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번국도(진천-성환)상 엽돈재 너머 저수지에서 청룡사-좌성사길로 접근하는 것이 좋다. 산성의 동편은 서운산 정상에 막히는 반면 그 나머지 방향은 낮은 구릉과 평야지대로 시계가 아주 양호하며 우측 배티고개와 좌측 엽돈재 그리고 천안, 진천, 안성 일대가 모두 한눈에 들어온다.
동서 두 봉우리간 마안형 능선을 연결한 북벽의 양 끝에서 각각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부드럽게 회절돼 좌성사 뒤편에서 계곡을 가로막아 토축했다. 성안은 북벽으로부터 남쪽으로 약 30도 정도 비스듬히 경사져 마치 삼태기 속처럼 아늑하다.
▲ 서운산에서 바라본 전망 |
서봉 정상에는 타원형의 축대 위에 탕흉대(盪胸臺)라 암각된 바위가 놓였다. 문지 중 청룡사 쪽으로 내려오는 남문이 주 통로로 보이며 좌성사 옆 수구 옆에 냈다. 북벽 아래 비스듬히 사면을 이룬 평탄지가 성의 내부인데 여기에 건물이나 기타 시설들이 들어섰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안에 현재도 형태를 유지한 우물이 두 기 정도 확인되며 기타 습지 부분도 두어 군데나 있다. 이 집수구 물은 성벽 절단부의 수구를 통해 계곡으로 빠지는데 현재도 맑은 물이 제법 많이 흐른다.
서원경, 만노군에 진출해 있던 신라가 남진을 시도하는 고구려에 대한 방어선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성에서는 서쪽 낮은 구릉과 평지인 직산(성환), 안성 시내 나아가 죽주산성 근처까지 모두 조망되어 그 쪽 방면의 방어에 중요한 작용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남문지 바로 안쪽 오래된(아마 고려시대로 추정) 석조여래입상은 요즘도 기도처로 사용되는 듯하다. 마치 오줌싸개 소년이 키를 쓴 듯 광배를 진 석조입상여래불은 잘 생기거나 균형이 잡히진 않았을망정 복스러운 얼굴이 참으로 온화하고 인자해 보인다. 파괴된 후 이어붙인 듯한 두 손은 오히려 거북발 모양으로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 서운산성 탕흉대 암각 |
서봉의 탕흉대 정상에 서면 막혔던 서해까지 탁 트인 경치에 가슴 속까지 뻥 뚫리는 느낌이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 마음을 탕흉대란 이름으로 표현해 새긴 이의 속내가 저절로 느껴진다.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탕흉(盪胸)이라는 중국 고서의 한 구절로 압축해서 잘도 드러냈다. 갈겨쓴 글씨조차도 덩달아 시원스럽다.
고려말 고승 나옹선사가 아름다운 구름 속 용이 노니는 것을 보고 여기에 주석하면서 건설했다는 청룡사 전설이 있다. 일주문도 사천왕문도 없이 서운산 청룡사 현판 밑으로 민가집 문안 들어가듯 하면 된다. 일주문이나 무시무시한 사천왕을 두지 않은 것은 누구나 부담감 없이 들어오라는 뜻일 게다. 문 지키던 금강역사들은 대웅전 건물 추녀 네 모서리에서 포 사이의 불상조각들을 옹위하고만 있을 뿐이다. 조선 후기 장인 사인비구가 제작했다는 동종, 낡았지만 앙증맞은 삼층석탑도 있지만 청룡사를 다시 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제멋대로 생긴 부드러운 곡선미의 대웅전 기둥들이다. 있는 대로 생긴 그대로의 모습이 넓은 추녀와 더불어 친숙하다.
▲ 서운산 바우덕이상 |
산성 아래에는 청룡사와 한국판 집시족 연예인들의 우두머리 바우덕이 사당이 있다. 천민집단 떠돌이 남사당패들을 품어준 아량이 그 넓은 추녀에서 우러나왔고, 조선시대 유교적 질곡 속에서 벗어나 본성대로 살아가고자 하던 인간의 모습이 청룡사 기둥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들은 조선시대 반상의 차별 속에 떠돌아다니면서 힘든 삶 속에서 민중들의 애환을 달래 주던 대중문화계의 대표적인 실천자들이었다. 그들이 공연한 판굿은 줄타기, 무동타기, 버나돌리기, 풍물 등의 종합예술이었고 그 중심에 선 이는 여류 꼭두쇠 바우덕이다. 이곳에서 태어나 각종 기술을 전수받고 성행시켜 오늘날까지 민중예술로서 자리를 지켜 내려오게 한 공로자로 기려진다. 구성진 풍물가락이 귓전을 울리고 갖가지 재주들이 보이는 듯하다.
바우덕이사당이란 한글 현판은 그녀의 동상만이 홀로 지키며 남았고 몸은 산성 서쪽 자락 한참 떨어진 곳에 묻혔다. 찾는 이 없이 초라하고 호젓한 모습이 대접받지 못하고 살아가던 그들의 모습을 닮은 것 같아 바라보는 마음을 무겁게 한다.
서운산 정상에서 동편 능선상의 상중리성(배티고개)에서 내려오는 길에 배티성지(聖地)도 들러 봄직하다. 구한말 박해를 피해 숨어든 천주교신자들이 살아오던 교우촌이다.
서운산 골안개 사이로 솟아난 첩첩산에서 다소나마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을 듯하다. 한이 담긴 설운산을 승화시켜 서운산이라 부른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서운산 자락은 이름답지 않게 한이 많이 깃든 땅이다. 한 많은 삶을 슬퍼하고 그 슬픔과 삶을 기도로, 때로는 재기(才氣)와 노래가락으로 떨쳐 버리려 발버둥쳤던 곳이다. 서운산은 지친 그들을 버리지 않고 상서로운 구름으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포근히 감싸 주었던 넓은 품이었다.
조영연 / ‘시간따라 길따라 다시 밟는 산성과 백제 뒷이야기’ 저자
▲ 논산 신라군 진격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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