거나 하는 것은 다 있는 것이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과학과 종교에서 달리 말하는 것을 가르치거나 믿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아직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둘 다 진리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고, 믿지 못하는 것을 믿고,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나 믿어야만 하는 것은 없다라는 것을 믿는다.

불과 오감이나 육감에 의존하는 인간이 10감이나 12감의 감각으로 느껴져야 할 현상을 감히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오만스런 단정을 믿음의 이름으로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단언컨대 나는 듣지 못하여 소리의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세상은 소리로 가득 충만되어 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4)
불쌍한 벡스터.

그런 식으로 사기꾼쯤으로 취급을 받다니.

그런 식의 거짓말 탐지기로 그들을 대할 일은 아니었지.

허지만, 벡스터는 엄청난 행운의 사람이야. 아무도 똑같은 실험을 해도 벡스터같은 경험을 하지는 못하잖아.

그들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는 훨씬 더 지능적이고, 초문명적이야.

조금만 기다려요. 벡스터. 

(5)
[이 난은 스크랩같은 것이었다. 이 페이지는 영어로 쓰여 있었고, 어느 학술지에서 오려서 편집한 것 같았다.]

클리브 벡스터(cleve backster).

미국의 비밀정보업무에 종사했던 요원.

그는 거짓말 탐지기의 운용 전문가였다.

1966년.

어느 날 그는 탐지기의 전선줄을 용혈수라고 하는 작은 나무의 칼 모양의 잎에다 고정시켰다.

학명은 드리카에나 마싼게아나.

그는 자기의 전문장비를 확신해 마지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화분에 부어주는 물이 얼마나 빨리 잎으로 도달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 시도에서 그는 식물이 곡선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심문중 흥분상태에 빠지는 피의자의 곡선, 그것과 흡사했다.

그는 잎을 그을려 보려고 성냥갑에 손을 대자 성냥을 켜기도 전에 잎의 곡선이 위를 향해 그려졌다.

벡스터는 놀랐다.

그는 식물이 생각을 표출한다고 믿었고, 그의 기계는 이를 읽었다고 믿었다. 

그는 꽃과 나무를 사들였다.

그는 식물이 의사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다.

식물이 무언가를 메시지로 남긴다고 믿었다.

그는 식물언어의 수도승이 되었다.

그는 수많은 실험을 통해 식물이 거짓말 탐지기를 통해서 자기의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기록하였는데, 예를 들어 대학생 6명중에서 제비를 뽑아 어떤 화분에 심긴 식물을 뿌리째 뽑아 짓밟아 버리라는 지시를 하였다.

실험자도 누가 그 쪽지의 제비를 뽑았는지 알 수 없게 했는데도, 6명의 학생 중 뿌리를 짓밟은 이 학생이 다가가면 유독 심하게 요동하기 시작했다.

어떤 동물을 괴롭히거나 식물을 학대하는 사람이 다가오면, 식물은 자신에게 그러한 짓을 한 경험이 없음에도 전율하는 몸짓을 했다.

벡스터는 식물은 생각을 읽을 줄 안다고 생각했다.

식물은 거짓말을 찾아내었다.

이런 실험도 했다.

집에서 기르는 식물의 잎에 전선을 연결하고 비행기 여행을 하는 식물의 여주인이 비행기 이착륙 시에 무서워할 때마다 식물의 반응이 어떠한가를 관찰했다. 

식물 반응의 전도력이 높아졌던 시간을 여주인의 비행기가 이착륙할 때의 시간과 비교하니 정확히 일치하였다. 그는 식물의 전도력이 높아지는 것을 보고 식물이 수천 킬로를 넘어 자기 여주인과 감정의 교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벡스터를 방문한 캐나다의 식물학자는 남달랐다.

벡스터의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찾아온 학자였다

하지만 이 사람에 대하여는 식물은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 식물학자는 주기적으로 식물을 불에 태우면서 분석을 하는 실험을 계속하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 반응도 없었다.

벡스터는 모든 실험의 신빙성을 잃고 말았다. 

벡스터는 그러나 믿었다.

식물은 정말로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로 자기를 괴롭히는 무서운 사람이 나타나면 오히려 죽은 척 한다는 것이다.

결국 대부분의 식물학자는 벡스터를 교묘한 사기꾼쯤으로 간주해 버리고 말았다.

(6)
마순원 군.

하이젠베르크는 양자론에 의한 원자이하의 세계는 암흑과 혼돈으로 가득차서 예측할 수 없는 불확정성의 세계라 정의한 바 있습니다.

원자 이하의 미립자는 존재 자체를 규명하기도 어려우며, 특정시점에서의 위치와 운동량을 알아야 정의될 수 있는 물질로서의 기본 요소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아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체와 비 생명체라는 단어는 물리학적으로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본질에 접근하기 위해 생명체의 세포를 화학적으로 분석해 들어가면 결국 물질의 세계로 환원되고, 물질의 세계로 환원되는 차원에서는 생명체와 비 생명체의 구분은 없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결국 물질의 어느 단계부터인가를 생명체와 비 생명체의 분수령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지만, 생명체가 무엇인가라는 정의조차 내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그 구분 또한 의미를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하물며 동물과 식물의 구분이라는 것도 미세하게 환원하면 구분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근원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든, 분류학상의 어느 단계가 되면, 식물과 동물이라는 구분은 의미를 확고히 가지게 됩니다.

생물학이 분류이후의 개념이라면 물리학은 그 이전의 개념인 것에서부터 물리학과 생물학은 만나기도 헤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물리학이 양자이론에 의해 불확정성에 빠져버리고, 생물 물리학이 생명체에서는 물리학의 확고부동한 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있음에 놀라고 좌절할 때, 이제는 생명과 물질은 우리가 이제까지 찾아내지 못한 무엇인가 거대한 제 3의 법칙에 의해 적용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신비주의적 태도가 아님을 먼저 이해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1977년 노벨 화학상은 벨기에의 화학자 일리야 프리고진에게 수여됐습니다마는, 그의 업적은 화학분야에서라기보다는 물리, 화학, 생물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뉴우튼의 이후의 과학사 사상 가장 획기적인 이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 이론은

‘평형상태에서 멀리 떨어진 극도의 무질서 상태에서는 자연적으로 질서 상태가 생겨날 수 있다’는 ‘요동을 통한 질서의 원리’였습니다.

그것은 물리법칙이라는 것은 알 수 없는 질서 속에 함몰되어 있다는 함의를 내포하는 것이지요. 

이제 물리학이나 생물학이나 화학이나 하는 것을 수학으로 풀 수만은 없는 단계에 와 있음을 프리고진의 이론에서 우리는 엿볼 수가 있습니다.

존 로크가, ‘인간들은 더 높은 지성에 의해 이끌려지는 신성한 존재가 아니라, 차갑고 기계적인 우주의 물질계와 반응하는 단순한 물리적 현상에 불과한 존재’라고 함으로써 당대의 과학발전에 획기적 공헌을 한 것이나,

데카르트가, ‘자연은 톱니바퀴와 피댓줄로 움직이는 기계’라고 선언한 것은 20세기 까지만의 진리였습니다. 그들의 오류로 인해 20세기는 발전했지만 그들의 오류는 이제 21세기 과학을 속박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물리가 생물이요, 동물이 식물이요, 무생명이 생명이라는 것.

세상에서 분열되고 구분되는 모든 차이를 통합하는 우주적인 통일이 있다는 것.

한 그루의 이름 없이 피고 지는 초본과 같은 미약함 속에서도 우주의 섭리와 통일성은 확고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것.

그러한 거대시각에서 공부를 계속해 주시기 바랍니다.

순원군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빌겠습니다.

신을 믿으십시오.

후루마쓰 마사히로. 씀.

이상이었다.

순원은 긴 숨을 내쉬었다.

후루마쓰 마사히로. 그는 누구인가?

고개를 젖히고 그는 콜라 한잔을 달라고 스튜어디스를 불렀다.

‘하이’하고 잰걸음으로 다가온 스튜어디스의 명찰이 앙증스럽게 빛났다.

‘나리코.’

하필이면 스튜어디스 이름이 나리코인가.

후루마쓰가, 후루마쓰가 지켜보고 있는가?

모골이 송연해졌다.

(계속)

/우보 최민호


최민호 전 충남도 행정부지사는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도시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 행자부 인사실장,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200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사무차장(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배재대학교 석좌교수, 공주대 객원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국회의장 직속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위원(2016)으로 활동했으며 현)홍익대 초빙교수이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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