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우난순 기자 |
나는 그 남자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내가 무심코 바라보았을 때 나의 시선과 마주친 낯선 이방인의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 까무잡잡한 피부의 의기소침한 표정과 남루한 옷차림. 휴일 한 낮의 지하철은 승객이 많지 않아 자리가 많이 비었음에도 그 남자는 앉지 않았다. 왜 앉지 않을까? 이 물음은 지하철 안에서 서 있는 나와 똑같은 한국인에겐 결코 던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와는 다른, 아니 좀더 솔직하게 말하면 피부색이 다른 못사는 동남아인이라는 남자에게 던지는 ‘시선’이다. 배려를 가장한 차별적인 편견 말이다.
그런데 하필 내 옆에선 피부가 하얀 젊은 백인 여자들이 선 채로 소란스럽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저만치 출입문 쪽에서 손잡이를 잡고 어색하게 서 있는 검은 피부의 젊은 남자와 금발머리를 흔들어대며 지하철이 떠나가라 떠드는 하얀 피부의 여자들 사이에 내가 있었다. 이 삼각의 트라이앵글이 갖는 구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는 왜 색깔에 집착하는가. 피부색이 갖는 정치성은 인간의 본성일까.
미국의 백인우월주의는 견고하다. 21세기에도 해묵은 백인우월주의는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다. 버지니아주 폭력사태에서 보듯,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인종주의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여론에 떠밀려 ‘인종주의는 악’이라고 했다가 하루만에 극우 시위대를 두둔하며 본색을 드러냈다. 트럼프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인종카드를 들고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는 하층민 백인들이 세계화로 인해 궁지에 내몰려 있는 상황을 이용했다. 미국 우선주의 구호를 사용해 이민자가 미국 땅에 발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공약이었다. 트럼프는 심지어 대선 당시 버락 오바마가 미국 국적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정신상태가 의심스러운 트럼프가 계속 대통령직에 앉아 있는 한 미국의 인종주의, 파시즘은 노골화 될 것은 뻔하다.
저들의 지금과 같은 상황은 흑인노예제도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흑인은 어떤 사람들인가. 미국 남부에는 ‘한 방울(one drop)’이란 규칙이 있다. 아무리 먼 조상이라도 가계에 흑인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 있으면 흑인으로 간주한다. 겉모습은 거의 백인에 가까워도 그 ‘한 방울’ 때문에 차별받는 범주에 속한다. 피부색깔에 대한 편견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뤄졌다. 당대의 지성 칸트는 피부색과 연관된 인종분류에 따라 도덕적· 지적 능력을 평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의 피부색깔이 까맣다는 것은… 아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한마디로 검다는 것은 추하고 짐승같고, 흰 것은 아름답고 고상하다는 인식이 지배했다.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한다. 끊임없이 평등을 부르짖지만 그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해지고 출신지역, 학벌, 직업, 외모 등에서 차별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종에 대한 차별만큼 광범위하고 집요한 건 없다. 실제로 인류는 유럽인의 아메리카 원주민 학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등 참혹한 비극을 수없이 목격했다. 놀라운 사실은 2차 대전 히로시마 원폭 투하 때 당시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인을 짐승으로 여겨야 한다고 했다는 점이다. 트루먼은 젊은 시절부터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아니라면 그 어떤 사람도 성실하며 품위가 있다고 여겼다.
도대체 피부색깔이 뭐길래 차별로 인해 많은 사람이 고통을 겪을까. 팝스타 마이클 잭슨은 백인에 대한 열망이 컸다. 검은 피부를 새하얗게, 지독한 곱슬머리를 직모로, 두꺼운 입술과 콧망울을 얇고 날렵하게 만들었다. 좀더 가까이 접근해 보자. 과연 우리는 인종주의에서 자유로울까. 알게 모르게 우리는 백인과 흑인을 대하는 방식이 많이 다르다.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백인이다. 이런 편견은 영어학원에서 흑인 강사보다 백인 강사를 선호하고 동남아 이주노동자를 멸시하는 경향으로 나타난다. 백인은 우리를 얕보고 우리는 흑인을 업신여기는 상황이다.
오래 전, 프란츠 파농은 토로했다. “백인에겐… 스스로를 흑인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말이다. 흑인에게도…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백인들에게 증명하려고 애쓴다는 사실 말이다.” 어떻게 이 악순환을 벗어날 것인가. 17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차량폭탄 테러처럼 지구촌 곳곳은 인종갈등으로 인한 비극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의 전 퍼스트레이디가 ‘하이힐 신은 원숭이’가 되는 세상이니 말해 뭣하겠나. 우리의 다문화주의는 올바른 길을 걷고 있을까. 2002년 인권위는 평등권 위배라며 크레파스의 ‘살색’을 ‘살구색’으로 개정하라고 권고했다. 허나 우리사회의 이주노동자에 대한 인권유린은 심각하다. 갈 길이 멀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본다. 나는 차별받는 사람인가, 차별하는 사람인가.
우난순 기자 rain4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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