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이곳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호기심을 해소하고 싶었다.
나리코와의 시간도 가지면서…….
그러자면 후루마쓰에게 직접 부딪혀 허락을 받는 것 밖에 없다.
부딪쳐 보는 거다. 이런 당돌함은 아버지를 닮았다.
순원은 연구실 앞에서 똑똑 노크를 했다.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제서야 순원은 스스로 흠칫했다.
‘그렇지. 못 들으시지.’
순원은 스스로 문을 열 수 밖에 없었다.
후루마쓰.
처음 자기들이 찾아 왔을 때에는 적삼바람에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리고 앉아서 사람을 맞이하였던 그.
그 사람은 간데없고 하얀 두루마기 같은 도포에 모자를 쓴 채로 버선 바람으로 책상에 앉아 있는 후루마쓰.
신관의 제관이었다.
경건하게 의관을 갖추어 입고 그는 책상에서 명상을 하는 듯 고요히 눈을 감고 있었다.
순원은 소리 기척을 알 수 없는 분이니 자기가 먼저 다가가 알려 드리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후루마쓰에게 다가가 섰다.
후루마쓰에게 두어 걸음 다가갔을까?
후루마쓰가 조용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고개를 들어 순원을 응시하는 것이었다.
놀란 것은 순원이었다.
후루마쓰는 순원이 거기에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없이 쳐다보더니, 이윽고 눈길을 방 가운데 있는 소파로 던졌다.
순원은 소파에 가서 앉았다.
마음의 평정을 찾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계나 장비가 여기저기 각종 꽃나무나 묘목등과 함께 연구실 가득히 놓여 있는가 하면, 벽면에는 서가가 즐비하게 놓여 있었다.
순원으로서는 알 수 없는 언어의 책이 가득히 꽂혀 있었다.
몇 천 권이나 될까?
일본어 책은 말할 것도 없고 영어, 한문, 독일어, 불어 책 같은 것도 서가 가득히 꽂혀 있었다.
저건 어느 나라 글자인가?
순원으로서는 처음 보는 책들이 서가를 가득 메우고 있었는데, 독일어도 아니요, 그리스어도, 라틴어 같지도 않은 알파벳 문자로 쓰여 진 책들이 유난히 한 쪽 서가를 채우고 있었다.
서가 위로 눈길을 쭈욱 옮겨가다, 순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글로 쓰인 책들이 그 다음 서가에 줄줄이 꽂혀 있는 것이 아닌가?
반드시 한글 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한국어 책이었다.
‘한국의 미륵상’ ‘한국의 고찰’ ‘한국의 국보’ 이러한 책으로부터 불교관련 한국 책들이 서가에 꽂혀 있는 것이었다. 수량은 별로 많지 않았지만, 후루마쓰가 한국 책도 해득한다는 사실은 경이로왔다.
한국어를 배운다고 하더니 배우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모양이다.
후루마쓰가 순원에게 다가와 노트북을 내밀었다. 필담을 하자는 뜻이리라.
순원은 노트북을 받으면서, 가지고 온 봉투 속에서 어제 밤 내내 쓴 글을 후루마쓰 앞에 내밀었다.
한글로 쓴 순원의 편지였다.
후루마쓰는 얼굴에 가느다란 미소를 보이면서, 순원이 건넨 편지를 천천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역시 해독력이 능숙하지는 않는가 보다.
후루마쓰가 순원의 글을 다 읽기를 기다리는 것은 상당한 인내를 요하는 시간이었다.
한참을 읽고 난 후루마쓰는 또 순원을 지긋히 응시하였다.
무엇 더 말할 것이 있느냐는 표정이었다.
순원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후루마쓰에게 작은 낭패감을 느꼈다.
무슨 반응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순원은 편지 속에 자기를 소개하는 내용을 담았었다.
한국에서는 그래도 영재 축에 낀다는 과시를 겸허한 글로 나타냈다.
세계 물리 올림피아드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금메달을 받은 이야기며, 곧 네덜란드로 가서 방학을 이용하여 식물 유전공학에 대한 리서치를 할 것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 후루마쓰 선생이 개발하고 계시는 일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학문적인 이론체계를 자기에게 설명을 해 주실 수는 없느냐는 말과 끝으로 네덜란드와 한국에 돌아가서라도 후루마쓰 선생과 계속 연락을 유지하면서 많은 공부를 배우고 싶은데 허락해 주지 않겠느냐는 내용이었다.
후루마쓰는 가타부타 말이 없다.
거절의 의사표시로 보아야 하는가?
순원은 한참을 말없이 앉아있는 후루마쓰씨를 쳐다보다가 속절없이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하고는 연구실을 나왔다.
후루마쓰로부터 아무런 답이 없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명분이 없어진 것 같았다.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방에 가서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나리코는 아무 말 없이 그런 순원이를 도와주었다.
말릴 것도, 말려서 될 일도 아닌 걸 잘 알고 있었다.
순원이 짐을 다 싸고 곧 나리코에게 하직인사를 하려고 할 때 방안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리코가 가볍게 몸을 일으켜 달려 나갔다.
조금 있다 돌아 온 나리코는 순원이에게 말하였다.
“아버지가 하루 밤 더 유하고 가시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
나리코의 표정은 밝고 따스했다.
순원은 나리코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생머리를 단정히 빗어서 뒤로 넘겨 묶은 자태는 어릴 적 만화에서 보던 스위스 소녀 캔디를 닮았다.
몸이 마르지도 않았지만 살이 없는 몸매는, 채식의 덕분이리라.
건강하고 맑은 눈, 부드럽고 상냥한 입언저리.
가느다란 목선…….
순원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샘물처럼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짐을 다시 풀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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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순원은 반딧불이와 손가락 하나 찔러 넣을 수 없을 정도로 총총하게 박힌 까만 밤하늘의 별들을 눈망울 가득 새겨 넣었다.
이렇게 많은 별을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하늘에는 저렇게 많은 별이 있었던가……
그리고 나리코…
알퐁스 도테의 단편 소설 ⌜별⌟에 나오는 구절이 마음속에 떠올랐다.
“하늘의 저 숱한 별들 속에서 빛나는 별 하나가 내 가슴에 묻혀 버렸습니다.”
(계속)
/우보 최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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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호 전 충남도 행정부지사는 전)국무총리 비서실장, 행정중심도시 복합도시 건설청장, 행자부 소청심사위원장, 행자부 인사실장, 충남도 기획관리실장, 2002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사무차장(운영본부장) 등을 역임했다. 전)배재대학교 석좌교수, 공주대 객원교수, 고려대 객원교수, 국회의장 직속 국회의원 특권내려놓기 추진위원회 위원(2016)으로 활동했으며 현)홍익대 초빙교수이다.
단국대 행정학 박사, 일본 동경대 법학 석사, 연세대 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를 거쳐 미국 조지타운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했으며 영국 왕립행정연수소(RIPA)를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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