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용란(건신대학원대학교 총장) |
많은 결혼적령기의 사람들이 비혼을 선택하며, 결혼을 해도 아이 낳는 일을 힘겨워하고 있다. 아이를 낳기 어려운 다양한 이유들이 두려움과 함께 혼재 되어있다. 경제적 문제를 필두로 문화적이고 사회적 요인들이 얽히고 설켜 원인을 해소하기 쉽지는 않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이를 낳아 안고 나오는 엄마나 아빠가 있다면 모두 환영하며, 박수 쳐주고 칭찬하고 위로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사회 한편에서 일어나는 생경스러운 현상이 우리를 당혹케 한다. 노 키즈존 (No Kids Zone)!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오는 것을 제한하는 ‘노 키즈존’ 딱지가 카페와 식당에 버젓이 붙으며 당연시하고 있다. ‘어린이 동반 불가’ 이건 뭔가? 우리에게 대체 무슨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아이들을 데리고 있는 좌석들 옆을 피하려는 생각은 누구나 갖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차단은 강제적 분리의 불쾌감을 갖게 한다. 물론 쾌적한 분위기를 누리는 다른 손님들을 방해하거나, 평안을 깨는 분위기를 일단 차단하는 차원에서 생겼다고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면 나의 편의를 위해 다른 사람을 강제적으로 거부하고 성가신 존재로 규정해버리는 행위란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자신이 누릴 권리를 침해하는 집단의 출입을 금지 시키고, 다른 집단을 차등 대우할 근거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여기에는 상업적 이유를 업고 편의를 위한 집단적 이기주의가 작동하는 시스템을 묵인하는 집단적 동의가 내재되어 있다. 더구나 진입을 차단시키는 대상이 아이와 그 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엄마나 아빠라는 사실은 한 시대를 함께 살아가며 서로 공존하며 살아야 할 사회 구성원이라는 면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이다. 현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참 어렵다. 현상들은 논리를 따라 일어나지는 않는다. 현상은 각 각 독립된 모습으로 그 자체를 드러낸다. 그건 그거고 내가 불편하고 싫은 것은 싫다는 견해를 민낯으로 드러낸다.
아이를 양육하는 행위가 불편을 초래하는 민폐로 인식하는 사회와 집단이 있는 한 평등과 공존은 이 사회에 존재할 수 없다. 울고 보채는 아이들이 짜증의 대상이 아니라 함께 돌보아야하는 양육의 대상으로 볼 수는 없을까? 편리함을 내세우며 단번에 불편한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을 최선으로 여기는 간편한 사회 추구에서는 불편을 감수하는 돌봄과 나눔과 평화적 공존이 자리 잡기 어렵다. 우리 모두는 함께 격려하며 도닥여줄 이웃들이 필요하다. 우리도 한때 돌봄이 필요한 무기력한 존재인 아이였던 적이 있지 않았는가. 서로가 인내하며 키워가는 세상이 되어야 모두가 안전한 사회가 된다. 불편해서 내쫓는 사회는 계속해서 집단 이기주의로 서로를 적대시하고 혐오하고 공격하는 파편화된 사회가 되어버리고 만다. ‘노 키즈존’의 상황은 언제든 아이를 낳아 길러야하는 나의 문제로 다시 부메랑이 되어 날아온다.
예전에는 대청마루에서 모든 마을 사람들이 아이를 키워냈다. 산업시대의 핵가족화는 아이의 출산과 양육을 집 안에서 해결하는 여성인 엄마의 사사로운 일이 되게 했다. 이제 저출산의 사회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은 엄마의 독박육아에 한정시키지 말고 사회 시스템과 함께하는 공공의 일로 인정받아야한다. 이 사회에서 아이 낳는 일이 두렵지 않도록 함께 키워간다는 인식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아이는 엄마 혼자 만 키우는 것이 아니라 아빠의 육아는 당연하며 더 나아가 일터와 지역과 사회 모두가 함께 응원하는 분위기가 마련되어질 때 저출산의 늪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 지역마다 아기 키우는 엄마 아빠들이 아이와 함께 눈치 안보고 쉼을 누릴 수 있는 육아 친화적 카페와 식당과 마을들이 더 많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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